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길
천마가 고개를 돌려서 금장가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몇몇 초월자만 감지할 수 있는 힘의 유동이 느껴졌다.
이어 꾸준하게 감지하고 있던 기척 하나의 소실도 확인했다.
그림으로 그려질 것 같은 뻔한 상황이었다.
"병력을 물려라."
그렇다면 목적은 다 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수를 돌렸다.
신교에서 천마의 말은 절대적인 것.
휘하 일원 누구도 반문하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대치하던 흑기만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너희도 이만 물러나라."
그 뒤는 파운, 강유과 맞서고 있던 혼천의 잔당이었다.
돌변한 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너희 주인은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이곳에서 죽고 싶다면 말라지 않으마."
"퇴로는 열어주는 것이오?"
"너희같이 하찮은 것들과 손속이라도 겨룰 것 같았나?"
"큭. 후에 다시 오겠소."
천마의 손짓에 파운과 강유가 물러나고 잔당 역시 도망쳤다.
이들 역시 서복이 도망쳤음을 감지하고 있던 터라, 망설임이 없었다.
끝내지 못한 싸움에 파운과 강유가 불만 섞인 얼굴로 다가왔다.
"내버려 뒀으면 우리가 끝낼 수 있었어."
"저들을 저렇게 보내도 되는 건가?"
"상관없다. 저런 잔챙이 따위."
천마의 평은 가차 없었다.
"머리가 잘린 뱀은 두렵지 않다. 이 땅의 싸움도 곧 수십이 될 터. 우리는 진짜 싸움을 대비해야 한다."
"진짜라면 역시…… 천기자 그 늙은이?"
"신기자와 구문자의 예측대로라면 이 땅의 싸움이 수습되는 것으로 계획은 물 건너간 것 아닌가?"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추측한 싸움의 향방.
최악의 결과는 전면전으로 평원 전체가 피와 시체로 덮이는 일.
하지만 그건 이미 피했다.
"바람은 멎었으나 불씨는 남아 있다. 그가 이 모든 가능성을 배제했을 확률은 없다. 진짜 싸움은 그 너머에 있을 터. 천하의 향방은 그곳에서 갈라진다."
"그럼 저 흑기의 문제는?"
"그 아이에게 맡기는 것으로 충분하다."
"꽤 인정하는 말투네."
약간의 질투가 섞인 말에 천마가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얼굴에 파운과 강유가 놀랐다.
"나란히 서고 싶다면 공을 세워라. 외(外)자의 세상이 끝나고 난 뒤, 이 땅은 우리의 무대가 될 터. 그때 군림하는 것은 신교가 될 것이다."
"흥. 그런 설명 따위는 필요 없어."
"다음 대는 내 것이야.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아."
끊임없이 부딪치며 굴러가는 것이 마도.
하나의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전쟁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속세의 이야기.
"회군한다."
지금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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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기가 받은 명령은 분명했다.
금장가. 정확하게는 도력제와 관련된 모든 증거를 지우라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 금군을 동원하고 흑기를 투입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무림인의 저항은 격렬했고, 능력은 상정 이상이었다.
이들 모두를 제거하려면 황군이 투입되어야 했다.
"흑기의 지휘관은 누구지?"
게다가 이 남자.
전대 황제 도력제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
광증에 휘말려서 폐위된 인물이라는 평과 비교하자면 너무 멀쩡했다.
"새로 지휘를 맡은 염백이라 합니다."
궁에서 파견된 염백이 앞으로 나섰다.
"그래. 염 장군이라고 부르면 될까? 그대에게 전할 말이 있다."
"편히 말씀하시길."
일단은 들어둘 요량이었다.
운이 좋다면 도력제와 나머지를 분리.
각개격파를 노릴 수도 있으니까.
"나를 황제에게 안내해라."
"……네?"
"이 일은 그대의 권한을 아득하게 넘었다. 내가 황제와 독대하여 상황을 매듭지으려 하니, 이를 황궁에 알리고 나를 안내해라."
"그걸 제가 수락할 것 같습니까?"
"그럼 내 말은 어떤가?"
"태, 태후 마마!"
도력제의 말을 거드는 태후.
상황이 이래도 폐위된 도력제와는 다르게 태후는 무게감이 있었다.
염백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일그러졌다.
"전하게. 황상의 판단이 어떤 건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나, 작금의 상황은 다르네. 이런 소모적인 다툼은 황가의 손해일 뿐이라네."
"하지만……"
"명령을 받은 군인은 반드시 이를 수행해야 한다. 입장은 이해하지만, 이 상황이 그런 말로 해결될 것으로 보이나? 편한 말로 자네와 금군이 나를 죽일 수 있다고 보나?"
"으음."
염백이 쉽사리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상황의 기이함은 그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황명이라는 건 그만큼 무거웠다.
까딱 잘못하면 구족이 날아가는 것이 황명.
고민은 당연했다.
"그리 고민된다면 이렇게 전하세요."
그때, 명한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런 이야기로 지지부진 시간을 끌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한 손으로 인과의 띠를 움켜쥐고 흑기 전체를 찍어 눌렀다.
압도적인 무게감에 전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불가항력이었다고."
"커헛!!"
그리고 이내, 압력을 풀었다.
염백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눈으로 명한을 바라봤다.
숱한 고수를 만나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안 움직입니까?"
"가, 갑니다! 황궁에 이야기를 전하겠소!"
황명도 무섭지만, 눈앞의 칼이 더 두려운 건 사실.
흑기가 한 사람 앞에서 꼬리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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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회담의 장소도 출입한 인물의 숫자 모두가 비밀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소리 없이 흑기는 해체되었다.
죽거나 다친 이 없는 조용한 해산이었다.
"자네 덕에 황가의 오랜 염원이 풀렸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
"황가가 안정되어야 민생도 바로잡히는 법이죠. 상황을 잘 마무리한 것만 해도 소임은 다 하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후후. 자네 같은 자가 황가에 속해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지. 아직 시집가지 않은 계집아이들이 있던데. 생각은 없나?"
"그건 정중하게 사양하도록 하죠."
흑기와 마찬가지로 이쪽도 이별이 수순이었다.
도력제는 황가와 일정 부분을 거래하며 상황을 마무리 지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황가로 복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늘 아래 태양이 둘일 수는 없는 법.
이대로 속세를 등지는 것이 최선이었다.
"장군. 그리고 호릉과 호랑도 모두 가는 겁니까?"
"음. 이 몸이 없다면 황상을 누가 모시겠나. 태어나 한 몸 충정하기로 했다면 끝까지 하는 것이 도리겠지. 다만, 이 두 아이는……"
"호릉은 황상하고 갈 건데!"
"호랑도 같이 갈 거예요!"
반사적으로 답하는 호릉과 호랑에 군율휘가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많은 것이 내포된 얼굴이기에 명한도 가볍게 웃음으로 대꾸했다.
"장소를 아니 상황이 바뀌면 제가 책임지도록 하죠."
"허허. 자네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빚만 지는군."
"상황이 그리했을 뿐입니다."
"모두가 그런 마음이면 얼마나 좋겠나. 아, 그리고 천서. 그러니까 황제진경은 필사 없이 남겨 두었네. 더는 황가에 필요 없는 물건이라는 판단이지."
"현명한 판단입니다. 황가는 황가 나름의 역사를 꾸리면 되는 겁니다. 더 이상 옛것에 의지할 이유가 없죠."
"말처럼 쉬웠으면 하나…… 정 안 된다 싶으면 자네를 한 번 더 믿어보겠네."
슬쩍 건넨 부탁에 명한은 다시 웃음으로 대꾸했다.
아직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이지만, 나쁠 건 없었다.
"후우.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오래 머물 상황은 아닌지라 이 즈음해서 작별을 고하겠네. 자네, 스승에 대한 염은 멀리서나마 우리도 전하도록 하지."
"그런 허례에 구속받을 분은 아닙니다. 하늘에서 저희 가는 길을 지켜보고 계시겠죠."
"하하. 그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지."
작별은 길면 늘어질 뿐이다.
군율휘가 말을 맺고 한 걸음 물러나 깊이 포권했다.
많은 뜻, 많은 감정이 실린 포권이었다.
명한도 마주 포권하며 긴 인연의 작별을 맞이했다.
오는 사람이 있으면 가는 사람이 있는 법.
이 또한 인과의 한 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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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정리되고 명한은 귀문으로 돌아왔다.
소명회를 따르던 이들과 무림맹 문제는 일단 뒤로 남겨 두었다.
세상의 흐름만큼 중요한 것이 그에게는 또 있었다.
"오셨군요."
귀문을 지키던 은영영의 안내를 받아 사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서 만들어둔 장소였다.
언젠가는 사용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때가 이리도 빨리 올 거라고는 명한도 예상하지 못했다.
"……많은 것을 이룬다 해도 한 가지를 잃으면 이렇게 크게 다가오는구나."
커다랗게 자리한 사당의 조각과 위패.
스승 은휘의 흔적이었다.
명한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처음 귀문을 찾았을 때만 해도 이런 건 상상도 못 했습니다. 무공을 원했던 거지 사제의 연을 꿈꾼 건 아니었거든요. 사실 오래전에 속세를 떠난 분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여겼습니다."
옥잔을 술로 채웠다.
육신이 있었다면 한잔하고 싶었다는 그 술이었다.
주향으로 코끝을 적시고 향으로 애도의 마음을 올렸다.
청청, 은소소, 향아 등.
많은 이들이 명한의 뒤로 나란히 앉았다.
연이 깊건 얕건 어른이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인연이라는 것이 그리 정한대로 굴러가지는 않더군요. 무공을 배우고 삶을 배우고 마음가짐을 배웠습니다. 먼저 걸어간 사부의 삶이 있었기에 저 역시 어긋나지 않고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런 면에서는 제가 혼천의 서복이나 루의 천기자보다는 운이 좋다고 할 수 있겠네요."
차례대로 술을 채우고 향을 피웠다.
은소소, 향아 등도 슬퍼했지만 특히 청청이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어했다.
외톨이처럼 문파를 떠난 뒤로, 가장 가까이서 그녀를 돌봐준 사람이 은휘였다.
천성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곁의 금홍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사부이기 앞서서 부모처럼 그녀를 돌봤었다.
숨죽임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우린 앞으로도 사부님의 마음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갈 겁니다. 모든 걸 가졌으되 훌훌 털고 떠나버린 당신의 그 의지를 받잡겠습니다. 보듬는 마음을 알고 집착하지 않는 절제를 배우겠습니다. 사부님께서 세운 귀문의 시작처럼. 그렇게 이어가겠습니다."
"……이제 보는 것도 전보다 잘하고 영물과 소통도 훨씬 잘해요. 전처럼 영기에 휘둘리지도 않고 바른 몸에 바른 기운을 잡을 수도 있어요. 금홍도 정말 훌륭한 신수로 키울 거에요. 사부님 보기 부끄럽지 않게 할거에요. 그걸…… 그걸 조금 더 곁에서 가르쳐 주셨으면 좋았겠지만…… 괜찮아요. 전 할 수 있어요. 할 거예요."
"귀문의 문주이자 사형으로서 저도 곁에서 돕겠습니다. 그러니 사부님……"
"우릴 지켜봐 주세요."
울음 섞인 말을 맺으며 위패에 절을 올렸다.
한때 중원에서 태어나 적수 없이 세상을 주유한 천재.
혼을 보고 혼을 다루며 지고의 경지에 달했으면서도 미련 없이 훌훌 털고 떠나버린 기인.
새겨진 마음을 저버리지 않고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간 선구자.
그 마지막은 이렇게 깊은 울림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세상에 남길 건 없다 한탄하던 한 사람의 끝이……
이렇게나 많은 것을 남기는 것으로.
"후회 없는 삶이었다."
아마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별은 그렇게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