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6화 (226/235)

배짱 싸움

정적과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무림맹은 허선의 죽음 이후로 내부를 정리한다는 이유로 회군.

신교 또한 흑기와 대치한 이후로는 천산으로 돌아갔다.

큰 싸움은 멎고 세상은 평화로워졌다.

이게 보통 사람의 시선이었다.

"……심장이 모두 사라졌어."

하지만 내막을 아는 사람은 이게 잠시의 여유라는 걸 이해했다.

서복의 패퇴 이후, 뒤늦게 드러난 거처에서 잔당은 찾지 못했다.

강유옥에 의해서 파괴된 은신처도 산개된 거점에서도 사람은 없었다.

시설은 모두 파괴되어 있고, 자료 역시 대부분이 소실된 상태였다.

너무 매끄러운 대응이었다.

"애초에 성공을 기대하지 않았던 걸까? 이유가 대체 뭐야?"

"서복이 바라던 건 방대한 양의 피로 이루어진 육신의 부활. 즉, 불로불사의 육체에 자신을 이혼하여 영생을 누르겠다는 거였지. 그래서 심장의 모든 조각이 필요하지 않았던 거야. 일부만 있어도 충분했거든."

"하지만 천기자는 다르다?"

"응. 그는 애초에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던 거야. 육체가 부활하든 뭘 하든. 바라는 게 달랐으니까."

명한은 그 사실을 서복과의 싸움에서 깨달았다.

애초에 이 판은 한 가지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명한이 서복과 대등한 힘을 손에 넣는 것.

당연하게도 이것은 천기의 흐름에 녹아든 황제의 개입을 바탕으로 한다.

"천기자는 일찍이 황제가 인과의 흐름에 녹아버린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모든 상황을 방치했던 거야. 어떤 식으로든 황제가 개입하게끔 만들어야 했던 거지."

"널 통해서?"

"명왕도에서 봤듯이 천기자는 이미 황제와 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상과 같은 존재. 그렇기에 황제를 흐름에서 꺼내올 수 있는 건 나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한 거지."

"무서운 집착이네."

"무섭지. 천 년이 넘도록 오직 그것 하나만을 바라고 있었던 거니까."

그 맹목적인 집착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서복이 죽은 뒤, 세상이 잠잠해진 건 모든 조건을 갖췄다는 신호.

폭풍 전의 고요함과 같은 거였다.

"그럼, 천기자는 앞으로 어떻게 할까?"

"나와 황제는 거울의 양면과 같아. 나만이 그를 이 세상에 비출 수 있지. 그러니 그는 나를 이용해서 황제를 이 땅에 부활시키려고 할 거야."

"널 이용해서?"

"방법도 가늠이 돼. 그가 손에 넣은 심장. 황제와 연결된 나라는 숙주. 그리고……"

"그리고?"

명한의 입술이 달싹이다 멈췄다.

이 너머의 답은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아니, 확실하다면 곤란했다.

"어찌 됐든 나도 나름의 각오는 해야겠지."

이제 이야기는 종막이었다.

#

시작은 소문이었다.

적막과 같은 두 달의 시간이 흐른 뒤.

무림은 이제 잠잠해졌다 싶을 때 조용히 흘러나온 소문이 있었다.

그건 건넛집 황 씨네 둘째 아들의 이야기 같은 뜬소문에 가까웠다.

언덕길을 두 사람이 올랐는데, 돌아보니 친구가 없더라.

괴담 같은 이야기에 처음에는 신경 쓰는 사람도 얼마 없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되고 일주일이 흘렀을 때.

그런 소문으로 사라진 이들이 수십, 수백을 넘어섰다.

그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이건 신호였다.

"여기인가?"

"네, 태사님."

소명회 인근 작은 마을.

팽성촌이라 이름 붙여진, 수십 가호가 전부인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도 몇 사람이 소리 없이 사라지는 일을 겪었다.

명한은 흑점을 통해 이를 접하고 직접 걸음을 옮겼다.

예감은 눈으로 확인했을 때 더욱 진해지는 법이었다.

"어때?"

슬쩍 물어오는 은소소를 향해 명한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되레, 반대였다.

"바닥에 있는 이 흔적 보여?"

"……혈흔? 아니, 그런 것치고는 너무 말라 보이는데? 식물의 뿌리 색인가?"

"언뜻 보기에는 그렇지. 하지만 이건……"

명한이 은근에서 발견한 나무 한 그루를 손으로 두드렸다.

뿌리부터 잎까지 전부 관통하는 진동이었다.

잎사귀가 부스스 떨어지고 뭔가 끔찍한 비명이 그 사이로 울려 퍼졌다.

바람이 가지 사이를 스치고 지나간 착각……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끔찍한 소리였다.

은소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뭐야, 이거?"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거둔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씨앗? 열매?"

"황제의 피. 그리고 그걸 통한 연구. 중원의 몇이나 영향을 받았을 것 같아?"

명한이 나무의 겉을 한 줌 떼어 속을 드러냈다.

일반적인 나무와는 다르게 덩어리진 신체 일부가 그 안에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역겨운 모습에 은소소는 고개를 돌려야 했다.

숱한 걸 봐 온 그녀이지만, 이건 아니었다.

"설마 그게 사라진 사람이라는 거야?"

"황제의 피를 통한 연구를 여럿 봐왔잖아. 식물, 동물, 영물, 심지어 같은 인간. 불사의 존재가 남긴 거죽은 그 기이함 때문에 언제나 모든 법칙 위에 존재했어. 형질을 잡아먹고 자신의 불사성을 이렇게 상처처럼 남기는 거야."

"황제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래. 이건 모두 천기자의 속셈이야. 수없이 많은 제물."

이건 고작 시작일 뿐이다.

혼천의 활동으로 얼마나 많은 무인들이 고를 삼켰는가.

그 숫자를 셈하자면 중원의 명맥이 위험할 지경이다.

수백, 수천. 아니, 수만 수십만이 이처럼 변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건 천기자가 그리는 어떤 결과의 과정일 터.

"……어쩌면 그런 건가."

"어쩌면? 짚이는 거라도 있어?"

"우리가 심, 기, 체의 삼위일체를 부르짖는 이유가 있잖아. 셋은 하나이고 하나가 셋이야. 즉, 셋 중 둘을 챙기면 남은 하나를 끌어당길 수 있다는 거지."

"셋 중 둘? 황제의 육체와 기운 말이야?"

"그래. 어마어마한 숫자의 제물로 그 기운을 빚고 나를 통해서 심장으로 육신을 빚는 거야. 그렇게 되면 황제의 정신은 자연스럽게 끌려올 수밖에 없어."

"제정신이 아니군."

"그래. 그래서 무서운 거야."

이미 인과의 흐름에 녹아든 황제다.

그를 억지로 부활시키려고 천 년에 걸친 계획을 구상했다.

그 수단과 방법을 떠나서 집요함이 소름 끼칠 정도다.

"그럼,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 구할 방법은 없나?"

"글쎄. 육체가 완전히 잠식당한 상태인데……"

확신 없이 명한이 나무를 쓸어내렸다.

그려낼 수 있는 모든 해답 가운데, 가능한 방법을 찾고자 했다.

무한의 수 중 모래알 하나를 찾는 수준이지만, 시도조차 안 할 수는 없었다.

정적 속에서 지루한 탐색이 이어졌다.

"응? 이건……"

그러기를 얼마.

어쩌면 이라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위험해!"

무언가 강한 기운이 명한과 은소소가 있는 곳을 할퀴고 지나갔다.

은소소의 검막이 단번에 찢길 정도의 위력이었다.

"이거 참. 나서고 싶지 않았는데."

"……사멸쌍살?"

"하하. 그 이름은 잊었다. 지금은 그저…… 졸(卒)이라 불러주시길."

전대 고수의 예상치 못한 등장이었다.

#

사멸쌍살.

전대의 흉악한 살수로 그 손에 씻겨나간 목숨만 세 자리에 달하는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그 악행이 지독하여 무림공적에 이름을 올리고 3년간의 추적 끝에 비명횡사.

이것이 그의 알려진 최후였다.

"이 늙은 마귀가 아직 안 죽고 살아 있었던 건가?"

"후후. 신교의 어린 계집이 잘도 내 얼굴을 알고 있구나."

"네놈 낯짝이 그려진 책만 여럿이다. 어릴 때는 네놈을 잡아 죽이는 것을 상상하며 무공을 수련했었다. 왜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거지?"

"하하. 이 몸이 중원 놈들의 추살 따위에 당할 것 같은가? 가뿐하게 따돌리고 몸을 숨겨왔지."

"거짓말을 하는군."

마지막 말은 명한의 것이었다.

"거짓말이다?"

"너는 확실히 한 번 죽었어. 명은 끊기고 세상에서 그 흔적이 지워졌지. 추살을 따돌렸다는 건 거짓말이다."

"호오. 그런 것도 보이는 건가?"

"네 얄팍한 생명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보인다."

"역시. 역시. 어르신의 말씀대로 네놈은 무르익었구나."

날카로운 말에도 사멸쌍살은 되레 웃기만 했다.

주고받은 몇 마디가 전부 확인을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다.

예상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았다.

"헛소리는 집어치워. 넌 천기자가 보낸 건가?"

"뭐, 여기서 아니라고 한들 믿을 리는 없겠지. 맞아. 나는 천기자 어르신께서 보낸 사람이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마. 콕 집어서 너를 감시하던 건 아니니까."

"그렇겠지. 날 주시하는 눈이 있었다면 모를 리가 없으니까."

"역시 지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답군. 말 한마디에 실린 힘이 만만치 않아."

"그걸 안다면 제대로 답해라. 뭘 원하는 거지?"

첫 공격. 분명 위력적이지만 명한에게는 닿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다른 의도가 있다는 의미.

"간단한 제안이야. 모든 씨앗이 싹을 틔울 때까지 가만히 있어 달라는 거야."

"그걸 농이라고 건네는 건가?"

"아니, 진심이야. 어르신께서 공들여서 준비한 계획이야. 네 역량은 확실히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방해하면 곤란해. 잠시만 이대로 기다려 줬으면 하는데."

"헛소리는 충분히 들었다."

명한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손아귀 안쪽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긴 봉의 형태로 늘어졌다.

사멸쌍살은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흠칫 물러났다.

보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릴 정도의 기운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건 넣어 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그래야 할 이유를 하나라도 대 봐라."

"뭐…… 네가 물러나지 않으면 이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을 거라는 거? 다 합치면 쉰은 되려나? 그것도 부족하면 다음 마을. 또 다음 마을. 주변 성의 사람을 다 죽이고 풀잎 하나 나지 않는 황무지로 만들겠어."

"……"

"하하. 알고 있잖아. 할 수 있다는 거."

명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앞의 사멸쌍살의 모습에서는 한 점의 거짓도 읽을 수 없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건가?’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어르신께서 바라는 건 하나뿐이야. 싹이 트고 마지막 날이 되기까지 얌전히 있는 거. 이 넓은 중원 땅에 죽일 사람이 넘친다는 건 알고 있잖아. 가만히 있으면 엄한 사람은 다치지 않아."

"그럼 제물이 될 사람들은 죽어도 된다는 건가?"

"탐한 자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선택에 따른 결과야. 한 명 한 명 모두를 네가 구해줄 필요는 없어. 너는 네 일만 생각하라고. 어르신께서 걱정이 많아."

"집어치워. 어차피 심장을 사용해서 날 숙주로 삼을 것 아닌가?"

"글쎄. 진실로 유일한 존재가 되어 이 땅에 신으로 군림한다. 네 본질을 조금 포기한다고 그게 나쁠 것 같지는 않은데."

능글능글한 웃음 속에 거짓 따위는 없다.

모든 것은 진실이고 진심이었다.

"짜증 나는군."

"뭐?"

명한이 쥐고 있던 봉을 횡으로 그었다.

사멸쌍살의 머리 위의 공간이 통째로 잘려나갔다.

조금만 아래였어도 날아가는 건 머리였을 것이다.

"짜증 난다고. 왜 하나같이 제멋대로 써먹기만 하는 거지? 너희 중 하나라도 황제가 뭘 원하는지 물어본 적 있나?"

"너……"

"일방적이야. 황제가 바라는 건 힘도 권력도 아니야. 불로불사의 괴물도 아니고. 신이 되어 군림한다? 그걸 황제가 원할 것 같냐?"

봉을 땅에 깊이 박으며 선언했다.

"전해. 협박이라고 엄한 사람을 건드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전부 끝이야. 그렇게 바라 마지않는 숙주가 사라지는 거라고."

"뭐? 허세는……"

"허세라고? 그럴까?"

스산한 기세에 사멸쌍살이 마른침을 삼켰다.

명한이 그를 엿보는 것처럼, 그도 명한을 엿볼 수 있었다.

이 지독한 각오에는 한 줌의 거짓도 없었다.

"두 번의 경고는 없어. 난 이들을 구할 테니까 막고 싶다면 힘으로 해 봐."

협상이 어렵다?

그럼 협상 테이블을 걷어차라.

위험한 도박수를 던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