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사기
천마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림자 사이로 스며들어오던 자객의 몸으로 반으로 갈라졌다.
철퍽, 하고 무너지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반으로 자른 것으로 천마는 멈추지 않았다.
손을 뒤집어 강기를 손바닥 형태로 만들어 눌렀다.
반으로 갈린 몸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으깨졌다.
스슷. 슷.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사방에서 움직임이 시작됐다.
수십의 그림자가 일제히 천마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나하나 고수가 아닌 자가 없었다.
천마는 눈을 반개한 채 그 궤적으로 손으로 훑었다.
힘이 거인의 손처럼 날아드는 그림자를 쳐냈다.
퍽. 퍽. 퍽.
소리마다 하나의 생명이 사라졌다.
"부나방으로는 나를 움직일 수 없다."
움켜쥐는 손.
남은 그림자 전원이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허공에서 터졌다.
수십의 그림자가 전부 유명을 달리하는 데는 채 반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천마는 그대로 널브러진 시체와 흥건한 피를 무심하게 바라봤다.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다.
"교주님 들어가겠습니다."
오래지 않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가벼운 손짓으로 천마가 문을 열자 격전의 흔적이 역력한 육마완이 부복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팔반의 일원과 무력대의 대주들이 도열한 상태였다.
천마의 침소를 제외한 남은 곳도 전부 기습을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에 당황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피해는?"
"서른 명이 당했습니다."
"최고의 대우로 처리해라."
"네."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아이는 아직 밖인가?"
"네. 현장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두 분 소주께서 전력을 더해주신 덕에 그나마 피해가 줄었습니다."
"그럭저럭 사람 구실은 하게 됐군. 추스르고 난 뒤에는 돌아오라 전해라."
"그리하겠습니다."
강유와 파운. 그리고 휘하에 있는 신기자와 구문자.
네 사람이 입을 모아서 예측한 상황이었다.
혼천의 서복이 끝나고 난 뒤는 천기자다.
천마 역시 이를 예상하고 오래전부터 준비해 오고 있었다.
"역시 이건 기둥에 대한 관심을 돌리려는 수작일까요?"
"혼천이 그렇게 날뛸 때도 손 놓고 방관하던 인간이다. 셈 없이 그렇게 있을 리가 없지. 염을 이루기 위해 중원 전역을 흔들려고 할 거다."
"쉽지 않겠군요. 전쟁과 황가의 개입을 막은 것도 얼마 전의 일인데……"
"어차피 죽을 놈은 죽는다. 우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오래전에 죽은 망령의 부활을 막는 것. 모든 검에게 전해라. 역량을 다해서 기둥을 파괴해라."
"……네."
파괴된 기둥은 어떻게 되는가?
그건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천마신교의 천마는 그런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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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곳곳에 기둥이 생겨났다.
그 숫자는 명한의 예상보다도 많았다.
얼추 셈하기를 십만.
눈이 닿지 않는 구석구석을 고려하면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어마어마하게 많네. 이걸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만이 아닌 무림 전체가 나서 준다면 가능성은 있지. 하지만……"
"기둥이 된 사람들과의 관계인가?"
"그렇지."
오래전부터 준비된 작업이다.
한 명 한 명 모두 사연이 있고, 수많은 인과로 엮여 있다.
천기자를 막기 위해서 기둥을 처리해야 한다.
이런 단순한 주장이 먹혀들 가능성은 낮다.
"기둥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릴 가능성은 없어?"
"하나하나 정성을 다한다면 가능해. 하지만 그렇게 많은 숫자를 전부 감당하는 건 나라도 무리야. 천기자를 막기 위해서는 기둥을 파괴하는 것이 가장 빨라."
"하지만 기둥을 파괴한다는 건……"
"십만을 우리 손으로 죽인다는 이야기지."
하나를 막기 위해 십만을 희생한다.
전제부터가 이리 글러 먹은 상황이었다.
"상황은 다른 문파에 전해 두었어?"
"이미 흑점에게 지시해 뒀어. 나름대로 설명한다고는 했지만, 그걸 얼마나 받아들일지는 미지수겠지."
"어쩌면 우리가 하려는 모든 일을 방해할 가능성도 있겠네."
"어찌 됐든 우리는 남이니까."
구제도 파괴도 모두 쉽지가 않다.
사멸쌍살의 협박을 뒤로한다고 해도 방법은 제한적이었다.
이것이 천기자가 그린 그림이라면 확실히 효과적이다.
"도련님, 도련님!"
그때, 향아가 다급하게 외치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표정에서 느껴지는 다급함은 희소식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신교…… 신교에서 중원에 선전포고를 했어요!"
희소식은 무슨.
최악의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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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표현하자.
신교가 중원에 전쟁을 선포한 건 아니었다.
신교는 중원 곳곳에 나타난 기둥에 대한 처리를 마도의 방식으로 공표한 것이다.
전부 제거하지 않으면 신교가 직접 처리하겠다는 으름장.
아니, 이미 행동에 들어갔으니 사후 공고였다.
"회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신교에서 이리 막무가내로 나오다니!"
"이건 좌시할 수 없습니다! 아미파의 어르신 두 분이 금분세수 후에 자택에서 살해당했습니다! 복수하지 않으면 아미파의 이름이 땅에 떨어질 겁니다!"
"신교가 제멋대로 날뛰게 할 수는 없소이다!"
이 여파는 고스란히 명한에게 돌아왔다.
소명회를 이끌고 무림맹을 압박할 당시.
신교와 일정 부분 동맹 형태였다는 걸 부인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번 행동에 대한 책임을 명한에게 묻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일단 모두 진정하세요. 상황은 파악 중입니다."
"파악? 파악이라니요?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닙니다. 신교 놈들은 이미 중원 곳곳에 자신들의 그림자를 파견했습니다. 기둥을 파괴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건 지나친 행위입니다. 아무리 신교가 한때 힘을 합치던 곳이라 해도,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항의해야 합니다!"
"……"
지끈거리는 머리를 명한이 감싸 쥐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크게 소리치고 말 일.
하지만 여기 있는 모두는 큰 싸움을 함께 이겨낸 전우였다.
지인, 가족, 형제 등을 지키겠다고 소리 높이는 걸 찍어누를 수는 없었다.
‘사멸쌍살의 협박 따위는 필요 없었을지도 모르겠군.’
사면초가였다.
"모두 진정하시오."
그때, 막천우가 나서서 좌중을 진정시켰다.
"중원 곳곳에 생겨난 기둥이 어떤 의미인지는 회주를 통해서 전해 듣지 않았소. 이 문제를 단순한 혈육과 지인의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되오. 중원의 안녕이 달린 일이니 개개인의 감정은 잠시 넣어 두시오."
"그건 막 장문의 가까운 이가 기둥이 되지 않았기 때문 아니오?"
"……본 문의 후계 항렬 아홉이 기둥이 됐소."
"아, 아홉이나!?"
"죽은 아우의 우행을 따라 잘못된 것에 손을 댄 아이들이오. 무당이 남 일이라 이리 말한다고 하지 마시오."
그제야 주변이 조용해졌다.
핵심 항렬 아홉이면 무당에서도 치명적인 손실.
그걸 드러내며 주장하는 막천우를 무시할 사람은 없었다.
"막 장문. 심려가 크겠군요."
"……생명을 생명으로 보지 않는 괴물의 탓이외다. 회주께서 그 괴물을 상대할 방법이 있기를 바라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겨우 넘겨받은 주도권.
명한이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소명회의 모두를 바라봤다.
고뇌는 깊고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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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같은 해결책이 등장했으면 좋겠지만, 그런 건 없었다.
부수려는 사람이 있으면 막는 사람이 있고, 의견이 엇갈리면 언제나 싸움이 발생했다.
분위기는 삭막함을 넘어서 흉흉하게 변모해갔다.
"이대로는 안 돼. 이렇게 가다가는 어느 쪽이든 크게 무너지고 말 거야."
아직은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는 수준.
신교도 전면전이라기보다는 암습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부서진 기둥과 그것에 분노한 사람의 숫자가 넘칠 만큼 아슬아슬한 수준이었다.
그 선을 넘어간다면 크게 무너지리란 두려움이 있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잖아."
"……천기자는 왜 이런 방법을 썼을까?"
"응?"
"먼저 생각해 봐야 할 문제야. 왜 이런 방식으로 황제를 부활시키려는 걸까? 생각해 봤어?"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에 은소소가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부활을 위해 이런 일을 벌이는 것에 다른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를 삼켜 기둥이 된 이들을 살펴봤어. 확실히 생전 황제의 기운이 깃들어 있더라. 십만이라는 숫자라면 조건을 맞추기에는 충분해 보여. 하지만……"
"하지만?"
"왜 기둥일까? 고를 통한 기운의 방출은 되레 살아 움직일 때가 더 강렬해. 지금처럼 기둥 형태로 묶어두는 건 손해일 뿐이지."
만약, 기둥을 고정해야 했다면 이해할 수 있다.
전원을 납치하기보다는 고정하는 편이 편하니까.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단순하게 중원 전역에 황제의 기운을 심어두는 것이 목적.
기둥은 뭔가 이상했다.
"게다가 사멸쌍살 말이야. 너무 대놓고 행동한 것 같지 않아?"
"널 협박한 거?"
"응. 나라는 인간이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는 천기자도 잘 알 거란 말이야. 그런데, 주변 사람들을 목표로 협박을 한다?"
"일부러 널 자극했다?"
"어쩌면."
그렇다면 목적이 필요하다.
굳이 명한을 자극해서 얻으려는 목적.
"심리적 모순 아니겠나?"
"아. 막 문주님."
그때, 문을 열고 막천우가 들어왔다.
무당의 소요를 막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터라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차라도 마시면서 일해요.’ 슬쩍 내미는 은소소의 찻잔에 희미하게 웃었다.
"심리적 모순이라는 어떤 의미인가요?"
"뭐, 대단한 건 아니네. 자네가 기둥의 사람을 구하려 하는 순간. 그때까지는 아직 선택지가 남아 있었네. 구하든가 파괴하든가. 하지만 사멸쌍살이 나타나서 주변인을 인질로 협박하면서 자네는 구하는 것에 종속이 돼 버렸지."
"구하는 것에 종속……"
"목숨을 걸어서까지 주변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했으니, 기둥을 파괴하는 선택지는 이미 사라지고 만 거지. 여기서 자네가 기둥을 파괴하자고 했으면, 누군 살리고 누군 파괴하는 모순에 휩싸이게 되니까."
"……"
명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사고를 되짚었다.
확실히 사멸쌍살 전까지는 목적이 불분명했다.
기둥 자체의 정체도 확실하지 않았으니, 구하고 말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개입으로 사고가 고정된 것이 사실.
"그럼, 역시 기둥을 파괴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만약 그렇다면 자네는 그 분노와 원망을 감당할 수 있겠나?"
"……"
"이 또한 모순이네. 구하고자 하는데 원망받아야 하는 모순. 어쩌면 천기자가 원하는 건 이런 상황에 자네를 놓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선택의 기로에 말인가요?"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자가 원하는 건 황제의 숙주가 될 몸. 즉, 그 안에 자네의 정신은 포함되어 있지 않네."
손으로 명한의 머리를 가리키는 막천우.
필요한 건 그릇이지 그 내용물이 아니었다.
명한이 마른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모든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이건 인과로 엮인 운명으로는 알 수 없는, 순수한 선택의 문제였다.
한참을 고민 끝에 명한이 고개를 들었다.
"사람을…… 모든 사람을 모아주세요. 크게 한번 사기를 쳐봐야 할 거 같습니다."
하늘을 속일 사기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