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8화 (228/235)

억지 한판

시작은 구대문파였다.

그것도 멀지 않은 무당파.

수십의 기둥을 보호의 취지로 지키던 이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두 가지 주장이 맞선 것이 이유였다.

"이대로 각 문파에 기둥을 맡겨둘 수는 없소. 어떤 목적이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남은 것들을 모아서 한곳에서 보호하겠소."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들은 우리 무당파의 가족이다! 그걸 어찌 타인을 믿고 맡긴단 말인가!"

"그리 생각한다면 우리를 막아 보시오."

"뭐?"

명한과 명한을 위시한 소명회는 막무가내였다.

막아서는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기둥을 탈취했다.

이는 흑점에서 준비해 둔 마차에 실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황망한 사태에 맞서던 무인들이 강하게 성토했지만, 명한은 물러나지 않았다.

유례없는 강압이었다.

"이게 정녕 그대의 목적이었소?"

"상황이 다급하니 실례하겠습니다."

"무림 어디를 봐도 이런 폭정은 없었소! 그대가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하게 무림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보시오!?"

"그 문제는 추후에 생각해볼까 합니다."

화산, 아미, 청성……

소명회는 각파를 돌면서 기둥을 수거했다.

보호하려는 자들과는 쉼 없이 마찰을 빚어야 했다.

보호와 파괴, 어느 쪽을 선택하든 소명회의 간섭을 달게 볼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명회의 움직임은 굉장히 파괴적이었다.

순식간에 구대문파의 절반을 제압하고 그 위명을 떨쳤다.

힘이 있으면 따르는 것이 중원의 현실.

중원 곳곳에 퍼져 있는 군소문파에서는 알아서 기둥의 처분을 맡기기에 이르렀다.

그 숫자가 물경 몇만이었다.

"신교는?"

"병력을 집결 중이야."

이에, 불씨를 제공한 건 신교였다.

대대적으로 표명한 기둥의 파괴.

이 불온한 진군에 남은 이들은 기둥에 대한 보호로 소명회를 택했다.

어찌 됐든 양자택일에서 고르자면 보호를 고르는 쪽이 많았다.

"칠 할 정도인가."

그렇게 중원에 퍼진 기둥의 회수율이 칠 할에 이를 무렵.

신교에서 소명회로 서신이 날아왔다.

아니, 그들만이 아닌 중원의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는 공개적인 서신이었다.

각 문파, 성, 도시, 작은 마을까지.

전부 이 내용을 공유했다.

[기둥에 대한 건으로 소명회와 담판을 짓고 싶다]

긴 내용을 함축하자면 이러했다.

중원 곳곳의 기둥 소재가 대부분 밝혀졌으니, 그 향방을 논하자는 의미.

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사람은 없었다.

현재의 신교와 소명회 양쪽 모두 논의로 상황을 이끄는 집단이 아니었다.

힘을 바탕으로 하는 강제.

즉, 이번 회담은 힘으로 결판이 날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에게 회신한 숫자는?"

"얼마 안 됩니다. 그나마 무당파와 백약문. 주검산장이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을 뿐. 나머지는……"

"강제로 탈취한 격이니 불만은 당연하겠지."

"뒤탈이 우려됩니다."

"후일도 우리가 멀쩡하게 살아있을 때나 걱정할 문제. 천기자가 염원을 이루면 불로불사의 괴물이 이 땅에 재림할 뿐이다. 천 년이 넘게 집착한 존재가 자유를 얻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

수단의 정당함을 따지는 건 사치일 뿐이다.

"답신을 보내. 응하겠다고."

일은 순식간에 정해졌다.

#

고민하고 고민했다.

천기자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기둥의 보호? 아니면 파괴?

단순하게 보자면 기둥을 살려 두어 술법을 마무리하려는 속셈이 맞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시간이 길다.

벌써 첫 기둥이 나타난 뒤로 스무날이 넘게 지났다.

작정하게 파괴하려 했다면 절반 넘게 하고도 남을 시간.

게다가 이를 방해하는 움직임조차 없다.

의도조차 오리무중.

"그러니 나도 함정을 파는 수밖에."

"준비는 끝냈습니다, 태사."

"응. 짧은 시간에 쉽지 않았을 텐데 수고했어. 뒤의 일도 부탁할게."

"걱정하지 마세요. 최선을 다해서 처리하겠습니다."

회담 하루 전.

명한은 은밀하게 이월과 만나서 무언가를 논의했다.

이건 주변 사람 누구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옛말을 따른 행동.

안다면 섭섭해할 사람이 여럿이지만, 이번만큼은 은밀함이 생명이었다.

둥둥둥.

"회주, 신교가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왔군."

이제 남은 건 한때 몸담았던, 고향과 같은 신교와의 회담이었다.

천마는 삼분지계를 용인하고 혼천에 대응한 숱한 행동에 동조해 온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같은 편은 아니다.

그의 행동은 전부 신교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기둥이 신교에 해가 된다고 판단했다면 파괴는 당연한 수순.

옛정으로 싸움을 피해갈 수는 없다.

"만약의 경우 싸워야 할 수도 있어. 알지?"

"알고 있어."

"전 도련님만 믿고 따라갈게요."

곁에 둔 향아와 은소소를 번갈아 바라보며 끄덕였다.

"가자."

회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

탁자 하나 덩그러니 놓인 가설 정자에 몇 사람이 모였다.

천마 쪽은 마창을 포함한 강유와 파운이 동행.

명한 쪽은 향아와 은소소, 막천우가 동행했다.

상황만큼 무거운 분위기가 주변을 잠식했다.

"기둥을 넘겨라."

첫마디는 안부도 뭣도 아닌 단순한 명령이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무작정 파괴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압니까?"

"나는 오랫동안 놈을 물밑에서 상대해 왔다. 혼천의 어리석은 자들과는 다르게 그가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진정한 흑막임을 일찍이 알아차렸지. 놈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안다."

"그렇게 자신할 수는 없을 텐데요?"

"아니. 나는 자신한다."

그리고 펼쳐 보인 손.

명한에게는 익숙한 기운이 구체로 머물고 있었다.

"……초대 천마입니까?"

"역대 천마에게 내려오는 나름의 비밀 서약과 같은 것이다. 일월교의 창시자가 진면목을 드러내려 할 때, 전력으로 막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소임이다."

"파괴하는 것으로 말인가요?"

"그의 육신은 한정된 공간에 잡혀있는 집착에 불과하다. 실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감당할 육신과 천기를 거스를 기운. 그리고 강인한 정신이 필요하지."

"그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겠죠?"

"황제와 이혼대법. 모를 것 같았나?"

"……"

이 정도면 서로가 가진 패를 모두 아는 셈이다.

"인과를 거스르며 흐름에 씻겨나간 옛 황제를 다시 불러오려면 그에 걸맞은 힘이 필요하다. 그의 피로 만들어진 기둥들이라면 가능하겠지. 파괴하는 것이 답이다."

"그 하나하나가 전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계시겠죠?"

"십만의 죽음으로 무림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이렇게 보니까 정말로 마도네요."

"한 번도 우리가 마도이기를 거부한 적은 없다. 필요하다면 더 많은 피를 흘려서라도 그자가 이 땅에 돌아오는 건 막아야 한다."

목표는 같지만, 방식이 다르다.

하지만 그렇기에 설득이 어렵다.

"그들이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네 행동을 예상했다면 타당하다. 혼란을 주고 자중지란을 만드는 거지. 넌 너무 생각이 많아. 반드시 의심하고 내 앞을 막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건 너무 배짱 싸움입니다."

"큰 싸움에 큰 도박은 당연한 수다. 지금의 모습을 보자면, 그의 수가 통한 것 같은데?"

"반대로 우리의 선택도 도박인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는 언제나 옳다."

"거, 배우고 싶은 뻔뻔함이네요."

서로 평행선일 뿐이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결국 남는 건 관철을 위한 싸움뿐.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은 선택지다.

"계속 도박이라 하니…… 정말로 한 번의 도박으로 결정짓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받아들일 것 같나?"

"확보한 기둥이 수만입니다. 숨기고자 하면 찾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얄팍하군. 하지만 지금은 그게 더 빠르겠어. 무슨 도박을 말하는 거냐?"

"이 무림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힘으로 하자는 거냐?"

"당대 천마와 겨루는 영광을 얻고 싶군요."

천마의 눈이 심유하게 가라앉아 명한을 살폈다.

진실과 거짓. 여유와 긴장 사이에 걸쳐 있는 복잡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서려 있는 한 가닥의 흥분은 감출 수 없는 진실.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답했다.

"혈육의 정은 바라지 마라."

"그런 건 기대하지 않습니다."

승자독식.

가장 빠르고 간단한 방식이었다.

#

모두가 긴장 섞인 눈으로 명한을 바라봤다.

지금껏 많은 걸 의지해온 그이지만, 이번 결정은 쉽지 않았다.

천하에서 누가 제일 강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10년 전 내려졌다.

천하제일 천마.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절대 강자의 이름이었다.

"자신은 있는 건가?"

정적의 부담을 안고 막천우가 대표로 물었다.

"솔직히 자신은 없습니다."

"기대하던 대답은 아닌 것 같은데."

"돌아가는 상황이 녹록지가 않으니까요. 여기서 신교의 발목을 잡지 못하면 그대로 중원을 쓸어버릴 겁니다. 우리가 각 문파를 제압했던 건 애들 장난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래서 악역을 자처했던 건가?"

"겸사겸사죠."

어느 한쪽을 딱 잘라서 선택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판단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누군가는 배신자라고 욕하겠지만,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명한은 선택했고 그렇기에 이곳에 있다.

"그렇다고 맥없이 질 생각은 없습니다. 이쪽에도 나름대로 비장의 수가 있으니까요."

"서복을 처리한 힘 말인가?"

"운명개혁…… 이라고 해야 하려나. 초월적인 능력이긴 하지만, 천마에게는 먹힐 가능성이 낮아요. 그는 서복하고 다루는 힘의 성질이 다르거든요."

"그가 천기에 순응한다고?"

"아뇨. 제가 느끼기로 천마의 무공은 천기에 군림합니다."

"군림이라고?"

"쐐기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지독한 건 비슷하죠."

말은 이래도 천마의 공능은 서복과는 궤를 달리한다.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천마의 무시무시한 패도.

그건 운명마저 발아래 복속시키는 절대적인 권위였다.

황제를 통해 인과의 흐름을 깨우치지 못했다면 아마 발버둥조차 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자네가 패배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글쎄요. 기둥을 내어주고 중원의 배신자로 낙인이 찍히겠죠. 그 뒤는 솔직히 저도 모르는 터라……"

"암담하군."

"하하. 여태껏 낙관적인 상황이 몇이나 있었겠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천하제일의 남자와 후회 없이 싸우고 오렵니다."

"자네도 참 가끔 보면 대책이 없단 말이지."

"사실 전 그렇게 계획적인 인간은 아니거든요. 어쩌다 보니 많은 걸 짊어지게 되면서 생각이 많아졌을 뿐. 가끔은 단순하게 살고 싶기도 합니다."

소백으로 몸으로 깨어났을 때 이런 운명을 바랐을까?

기연을 싹 쓸어 담아서 떵떵거리는 삶을 바란 것이 사실이다.

이제 와서 다 지나버린 결말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 가지 꿈은 남아 있다.

로망이라고 하면 좋으려나.

"천하제일. 천마를 꺾고 그 이름을 얻고 나면 세상이 좀 단순해지지 않을까요?"

"허……"

한번 즈음은 최강이 되기를 꿈꾼다.

지금은 모든 짐과 부담을 털어내고 순수하게 천마만을 상대할 셈이다.

오롯이 그만을.

그것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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