소설리스트

232화 (232/235)

인과의 실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사람들이 주저앉았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어떤 연결의 단락이었다.

곧이어 이들의 눈동자에 빛이 깃들기 시작했다.

"……풀렸어? 금제가 풀렸다!"

"오. 오오. 맙소사! 설마 이런 곳에서 자유를 찾을 줄이야!"

"도망쳐! 그 괴물이 다시 오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

그건 속박에서 벗어난 노예의 반응이었다.

전대, 전전대의 고수들은 자신의 의지로 이곳에 서 있던 것이 아니다.

천기자라는 이름의 괴물에게 잡혀서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용당했던 것.

드높은 이름값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사방으로 도망쳤다.

"어린 계집아이가 귀찮게 구는군."

조금은 성난 목소리로 천기자가 향아를 노려봤다.

그는 자신의 ‘선’을 자른 은소소보다 이걸 본 향아를 더욱 경계했다.

명한조차 보지 못한 것을 그녀가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신이 전이에 가까운 속도로 향아의 앞에 나타났다.

"그렇게 둘 수야 없지."

"……너."

그 앞을 가로막는 명한.

옷이 이곳저곳 찢어지고 상처가 여럿이었지만, 치명적인 건 없었다.

손바닥으로 천기자의 중신을 밀어내고, 바닥을 강하게 찍어 파(破)의 요령으로 때렸다.

힘과 힘이 맞물려 나선의 형태로 뒤틀리고 서로가 양방향으로 밀려났다.

여력에 팔 전체가 부들부들 떨렸지만, 명한은 움켜쥐는 것으로 억눌렀다.

‘이 정도라면 견딜 수 있어.’

무의 정점과 같던 힘은 아니었다.

은소소가 선들을 자른 것이 이유.

"대체 몇 명이나 이혼대법으로 잠식하고 있던 거냐?"

"불로불사를 쫓던 어리석은 인간들이다. 날 위해 희생한다면 그것에 가치가 있겠지."

"제대로 머리가 맛이 갔군. 너 하나를 위해 남은 건 모조리 희생되어도 괜찮다는 거냐?"

"백 마리의 개미보다는 한 마리의 범이다."

쿵――

땅울림 소리와 함께 천기자가 빛처럼 돌진했다.

명한은 이를 정면에서 받기 어렵다고 판단.

권경으로 공간을 비스듬히 강타하여 이 힘을 흘려냈다.

사선의 형태로 대기가 짓눌리고 그 아래의 것들이 형편없이 터져나갔다.

수의 다양함은 사라졌지만, 힘 자체는 되레 늘었다.

이혼대법이 끊기며 총량이 상승한 격이다.

"몇 번이나 할 수 있을까? 완전히 망가지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되살려서 쓸 수 있다. 너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어야 했어."

"너 같은 쓰레기에게 소중한 육체를 넘기라고? 그건 소백을 봐서라도 할 수 없다."

"무지한 인간. 그분이 돌아오면 모든 건 새롭게 시작된다. 하찮은 네 고집 따위가 대수일 것 같나?"

"그러니까 누차 말하잖아. 바라지 않는 걸 억지로 시키지 말라고."

손을 툭툭 털고 힘을 둘렀다.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해야만 하는 문제.

황제의 부름으로 온 것이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면, 이 삶에 가치를 매기는 것도 역시 의무.

잃은 것에 칭얼거리는 망자 따위에게 패배해서는 면목이 서지 않는다.

‘생각하자. 놈이 이혼대법으로 전대 고수들을 잡아두고 있던 건 이유가 있어서야.’

혼을 낭비하면서까지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만인을 지배할 생각이었다면 환상루의 나머지를 그대로 둔 것도 맞지 않는다.

과거에는 필요했고, 현재는 불필요한 행동.

"……심, 기, 체. 유지하기 힘들어졌군."

결론은 의외로 간단하게 나왔다.

천기자의 육신이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정설.

하지만 그는 서복과는 다르게 제약 없이 힘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다른 고수의 육체를 빌려서 그 균형을 맞춰왔던 것이다.

"그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는 없겠는데?"

"……네놈을 죽이고 이 땅의 벌레들을 몰아내는 데 충분한 시간이다."

"아니.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거다."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떨어지는 파괴적인 힘.

천기자와 명한 사이를 가르고 존재감을 강하게 피력했다.

천하를 놓고 따져도 이 싸움에 끼어들 자격이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화무천."

삼대가 이곳에 모였다.

#

한쪽에 천마, 다른 한쪽에는 화무천과 명한.

천기자는 눈으로 삼대를 훑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초대 천마부터 이어지는 이 핏줄은 지독한 악연이었다.

어쩌면 과거에 잘라냈어야 옳은 핏줄.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생각에 남겨 두었던 것이 이렇게 돌아왔다.

"숨어 있다면 그 하찮은 목숨이라도 연명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와서 모든 걸 포기하는 건가?"

"속세의 정이라는 건 버리기 힘든 집착이지. 그런 면에서는 너나 나나 다를 것은 없다."

"기어오르지 마라, 벌레. 네 얄팍한 감정 따위와 내 위대한 업적을 비교할 수는 없다."

"하하. 스스로를 위대하다 칭하는 인간치고 제대로 된 놈을 못 봤어. 네가 한때 인간을 넘어선 아득한 경지를 이룩한 존재라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 못하는 인간은 언제나 실패하는 법이야. 내가 그랬듯이."

화무천의 기운이 파도처럼 범람했다.

극한으로 갈고닦은 극천일무기.

한계를 넘고 그 영역마저 초월하여 마침내 외경의 경지를 밟고 있었다.

천기자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불쾌하다. 내가 중원의 하찮은 것들을 그대로 내버려 둔 건 무지한 삶이라도 유지하라는 배려였다. 헌데, 너희는 어째서 내게 사사건건 덤비는 것이지?"

"중원 무림이라는 곳은 언제나 그랬다. 뺏고 빼앗기고 경쟁하고 협력하고. 가끔은 지독하게 죽이기도 하고, 어처구니없이 화해하기도 하며 성장해 왔다. 이 땅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성장한 무대이지 네 바람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야."

"나는 천년 무림의 종주다. 내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우습군. 종주라는 자가 무예에는 재주가 없으니."

명한이 말을 거들었다.

"왜 전대 고수들을 묶어두면서까지 이혼대법을 유지했는지 알 것 같아. 술법에 관해서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천재인 건 맞지만, 너…… 무공에는 재능이 없는 거 아니냐?"

"……"

"역시 그랬군. 그렇게나 대단한 실력을 가졌음에도 쉽사리 움직이지 않은…… 아니, 움직이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야. 무학의 기본 요체를 다시 갖출 자신이 없어서지. 안 그런가?"

"그래 봐야 하찮은 벌레들의 수법이다. 나는 이미 하늘의 법에 통달했다. 구색을 맞추기 위한 작은 여흥 따위 없어도 그만이야."

"여흥이라."

명한이 말끝을 흐리는 것과 동시에 땅을 박찼다.

잔상을 남기고 사라진 몸은 천기자의 바로 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크게 누른 진각에 이어지는 강렬한 정권.

비틀린 대기가 나선 형태로 딸려 들어가 용의 형태로 관통했다.

그 유명한 항룡이십팔장의 하나.

‘웃기지 마라.’ 하지만 관통한 건 형태뿐.

힘은 천기자의 바로 앞에서 잡힌 채 원형 형태로 일그러졌다.

기공을 직접 잡아서 으깨버리는 신기였다.

"흉내에 불과해."

명한은 한 걸음을 더 옮겼다.

잡아두었던 기공이 뒤틀리며 천기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그대로 폭발했다.

솟구치는 용의 형상에 주변 기운이 날뛰었다.

"그렇군. 기본이 약해."

그리고 그 위를 화무천이 덮었다.

흩어지는 기운을 섭공의 요령으로 당겨서 아래로 떨어뜨리자, 거대한 망치와 같았다.

주춤거리던 천기자의 몸이 지면 아래로 주저앉았다.

당황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기 어려웠다.

"이게 천년을 수련한 결과인가? 남의 것을 빨아먹기 급급했던 것 같은데?"

"……웃기지 마라, 벌레."

천기자의 주변이 폭발했다.

파도처럼 솟구치는 지면 사이로 뛰어오른 뒤, 거대한 강대의 구를 던졌다.

태양이 땅에 충돌하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열기가 사방을 휩쓸었다.

살이 녹고 땅이 탈 것 같은 열기였다.

하지만 단순히 ‘강하다’라는 개념은 이 수준에서는 약하다.

명한은 화륜을 두르고 열기를 지면으로 방출.

화무천은 극천일무기의 기운으로 열기를 그대로 꿰뚫었다.

"웃기지 마라!"

분노한 천기의 의식이 다시 경계 밖으로 이어졌다.

외경의 현현.

명한과 화무천도 이를 마냥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밖에 의식을 투영하여 천기자의 간섭을 억제했다.

기이한 소리를 내며 뒤틀리는 인과의 고리.

"불쾌하다. 불쾌해. 어째서 너희 인간들은 그렇게 나를 괴롭히는 거지? 내 다름이 그렇게나 마음에 안 드는 거냐? 인정 못 해. 부족한 건 내가 아니라 너희다. 완성되지 않은 존재는 너희란 말이다!"

어마어마한 압력이 주변을 짓눌렀다.

산천초목이 으깨지고 바람과 대기마저 벗어나지 못하고 뭉개졌다.

이건 물리적인 현상, 그 위에 있는 이치의 붕괴였다.

천기자는 힘으로 인과의 고리를 끊으려 했다.

"저건……"

"위험하다."

명한가 화무천이 같은 생각을 품었다.

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천기자의 행동은 자칫 파멸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었다.

인과의 사슬은 그야말로 촘촘하게 이어진 연속의 상징.

하나가 끊어지면 나머지도 모조리 영향을 받게 돼 있다.

하물며 목적 없이 억지로 끊는다?

그동안 알던 세계 자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

"그것만은 안 돼. 이번 한 번만 좀 도와줘."

명한이 공멸의 공간으로 뛰어들어 인과의 한 줄을 잡았다.

그것은 가장 짙고 두껍게 이어진 선.

[어리석은!]

황제였다.

#

두 눈을 깜빡이며 명한이 정신을 차렸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올라가는 손.

기운을 둘러 주변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기운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

"……뭐지?"

그제야 명한은 주변 모습을 확인했다.

천기자와 어우러져 싸우던 전장이 아니었다.

외풍이 불어오는 벽과 좁은 실내공간.

허름한 벽지에 깜빡이는 조명.

글을 끄적이며 청춘을 보낸 바로 그 자취방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싸움은 한창이었고, 마지막에 불러온 것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이 과정에 지금의 모습이 끼어들 공간은 없었다.

"……환상?"

천기자는 술법의 대가.

어쩌면 세상 모두를 속이는 엄청난 술법을 사용한 걸지도 모른다.

대상자의 기억 속 세계를 불러와서 그 안에 가둬 버리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

명한이 침대 위에 주저앉아 머리를 굴렸다.

우웅. 우우우웅.

그때, 탁자 위에서 요란한 진동음이 들려왔다.

소백이 되기 전, 3년을 쓴 구형 폰이었다.

누군가의 연락을 받아보는 것도 참 오랜만인 느낌.

탁자를 더듬어 폰을 쥐었다.

[……매니지먼트입니다. 연락 가능할까요?]

어딘가 익숙한 이름.

명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름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고배를 마셨던 바로 그곳이었다.

기억과는 다른 현실.

명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작 평이 매우 좋아서요. 연재 관련해서 잠깐 통화가 가능할까요?]

하지만 그런 괴리와 다르게 입꼬리는 서서히 말려 올라갔다.

하긴 본래의 삶에서 얼마나 바라던 일인가.

누군가의 인정.

인기 있는 작품.

심장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시간이 되신다면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저희는 작가님과 함께 일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정중한 맺음말과 뚜렷하게 보이는 번호.

명한이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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