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투구
주변이 고요했다.
명한은 발끝으로 흙을 툭, 치고는 가운데로 걸어갔다.
주변인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일부는 믿음, 일부는 시기. 또 다른 일부는 적의를 품고 있었다.
아, 이건 제법 기분 좋다.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천마의 앞에 섰다.
"그래. 각오는 된 거냐?"
"마치 부서진 거울의 파편을 맞추듯, 딱 맞아 떨어졌습니다."
"흐름에 맞춰가는 것이 네 바람인가?"
"궁리하고 애쓰다 보니 바른 곳으로 왔을 뿐입니다."
"하하. 궤변이지만, 훌륭하다."
천마가 기운을 일으켜 도포를 날렸다.
검은색 무복에 무늬 없는 철검 하나를 쥔 모습이었다.
수수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강인한 인상을 자아냈다.
그가 이런 모습으로 무림을 종횡한 건 오래전의 일.
전성기의 혈기를 드러냈다는 건 이번 싸움에 전력으로 임하겠다는 의미였다.
"네놈의 본질이 무엇이든 내 자식임은 변하지 않는다. 세 수를 양보할 테니, 전력을 다해 보아라."
"다 늙은 아버지에게 양보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뒷방 늙은이처럼 젠체하지 마시고 전력으로 붙어 보죠."
"그놈, 입담은 누구에게 배웠을까."
"세상이 가르치더군요. 약하면 먹힌다고."
"옳다."
순간.
양쪽에서 기운이 폭풍처럼 솟구쳤다.
방파제에 부딪히듯, 서로의 기운이 충돌하며 거대한 균열을 만들었다.
땅부터 하늘까지 이어지는 선.
공간이 일그러지고 구름이 선에 따라서 나뉘었다.
이건 이미 인세의 싸움이 아니었다.
상황을 보기 위해서 나왔던 이들이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보여주마, 천마신공이 무엇인지."
쿵――!!
걸음을 내딛는 천마.
세상의 인과 자체가 그의 기운에 짓눌려서 방향을 뒤틀었다.
그야말로 군림의 보(步).
천마보다 높이 있던 모든 것들이 아래로 처박혔다.
나무도 산도 하늘도.
그야말로 세상을 짓눌렀다.
드득. 드드득.
그 가운데서 버티고 서 있는 건 명한.
그 주변의 공간이 압력을 받아 부서지고 복구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힘의 여파를 견디지 못한 땅이 거미줄처럼 무너지고 있음에도 그는 두 발을 떼지 않고 견뎠다.
그리고 희미하게 그려지는 미소.
고작 이것뿐이냐는 도발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과연. 걸음에 무너지지 않는다면 손으로 눌러주마."
이번에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손이었다.
그 크기가 주변 백여 장을 다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바닥에 닿지 않은 속도와 여파만으로 땅을 수 장 아래로 눌러버릴 정도였다.
바위가 가루가 되고 흙은 먼지로 화했다.
유성이 떨어지면 이럴까?
이미 이건 무공의 개념이 아니었다.
"그렇게 누르기만 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화경이라."
하지만 명한은 그 압도적인 파괴 속에서도 건재했다.
신의 손바닥 같은 천마의 일격을 화경의 요령으로 흘려서 지면으로 받아냈다.
땅은 충격에 가라앉았어도 그는 멀쩡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아무리 힘의 규모가 커져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의 눈은 태양이오, 호통은 벼락이자 손짓은 태풍이었다.
모든 것을 잊고 그 자체를 세상과 동화시키면 기적은 오히려 쉬웠다.
"초대의 요령을 나름대로 각색했군."
"저마다의 도가 있는 법. 당신의 도가 군림이라면 내 것은 조화입니다. 섞여서 나아감에 두려움이 없고, 운명이라는 짐을 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유약한 선택일 뿐이다. 천하의 강자라면 응당 군림의 법을 취해야 할 터."
천마의 좌우 쌍수가 교차했다.
세상의 균형이 어긋나고 바람이 태풍처럼 불어왔다.
모래 먼지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주변을 휩쓸었다.
주변을 압도하는 파괴의 힘이었다.
"군림하여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에 명한은 극천일무기의 기운으로 땅을 누르며, 퍼지는 여력을 천처럼 휘감았다.
강대한 분노는 끝없는 흐름에 사라지고 주변을 휘감는 태풍마저 감싸 안았다.
그것은 마치 망망대해로 퍼져가는 파문.
"뭇사람을 보았다. 범인의 사고와 판단을 관조했다. 신선이라 탐욕하는 짐승들을 지켜봤다. 삶의 기준이 부서진 이후 끝없는 탐색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거인은 없더구나."
"그래서 직접 거인이라도 되겠다는 말입니까?"
"혼천의 어리석은 자들은 밖에 존재하는 탐욕의 짐승을 법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세속의 어지러움과 혼탁에서 벗어난 겁쟁이들의 선택. 올바른 거인이라면 이 땅에서 부딪치고 싸워서 쟁취해야 한다."
"……모든 일이 끝난 후."
"그래. 그것이 무림일통의 과업이다."
이제야 명한은 천마의 진심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는 여전히 혼천과 천기자 같은 속세 밖의 이들을 경계한다.
속세에 들어와서 살지 않는 거짓된 선가자라는 판단 때문.
하지만 이들을 경계하고 제압하려는 마음에서는 차이가 있다.
천마의 눈은 그다음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파괴를 공표했군요."
"그래. 그래야 네가 내 반대편에 설 테니까."
"당신이라는 사람은 아들마저도 이용할 각오가 돼 있군요."
"천하의 주인이라는 것은 그런 자리다. 네가 천하삼분으로 나를 이용했듯이, 나도 무림일통을 위해서 너를 쓰고 있을 뿐이다."
"하. 하하하……!"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명한의 모습에 천마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이유로 웃는 것이냐?"
"아뇨. 아뇨……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동안은 사실 당신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습니다. 초월자이면서도 그 누구와도 겹치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젠 좀 알 것 같네요."
입가에 남은 미소를 털어내며 명한이 천마를 응시했다.
그 얼굴에서 화무천의 모습이 조금은 겹쳐 보였다.
‘그래. 그런 거였나.’
세상만사는 언제나 가장 인간적인 것에서 답이 나온다.
"전 천기자를 쓰러뜨리고 나면 천문(天門)을 닫을 겁니다."
"문을 닫으면 너와 나 같은 초월자는 나타나기 어려워진다."
"애초에 천문은 과거의 실수로 우연히 열려버린 것에 불과합니다. 저나 당신. 혹은 중원의 산재한 초월자들. 지나친 힘을 인간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하죠. 그러니 천문을 닫고 더 어렵고 힘든 길로 안내할 셈입니다."
"그게 바람이냐?"
"네. 중원의 통일 같은 건 비슷한 이들끼리 싸워서 쟁취하라고 해 두시죠."
"……흥. 원한다면 납득시켜 봐라."
"그럴 생각입니다."
모든 걸 다 드러냈다.
이젠 하나를 위해 승패를 가릴 때.
하늘 아래에서 두 초월자가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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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승부가 어떻게 났는지 아는 사람은 당사자 둘을 제외하고는 없다.
천둥과 벼락이 난무하고 폭풍이 주변을 휘감았기 때문.
경지에 이른 고수조차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싸움이었다.
길고 긴 싸움 끝에 하늘이 맑아졌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진 후였다.
천마가 이겼다, 명한이 이겼다.
말만 무성할 뿐, 당사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일단 기둥을 옮기라는 겁니까?"
"위에서 내려온 명령은 그러니 따라야지."
"허. 그럼 천마가 진 거요?"
"설마. 그랬으면 이미 다 박살 나지 않았겠소?"
무성하게 피어나는 이야기와는 반대로 기둥에 대한 건 빠르게 처리됐다.
산발적으로 보관 중이던 기둥을 한곳에 모아두는 것으로.
이를 두고 천마의 패배가 아니냐는 말도 나왔으나, 모아서 파괴하는 편이 빠르다는 논리로 일축됐다.
결국, 결론은 기둥이 모두 모인 후.
파괴와 보관, 둘 중 하나의 결론으로 나머지를 유추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걸 이대로 지켜봐야 하오? 저 안에 우리 가족들이 포함되어 있단 말입니다! 회주의 말만 믿고 이렇게 기다릴 수는 없소!"
"맞습니다! 한곳에 사람들을 모았다가 천마에게 공격당하면 어쩔 생각입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신교를 공격해서 기둥을 확보해야 합니다!"
소명회가 자리 잡은 터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각 문파 중진들이 찾아왔다.
기둥을 돌려받기 위함이었다.
믿은 건 명한의 약속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침묵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불만이 쌓여갔다.
"회주. 각 문파의 불만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대로 두다가는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내버려 둬. 어차피 결말이 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보다 아래쪽 일은 어떻게 돼 가?"
"착실하게 진행 중입니다. 아마 며칠 내로 마무리가 될 겁니다."
"며칠인가. 그 뒤가 문제겠군."
하지만 명한은 그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선까지 침묵을 유지하고 흑점의 몇몇 사람만 겨우 만났다.
불통과 불신의 일주일.
변화가 생긴 건 정확하게 팔 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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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 한가운데에 석병진이 구축됐다.
그리고 그 내부에 기둥이 안착하였다.
그 숫자가 물경 8만을 넘었다.
중원 무림에 풀린 대부분의 기둥이 이곳에 모인 것이다.
장관이라면 장관.
상황을 주시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거대한 기둥 군집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다음을 궁금해했다.
그렇다면 기둥에 대한 결정은 보호인가 파괴인가.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태사."
이월의 보고를 듣고, 명한이 천막 밖으로 나섰다.
쏟아지는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석병진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천마도 나온다!’ 수군거림은 반대쪽 신교의 진형.
천마도 명한과 마찬가지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번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천마가 훌쩍 뛰어 허공을 밟았다.
그리고 쏟아내는 거대한 기운.
마치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순식간에 석병진이 있던 곳을 통째로 짓눌렀다.
땅이 요동치고 어마어마한 굉음과 바람이 휘몰아쳤다.
"뭐, 뭐야……!?"
"천마가 기둥을 전부 파괴했어!?"
"무슨 짓이야! 저긴 내 사형이 있다고!"
"젠장! 결국, 천마에게 승복한 거냐!?"
당황과 혼란 속에서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기를 뽑아 드는 이들도 여럿.
삽시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해갔다.
콰콰콰쾅――!!
이때, 명한의 장력이 그 위를 다시 덮쳤다.
먼지구름이 화산처럼 치솟고 기둥이 있던 자리가 완전히 뭉개졌다.
가루가 되어 휘날리는 기둥들.
눈 뒤집힌 수백의 무인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여기서부터는 인내의 영역이 아니었다.
"회주!! 우린 당신을 믿었소!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이럴 수는 없어! 저 안에는 내 누이가 있단 말이다! 배신자!"
"저 배신자를 끌어내!"
"천마에게 패배한 것이 부끄러워서 숨겼던 것이오!? 이 쓰레기 같은 인간!"
분노, 슬픔, 안타까움.
온갖 감정이 화산처럼 터지며 명한에게 쏟아졌다.
그 열기는 극한에 달한 극천일무기보다도 더했다.
오직 한 사람, 명한에게 집중된 흐름이었다.
웅――!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서 명한으로 한 가닥의 선이 이어졌다.
이건 세상의 인과로 짜여진 천기라는 그물의 실타래였다.
‘밖’에서 들어온 명한이라는 영혼을 묶는 속박의 힘.
[드디어 잡았구나, 밖의 아이야]
동시에 천둥을 닮은 목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아주 오랫동안 환상 속에서만 머물던 괴물.
[널 고향으로 보내줄 테니, 내 님을 돌려주지 않으련?]
소백이 아닌 명한을 향해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