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0화 (230/235)

천기자 현현

모든 방법론은 항상 최선을 향해간다.

천기자의 입장에서 황제의 부활을 막는 최악의 적은 명한.

정확하게는 소백의 육체를 차지하고 있는 명한의 영혼이다.

즉, 그의 영혼만 처리할 수 있으면 심, 기, 체의 완전한 융합이 쉬워진다.

이 사실은 천기자도 알고 명한도 알고 있었다.

"역시 넌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군."

"천 년을 살아왔다. 이 세상의 구조 따위는 오래전에 파악했지. 거울의 이면이라 하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투영된 존재. 너는 절대로 황제가 아니다. 그러니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이미 인과의 흐름 속에 녹아든 황제의 영면을 방해하려고?"

"어리석은 소리. 그분은 속세의 어리석음에 지쳐서 탈각했을 뿐이다. 옳은 방법과 옳은 기준으로 그 존엄을 세운다면 내 업적을 치하해 주시겠지."

흐릿한 그림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기자.

들뜬 목소리에는 지금껏 볼 수 없던 진심이 깃들어 있다.

황제를 향한 그의 마음은 비교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어째서 그걸 네가 정한다는 거냐. 떠나고 싶어 떠난 사람을 억지로 잡지 마."

"어리석은 너는 알지 못한다. 그분과 나의 관계는 천 년이라는 시간도 막지 못한 것. 내 충정을 아신다면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네 지긋지긋한 집착에 도망친 사람이?"

"날 자극하려 하지 마라, 어리석은 아이야. 본래의 삶으로 돌려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호의. 주변을 봐라. 이 무지몽매한 벌레들의 속세를. 이런 곳에서 아등바등 발버둥 쳐봐야 네게 남는 것은 증오와 회한뿐이다."

세상의 시간이 명한과 천기자를 중심으로 멈춰 있었다.

악에 받쳐 소리치는 사람의 형태가 밀랍처럼 보였다.

분노, 슬픔, 괴로움……

흐르지 못한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몰아쳤다.

"그래서 기둥을 남겼던 건가?"

"의도는 없다. 거기에 있는 건 의미뿐이지. 부수면 부수는 데로, 내버려 두면 내버려 두는 데로. 기둥에는 각각의 의미가 있을 뿐. 변하는 건 속없는 주변의 인간들뿐이다. 나도 그러했지."

"네가 황제를 모시고 있었을 때?"

"인간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듣고 싶은 것만 듣지. 내 충정의 본질은 엿보지 않고 그저 뒤집어쓴 거죽의 형태만을 평가하는 거다. 그 어리석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추악함을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천기자의 깊은 곳에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혐오가 깃들어 있다.

그건 내관으로서 황제를 곁에서 모시던 시절의 경험.

아마도 최측근이었던 그를 시기하던 사람이 여럿이었을 것이다.

내관이었던 그를 향한 질시와 혐오.

그 탈출구였던 황제를 향한 집착은 일견 납득가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나와 넌 같지 않다, 천기자. 나는 본래의 삶에서 밑바닥을 기었지만, 그렇다고 타인에게 그 죄를 돌리지는 않았어. 내 글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모자람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에게서 답을 찾고자 했어. 네가 겪은 굴욕과 괴로움이 뭔지는 전부 알지 못하나, 그걸로 나를 설득할 수는 없다."

"무지하군. 이곳에 남는다 한들 네게 뭐가 남지? 저 하찮은 인간들을 위해서 살겠다고? 고작 눈앞의 것에 발버둥 치는 벌레의 삶을 위해서? 의미 없는 것에 목매지 말고 돌아가라. 그곳에서 네가 이루지 못한 삶을 이뤄. 네 혼이라면 그쪽 세계의 신이라도 될 수 있다."

"지구의 신이라. 달콤한 제안이기는 하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야. 나는 내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도망치지도 않아."

이곳으로 넘어와 맺은 인연들이 있다.

혹자는 선연이고 혹자는 악연이었다.

하지만 모든 인연에는 저마다의 가치가 있는 법.

그것이 싫다 하여 끊고 저버리는 건 자신의 삶마저 부정하는 격이다.

"……정말 고집이 센 아이로군. 뭐, 상관없다. 어차피 필요한 건 네가 아니었으니까."

한 걸음 물러나 회백색의 빛으로 물드는 천기자.

그를 중심으로 천지의 기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너는 이 기둥들이 황제의 기운을 대신할 거라고 생각했지. 허나, 아니다."

"아니라고?"

"기둥은 촉매. 그것을 중심으로 모인 인간 군상의 감정을 증폭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지. 하나하나가 외경에 닿은 고수의 역할을 해 준다."

"천기를 뚫기 위해서?"

"그분을 불러오기 위해서는 천기의 흐름 자체를 막을 필요가 있지. 파괴하든 보관하든 역할을 다했으면 상관없다."

천기자가 손을 들어 올리자 거대한 빛의 기둥이 이어졌다.

이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땅의 인간이 하늘의 기운을 침범하기 위한 도구.

"맞아. 역할을 다했으면 상관없어."

"……!"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한 기둥.

형태가 희미해지더니 천기자의 제어를 벗어나서 요동쳤다.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당혹으로 물들었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그쪽이 나라는 인간을 아는 것처럼, 나도 나를 알아. 세상에 기둥이 뿌려지면 어떻게든 참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나거든. 그러니 모든 오명을 다 뒤집어쓰면서도 이걸 한곳에 모았어. 뭐가 됐든 네 속셈이 여기에 있는 건 확실하니까."

"……파괴하지 않았구나!"

"빼돌렸지. 땅굴을 파고 네놈의 눈을 피하고자 영맥의 길을 타고 움직였다. 청청과 금홍이 애를 써주고 있다고. 네가 바라는 무엇도 그곳에 닿지 않아."

천기자의 능력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이 아닌 것에 기대는 것이 선택지였다.

땅속 깊은 곳을 타고 흐르는 영맥을 기준으로 청청과 금홍이 신수들을 모아서 하나의 울타리를 쳤다.

마치 현대의 페러데이 케이지.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신호를 차단하여 고립시켰다.

천기자의 말대로 수많은 감정이 이곳에 모였다 한들 증폭기가 없다면 하늘에는 닿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방법이 있다, 천기자."

"버러지 같은 인간이……"

싸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성토하는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이 눈앞에 떠 있는 빛무리를 보고 놀랐다.

태양이 두 개가 되기라도 한 듯 엄청난 빛이었다.

당황에 얼어붙고 주변이 적막으로 휩싸였다.

"한 번에 안 되면 다시 시도하면 그만이다. 기둥을 내어놓지 않는다면 모두를 죽이겠다."

그리고 이어진 빛의 확산.

하늘에서 기둥이 떨어지듯 셀 수 없이 많은 빛들이 땅으로 추락했다.

이 빛의 기둥 하나하나마다 사람이 섞여 있었다.

안개처럼 피어나는 빛무리를 밟으며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자연스럽게 주변을 오시하는 시선.

몸에서 풍기는 강렬한 기도.

"……저 문양은 사마쌍살!?"

"흑천마도, 갈마휘! 전대 마두들이다!"

"풍양자 어르신!? 어떻게 된 거야!?"

그 하나하나가 시대를 주름잡던 고수였다.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뒤섞여 있는 고수의 등장에 사람들은 당황했다.

적인지 아군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가장 밑바닥의 수작인가?"

"네놈이 인간의 굴레에 묶여 있는 이상 변하지 않는다. 남은 생각한다는 건 그런 개념이지. 사람들을 살리고 싶다면 기둥을 가져와라."

"여기 있는 사람들을 죽이고 나면 네 바람대로 천기를 끊을 수 없을 텐데?"

"그때는 조금 더 난폭하고 과격한 수를 쓰면 그만. 네 육체가 무르익은 이상 내게 제한은 없다."

몇 마디 대화로 확실해졌다.

명한이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와―!’ 하는 포효와 함께 일단의 무리가 땅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 숫자가 적게 잡아도 백.

각각 아미, 무당, 소림, 개방 등의 상징을 달고 있었다.

빛에서 튀어나온 전대 고수를 맞이해서 삼삼오오 균형을 맞췄다.

"이제부터는 세속의 싸움이라는 의미. 내게 믿음을 준 사람도 적지 않다."

"고작 몇 놈 더해진다고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와 함께 루의 깊은 곳에서 새로운 시대를 기다려온 이들이다. 네게 승산은 없다."

"환상루. 허나, 그 환상에 모두가 속은 건 아니다."

이번에는 신교 쪽이었다.

파운과 강유가 각각 병력을 이끌고 주변을 포위하는데, 그 중심에 신기자와 구문자가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산문을 떠난 이들이 모두 포함된 숫자였다.

"사부님, 이건 옳지 않습니다!"

"모든 가르침을 스스로 저버릴 생각입니까!"

"사문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형제들의 얼굴을 보기 부끄럽지도 않은 건가요!?"

이들 모두 명왕도의 결과를 알고 있다.

지난 세월 숱하게 스러진 사형제들의 사연도 익히 안다.

환상루의 천기자는 분명 인간을 초월한 존재이나, 그 바탕에 있는 건 지극히 인간적인 탐욕.

모든 가르침을 정면에서 저버리는 행동이었다.

"감히 루를 배신하려는 거냐?"

"배신이 아닙니다, 사부님. 루를 떠나 도련님께 의탁할 때 사부님은 그러셨죠. 네 뜻대로 행하고 언제나 루를 가슴에 품으라고. 그 의미가 훗날에 절 도구로 쓰기 위함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전 당신의 탐욕을 채워주기 위해 그 먼 길을 달려온 것이 아닙니다!"

"하하하! 속세의 싸움은 속세의 인간들에게 맡겨 주시죠? 대체 언제까지 추하게 물고 늘어질 겁니까? 옛 늙은이들을 끌고 온다고 우리가 터럭만치라도 두려워할 것 같았습니까!?"

"……감히 네놈들이!"

노골적인 말에 천기자의 손끝이 빛났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

그야말로 신과 같은 능력이었으나, 이곳에는 이와 준하는 괴물이 또 있었다.

쿠웅――!

검은 장막에 가로막히는 벼락.

"천마."

"드디어 만나는군, 천기자."

하늘 아래 제일이라 불리는 남자.

천하제일인, 천마였다.

"네놈들 일족은 시작부터 끝까지 나를 귀찮게 하는구나."

"그 말은 그대로 돌려주고 싶군. 우리 일족은 네놈이 이끌던 일월교의 만행 속에서 태어났다. 피를 삼키고 분노를 머금으며 반역의 때를 기다렸지. 천마라는 이름은 바로 네놈을 처단하기 위한 우리의 각오다."

"쓰다 버린 짐승 새끼가……"

"그 짐승에게 덜미를 물린 것이 네놈 아닌가? 영혼에 새겨진 상처에서 우리는 천마신공을 발현하고 그것을 연구하여 피로 계승했다. 그 땅에 묻힌 수많은 형제들을 위하여 네놈을 반드시 끌어내리겠다."

쿠르르르릉.

태양이 어둠에 가려지고 칠흑과 같은 장막이 사위를 휘감았다.

낮과 밤의 경계마저 흔드는 힘의 파도.

수백, 수천, 수만의 검은 벼락이 한 번에 천기자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세상에 쪼개질 것 같은 굉음에 심력이 약한 이들은 그대로 기절했다.

그야말로 인세마왕.

천마다운 위력이었다.

"……네놈들이 기어코 가장 더럽고 추잡한 방법을 택하는구나."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폭력의 가운데서도 천기자는 티끌만치도 다치지 않았다.

새카만 연기가 어깨 위로 피어오르고, 회백색의 광휘가 그 너머를 덮기 시작했다.

흑과 백이 뒤섞여 혼돈이 잉태하는 듯한 광경.

세상의 이치가 뭉개지고 무질서가 땅거미처럼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위로, 한 남자가 발을 디뎠다.

"됐다. 모조리 죽이고 처음부터 시작하자."

천기자.

그 현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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