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행방
아찔함.
명한이 천기자에게서 받은 첫인상이었다.
예전에 맞닥뜨렸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지금의 모습이 그의 본질.
천 년을 넘게 살아온 괴물 그 자체였다.
"나는 일찍이 이 세계의 구조에 대해서 깨우쳤다. 인간은 인과의 그물에 묶인 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지. 그렇기에 합당한 존재와 함께 그 너머로 가려 했다."
그의 손아귀에서 이치가 뭉개졌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순리가 어그러지고 힘의 방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일순간에 주변 30여 장 공간이 그의 영역이 되었다.
거리 안에 들어와 있던 십수 명의 무인이 그대로 폭사했다.
안과 밖의 위상을 바꾸어 육체라는 틀을 그대로 터뜨려 버린 것이다.
이건 더 이상 무공이 아니었다.
"모두 물러나라! 접근하지 마!"
누군가의 외침에 황급히 물러나는 무인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닿는 거리는 이미 멀고 가까움의 개념이 사라진 후였다.
도망친다고 도망쳤지만, 한 걸음도 물러나지 못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것으로 다시 수십의 무인이 폭사했다.
혼란과 공포는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와 그렇지 않은 상대에 대한 간극.
이건 의기와 용기로 맞설 대상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흐름을 손에 넣고 제멋대로 주무르게 된 것은 벌써 천 년도 넘은 일이다. 나는 이미 그때부터 신이었고, 세상의 유일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나도 나와 같지 않은 존재를 불로불사로 만드는 건 어려웠다. 그렇기에 번거로움을 택했다."
그나마 맞설 수 있는 건 외경에 닿은 고수.
막천우와 마창, 육마완의 강기가 천기자의 얼굴 앞에서 일그러졌다.
둘은 영역의 지배력을 견딜 수는 있었으나, 그것을 뒤집지는 못했다.
강기는 먼지로 변하고 힘의 파동에 두 사람은 바닥으로 처박혔다.
"하지만 이 인과라는 틀은 나를 거부했다. 불로불사의 법을 부정하고 우리가 그 위에 군림하는 것을 시기했다. 이 얼마나 하찮은 행동인가. 고작 미물 따위를 건사하기 위해 구성된 조잡한 법칙 따위가 나를 거부하다니. 강자에 굴복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 이건 옳지 않다."
양손을 뒤집어 영역을 그대로 눌렀다.
막천우와 육마완의 몸이 지면을 뚫고 들어가 깊은 곳에서 충돌했다.
고통이 비명을 타고 전해지고, 충격이 해일처럼 땅을 쓸고 갔다.
이 무지막지한 광경에 나설 수 있는 건 정말 소수였다.
"우행 따위에 변명을 붙이지 마라. 네 어리석음이 내 패도를 막는다면, 그대로 이 땅에서 소멸시킬 뿐이다."
"천마."
천마의 걸음을 따라서 칠흑과 같은 기운이 주변을 잠식해 나갔다.
이는 천기자의 영역을 갉아먹으며 거대한 촉수처럼 주변을 몸집을 불려갔다.
서로가 같은 계열의 힘이기에 이 치열함은 극심했다.
공간이 삐걱거리고 어긋난 자연지기에 불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태풍이 휘몰아쳤다.
땅이 녹고 바람이 얼어붙었다.
"넌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망가뜨렸어. 황제조차 불로불사를 원하지 않아. 네 바람으로 이미 떠난 사람을 괴롭히지 마라."
"……소백. 아니, 밖의 아이인가."
천마. 그리고 명한.
두 사람만이 천기자의 영역으로 파고들어 그 힘을 받아냈다.
휘몰아치던 자연지기의 폭풍은 순식간에 실바람이 되어 주변으로 흩어졌다.
힘을 누른 것이 아니라 천기자가 직접 해제한 것이었다.
그는 흔들리는 대기를 손끝으로 훑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 바람은 하나였을 뿐이다. 그걸 너희가 막겠다면 흔적도 남지 않게 지워주마. 하늘도 땅도. 이 세계도 나를 막을 수는 없다. 내가 하고자 하면 한다."
바람은 거대한 칼이 되어 주변을 쓸었다.
이건 서복이 사용하던 ‘결과’와 ‘원인’을 뒤바꾸는 요령에 가까웠다.
천기자가 칼을 휘두르기 전에 이미 명한과 천마의 가슴팍에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
강기의 막도 천기를 두른 몸도 소용이 없었다.
덧씌워진 현실이었다.
"그렇게 간단히 당해줄 것 같은가?"
이를 천마는 군림의 보로 찍어 눌렀다.
덧씌워진 현실을 밟아서 무위로 돌린 것이다.
상처는 본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바람의 칼은 칠흑의 기운에 사로잡혔다.
"너는 너무 속세의 인간들을 얕봤어. 육체를 환상루에 둔 채 우리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나?"
명한도 자연스럽게 이 공격을 받아넘겼다.
순응의 도리로 이끌린 인과의 띠들이 그의 상처를 보듬어 회복의 단계까지 단번에 넘겨 버렸다.
죽음에 닿지 않으면 절대로 상처 입지 않는 완벽한 대응수단이었다.
칼로 이루어졌던 바람은 그의 앞에서 힘없이 흩어졌다.
방법은 다르나 천마와 명한 모두 단순한 이치 노름에서는 밀리지 않았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작은 힘을 다루다 보니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군."
"천 년의 세월은 짧지 않아, 천기자. 네가 환상루에서 꿈만 꾸고 있을 때 속세의 인간들은 계속해서 발전했다. 육체에 기를 담고 의지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 말이다. 너처럼 귀를 닫고 눈을 가린 악선 따위가 우리의 자유를 앗아갈 수는 없어."
"……건방지군. 육체가 없다고 너희 따위가 나를 이길 것 같나?"
순간.
천기자의 몸이 강하게 진동하더니 두 개로 나뉘었다.
같은 기운, 같은 얼굴, 같은 기세를 내뿜고 있는 두 명의 천기자.
"발버둥 쳐 봐라. 너희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해 주마."
천마와 명한을 향해 각각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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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의 힘이 서로 상충한다면 남은 건 스스로의 역량.
명한의 선택은 가장 빠르고 단순한 것이었다.
‘놈은 육체가 쇠락해서 영혼만으로 현현했어.’
그 말인즉슨, 무인의 삼위일체 중 하나가 빠졌다는 의미.
땅을 강하게 딛고 앞으로 뛰었다.
퍼엉――!
눈앞에서 튀는 불꽃.
천기자의 손끝을 따라서 아래에서 위로 치솟았다.
열염지공 중에서도 극상의 것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신기.
하지만 단순한 화염이라면 명한에게도 밀리지 않는 것이 있다.
화륜의 불꽃을 주먹에 감아서 그대로 휘둘렀다.
격렬한 파문을 그리며 불꽃이 터져나갔다.
‘조금 더 안으로.’
화끈한 열기에 털이 타고 얼굴이 익지만, 멈출 수는 없다.
명한이 다리에 힘을 주어 거리를 좁혔다.
천기자의 낯짝이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왔다.
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이 맞물렸다.
충격이 바닥으로 퍼지고 힘의 고리가 화경의 논리대로 떨어졌다.
천기자는 능숙하게 무학의 이치를 구사하고 있었다.
명한이 황급히 중심을 아래로 낮추며 힘의 이동을 중간에서 제지했다.
땅이 갈라지고 하체에 충격이 전달됐다.
"하찮은 것들의 기술 따위를 내가 하지 못할 것 같았나?"
비웃음을 섞으며 힘을 거꾸로 당기는 천기자.
명한의 다리가 땅에서 떨어지고, 거꾸로 뒤집혀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겨우 지면을 쳐서 충격을 상쇄했지만, 여파가 적지 않았다.
속이 흔들리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육체가 없고 술법을 연마한 천기자는 박투에 약할 것이다――
이 가정이 틀렸다는 증거였다.
쩌엉!!
어느새 근접한 천기자의 손바닥이 명한의 가슴을 강타했다.
몸이 그대로 십여 장을 날아갔다.
"쿨럭……!"
거친 숨을 통해 검붉은 피가 튀어나왔다.
내장이 상했다는 증거.
외경의 힘을 돌리면 이런 상처 따위는 우습지만, 그걸 천기자가 가만히 볼 이유가 없다.
이미 속도전에 돌입한 이상, 감당할 건 감당하고 넘어가야 한다.
펑. 펑! 퍼펑!!
기세를 놓치지 않은 천기자가 연거푸 몰아쳤다.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은 어마어마한 내공의 장력들이었다.
천 년을 수련한 인간이니 단순하게 셈해도 천 년의 내공.
아무리 명한이 기연을 우걱우걱 씹어먹었다고 해도 양에서는 절대로 상대가 안 된다.
‘반격의 기회를 잡아야 해.’
다리를 땅에 박고 장력의 해일을 받아쳤다.
몸이 들썩이고 충격에 속이 뒤집혔지만, 견뎠다.
파앙――!!
그리고 그 충격을 한곳으로 몰아서 되돌렸다.
어긋난 나선 형태로 충격파가 퍼지고 지면이 한쪽으로 밀려났다.
천기자도 외경을 쓰지 않는 이상 법칙에서 자연스러울 수 없는 노릇.
휘청거리며 틈을 열었다.
빈 곳에 찔러넣는 것이 무예의 기본.
진각을 타고 흐른 힘이 주먹을 매개체로 쏘아져 나갔다.
"……!"
하지만 그 빛은 천기자의 손끝에서 바닥으로 처박혔다.
완전히 균형을 잃을 상태에서도 거력을 손으로 잡아서 그대로 화경의 이치로 눌러버린 것이다.
절예도 이런 절예가 없다.
"천 년의 수련이다, 아이야. 술과 법에 집착하던 서복과 나를 같은 선으로 놓고 판단하면 곤란해. 내가 중원의 무학이며, 모든 무예의 정점이다."
그리고 이어진 진각.
땅이 거미줄 형태로 갈라지고 파편이 중력을 무시하고 부유했다.
얼핏 단순한 암기형 공격으로 보일 수 있으나, 명한은 그게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아차렸다.
모든 파편에 각기 다른 기운이 섞여 있다.
소림, 무당, 화산, 아미, 청성, 곤륜……
그야말로 모든 무학이 일수에 펼쳐지는 격.
일대종사.
아니, 그 이상.
"격의 차이를 느껴봐라."
무학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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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아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싸움은 그녀가 끼어들기에는 너무 버거운 수준이었다.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고 손톱을 씹었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보기를 수 분.
"……이상해."
향아는 무언가 어긋나 있음을 발견했다.
언제라고 콕 집어서 말하기는 어려웠으나, 어느 순간부터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시야 전반에 걸친 실금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가 가진 특별한 눈에만 구별이 되는 독특한 경계였다.
"소소, 아가씨."
"……응? 왜?"
"저거, 저거. 혹시 보이세요?"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은소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별것 없는 공터였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뭐가 있어?"
"이상한 실금 같은 게 있어요."
"실금? 그게……"
지금 상황과 무슨 관계인가.
자연스러운 반문을 입에 물었다가 취소했다.
그녀도 향아의 독특한 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더군다나 명한이 밀리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허튼 것으로 그녀가 관심을 돌릴 이유가 없음도 안다.
이렇게 행동하는 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이 싸움하고 관계된 거야?"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요. 소소 아가씨는 천기자를 따라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요?"
"전대 기인들 말이지?"
"네. 천기자를 돕기 위해서 온 거라면 우리와 싸워야 옳잖아요. 하지만……"
"미동도 없지. 큰 싸움에 그냥 물러난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이유가 있어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에 실금이 관여되어 있다는 것.
은소소가 격전의 현장을 슬쩍 본 뒤, 조용히 한 걸음 물러났다.
격렬해지는 싸움에 아무도 그녀의 이런 움직임을 주시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위치를 지정할 수 있겠어?"
"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걸리면 방해받을 수 있어요."
"알아. 날 믿고 위치만 찍어. 이게 소백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놓치지 않아."
"……네, 아가씨."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두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저기예요, 아가씨!"
유리에 비친 상처럼 희미하게 번지는 실금.
그 위로 은소소가 전력으로 검강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