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4화 (224/235)

사필귀정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졌다.

그건 활자로 새겨진 하나의 목판이었다.

삶의 시작부터 삶의 마지막까지.

일생으로 채워진 누군가의 이야기.

"……황제."

그래, 그의 삶이었다.

스스로 일군 황제의 삶과 끝없는 탐구를 위한 불사에 대한 도전.

세상의 경계에서 바라본 인과의 고리.

천기라는 물길 속에서 끝없이 부유하며 마주친 사람.

그것은 무한에 가까운 확률 속의 필연.

"그런 건가."

명한은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왜 그였는지. 왜 그만이 남아 있었는지.

수많은 가능성 중에 왜 자신의 습작이 이 세계를 반영했는지.

무한에 가까운 선 중 작고 약한 선을 뽑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건 수면에 반사된 상(狀).

황제는 자신이었고, 자신은 황제였다.

"다른 세계 다른 삶. 다른 얼굴과 다른 인연을 맺어도 거울 속의 자신처럼 바라봤다는 건가. 내가 끄적인 습작도 그 안의 삶도 결국은 투영이었다는……"

긴 읊조림 속으로 많은 것이 쏟아졌다.

한 가닥 풀리지 않던 의심과 숨기던 불안함이 존재했다.

왜 자신일까 하는 의문.

그리고 언젠가 이 삶이 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

하지만 이젠 안다.

이곳에 온 건 ‘황제’가 시작한 삶에 ‘마침표’를 찍기 위함이라는 것.

거울에 비친 같은 존재로서 그건 의무이자 권리였다.

"불안함에 미치기라도 한 건가? 계속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어떤 기준으로는 미쳤다고 해도 무방하겠어. 정상은 아니니까."

"……너. 뭔가 달라졌군."

"그래도 외경에 닿은 자답게 보는 눈은 있네."

명한이 주변의 영역을 해제했다.

밖에 닿을 수 있는 외경의 제한이 풀린 것이다.

서복의 몸에서 아득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밖’의 힘을 끌어왔다.

그건 강제적이고 지독한 폭력.

명한은 조용히 눈을 감고 그 너머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힘이 격렬하게 저항하여 쐐기가 부서졌다. 이에 당황한 서복은 자신의 양손을 바라본다."

그것은 상상이자 현실.

"무, 무슨!?"

소리 없는 파동이 ‘밖’의 경계를 흔들어 서복의 연결을 끊었다.

당황으로 물든 그가 자신의 양손을 응시하는 건 정해진 수순.

아니, 이 세계의 인과 자체인 한 사람의 묘사였다.

‘그래. 어떤 면으로는 불사를 이룬 거네.’

희미하게 흘러가는 바람 속에서 그를 느낀다.

육신을 벗고 탈각에 이르러 천기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황제.

자신의 염원을 전달하기 위해서 거울 밖의 자신에게 집착하여 마지막까지 견뎠던 것이다.

습작에 적용한 시스템도 결국은 그의 힘.

세상 만물에 녹아내린……

어떤 의미로는 신이었다.

"본래라면 우린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그냥 그렇게 살아갔겠지. 하지만 한 번의 실수가 그 거울의 양면을 닿게 했어. 서로 다른 세계의 인과가 엮이고 이야기에는 마침표가 찍히지 않았지. 내 역할은 그거야. 시작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것."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밖에는 닿지 못할 거다. 긴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어. 상처를 회복하고 본래의 흐름을 되찾아야 해. 너와 같은 폭력은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헛소리! 나는 이미 인간을 초월했다! 외경의 힘은 내 권리다!"

서복은 다시금 힘을 사역하여 경계를 침범했다.

그 자체로 집요하고 파괴적인 힘이나, 본래의 천기라면 이를 허용했을 리 없다.

과거의 황제가 자신의 심복과 함께 저지른 한 번의 실수로 그 경계가 약해졌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를 침범하게 된 것.

자격 없는 자들의 범람이었다.

"닫혀라."

명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세상에 적막이 흐르고 힘이 닫혔다.

서복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웃기지 마!! 불가능한 일이다!"

"이야기란 그래. 시작이 엉망이면 전개도 엉망이고 끝도 엉망이지. 첫 단추가 그랬던 거야. 너 같은 망종 따위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을 넘보게 된 것 자체가."

"웃기지 마라!! 벌레 따위가 감히 어디에서 신이 될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극도로 분노한 서복의 손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강렬한 뇌정지기로 이루어진 절기.

그 자체로 극의에 가까우나 이는 그저 겉핥기에 불과했다.

한 번 외경에 달해 모든 것을 멀리서 보던 그가 아래의 무공을 깊이 파고들 이유가 없었다.

위력만 가득한 흉내 내기.

명한은 왼 주먹에 기운을 담아서 벼락을 후려쳤다.

쿠쿠쿠쿵.

땅이 무너지고 뇌기가 요동쳤다.

"금홍이 날개를 펼치니 금색의 뇌우가 서복을 향해 쏟아졌다."

뇌기는 뇌기를 다루는 존재에게.

군율휘 등과 함께 섞여 있던 청청의 품에서 금홍이 날아올랐다.

금색의 빛이 전신을 휘감더니 땅의 뇌기를 하늘로 연결해서 어마어마한 뇌우를 서복에게 쏟아냈다.

천지가 뒤집히고 땅이 개벽할 위력이었다.

"크, 크아아아! 이건 불가능해! 어찌 미물 따위가!"

"내가 써 내려가는 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술 따위가 아니야. 모든 인과의 가닥 중에서 가장 유리한 확률을 뽑아내는 거지. 억지로 천기를 끊어 내려 발버둥 치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건데."

"인간을 옭아맨 족쇄 따위에게 굴복하라는 거냐! 그럴 수 없다!"

"용기와 오만함은 언제나 구별해야 하는 법. 네 자유는 그저 방종이었을 뿐이다."

바람이 명한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이건 하늘이 뱉은 숨이 그를 중심으로 땅으로 퍼져나가는 흐름이었다.

천지인의 현현이며 완벽한 삼위일체였다.

모든 인과가 명한을 중심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거짓말. 내가 탐하던 힘을 어떻게 네놈이 취한 거냐? 불가능하다. 불가능해! 천기에 굴복한 벌레 따위가 그것을 얻어서는 안 돼!"

"밖에 이르니 세상이 작아 보였나? 천기라는 품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주제를 알아야지. 아이가 커서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도 여전히 어머니는 어머니다. 언제나 보듬기만 하던 그 자애를 대신해서 내가 아버지의 회초리를 들어주지."

"건방 떨지 마!!"

서복의 몸으로 주변의 붉은 장막이 흡수됐다.

수백, 수천의 원혼이 서려 있는 극단적인 감정의 소용 돌이었다.

극도로 날카로운 송곳을 만들어 명한이 닿아 놓은 외경으로의 길을 뚫겠다는 의미였다.

과거에도 그랬고 언제나 성공했던 방식.

하지만 명한은 이번만큼은 그걸 허락해 줄 생각이 없었다.

"……하늘이 노하여 자식을 벌하다."

명한을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새하얀 빛.

하늘에 닿아 거대한 구름처럼 뭉치더니 아득한 크기의 주먹으로 맺혔다.

그것은 징죄의 철퇴이자 아버지의 회초리.

지금껏 들지 않았던 회초리를 명한이 대신하여 들었다.

쿠쿠쿠쿠쿠쿵――!!!

그날 모든 사람이 보았다.

하늘이 노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

먼지가 가라앉고 거대한 운석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래 있던 금장가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수 장 깊이에 수백 장 너비를 가진 거대한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화, 황상!!"

정적을 깬 첫마디는 군율휘의 것이었다.

하늘을 덮던 거대한 주먹의 목표가 도력제임은 두 눈으로 봐서 안다.

그걸 맞고 사람이 살 수 있을까?

다급한 걸음에 다리마저 꼬일 지경이었다.

"소백…… 소백! 황상께서는 어찌 된 것이냐!?"

"……"

"소백!"

"음? 아아. 귀가 좀 먹먹해서요."

두 번의 외침에 그제야 명한이 고개를 돌렸다.

상황과는 조금 다른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황상은? 황상은 어찌 된 거냐? 설마 그 괴물과 함께 죽인 건 아니겠지?"

"그래야 하나 싶기도 했는데…… 다행히 그건 피했네요."

손으로 먼지를 날리며 구덩이 한쪽을 가리켰다.

켜켜이 쌓인 먼지 아래에서 누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화, 황상!!’ 다름 아닌 도력제였다.

군율휘가 버선발로 뛰어가 그를 구덩이에서 끄집어 올렸다.

옷이 다 타고 상처가 여럿이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끄응. 군 장군인가?"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래.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머리가 맑아졌네."

그를 괴롭히던 광증이 씻은 듯 사라졌다.

조금은 힘에 부친 듯 몸을 떨더니, 두 다리로 땅에 섰다.

감회가 남다른 듯 말을 잊고 바람을 피부로 느꼈다.

그리고 이내, 눈을 뜨고 명한을 바라봤다.

"그 빛은 자네의 것이었나?"

"네. 운이 좋았습니다. 서복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친 덕에 황상의 육신을 되찾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된 거였군.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웠으나, 언제나 그의 의식이 날 잠식하고 있는 걸 느끼고 있었네. 아주 긴 세월 동안. 자네 덕에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만고의 은혜를 입었다 할 수 있어. 고맙네."

"괜찮습니다. 할 일을 했을 뿐이죠."

"다만…… 그가 완전히 죽지 않고 도망쳤다는 것이 걸리네."

"그것도 괜찮습니다."

명한이 답을 아끼며 잠시 먼 곳을 바라봤다.

"사필귀정이라. 하늘은 성긴 듯하나 치밀한 법이죠."

그의 눈에만 보이는 어떤 장면이 있었다.

#

"허억! 허억……!!"

깊은 산, 인적이 닿지 않는 암자.

백발의 노인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는 생기를 잃은 듯 푸석거리고 손과 발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건 불가능해. 이건 있을 수 없어……"

상황을 부정하며 주변을 마구 뒤졌다.

암자 한곳에 쌓아 둔 집기가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만약을 위해 준비해 둔 약을 찾기 위한 손짓.

하지만 아무리 물건을 뒤져도 찾는 약은 보이지 않았다.

"이걸 찾고 있나?"

"……!"

그때 들려온 목소리.

이 장소는 특별히 마련한 것이므로 누구도 접근해서는 안 됐다.

심지어 그의 심복들조차.

"서복. 서복. 그 모습이 네 진면모인가? 우습기 짝이 없구나."

"강유옥……!?"

백발의 늙은이는 서복.

그리고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강유옥이었다.

한때 가면을 쓴 채 서복의 명령을 따르던 그가 지금은 반대된 입장으로 서 있었다.

"어쩌면 이게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군. 천리를 거스르려고 한 자의 최후."

"너, 너.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나타난 거냐?"

"목적? 그건 알고 있지 않나? 내 모든 것. 내 삶의 전부였던 그녀를 그렇게 이용해 놓고서는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나?"

"다, 다가오지 마! 감히 네놈 따위가 나를 거역할 셈인가!?"

"우습구나, 서복. 신을 탐하던 자가 이렇게 초라하다니.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의 운명이라 이건가. 과한 것을 탐한 자의 최후라 생각하면 어울리기도 해."

서복의 발버둥에도 강유옥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어긋나 있었다.

그 끝을 맺는 건 눈앞의 악연과의 종지부.

갚지 못한 아들에 대한 미안함은 그 뒤의 일이었다.

"나는…… 나는 서복이다! 인간의 굴레를 벗고 신이 될 남자다! 모든 것의 정점에 설 존재란 말이다! 나는…… 나는 결코 내 운명을 믿지 않는다! 나는 고작 종놈이 아니란 말이다!!"

"운명. 그걸 택하는 건 결국 스스로의 행동이다. 나는 뼈아픈 경험을 통해 그것을 배웠지. 넌…… 아쉽게도 그럴 기회가 없을 거다, 서복."

"웃기지 마!! 으아아아아!!"

비명을 토하며 달려드는 서복.

"죽은 아내의 몫이다."

강유옥의 검이 빛과 함께 그를 양단했다.

한때 신을 탐하던 남자의 최후.

그건 그렇게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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