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3화 (223/235)

끝의 힘

명한은 자신의 힘을 영역으로 만들어서 확장했다.

천기를 찍어 누르던 서복의 쐐기가 단번에 중화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이건 유리함을 위한 영역이 아니었다.

서로의 외경이 충돌하여 상쇄되는 중간지역.

순수하게 가진 힘만이 충돌하는 공간이었다.

"어리석군. 네 수련이라고 해봐야 십여 년이다. 고작 그것으로 나와 겨루려 하는 것이냐?"

"길게 산다고 강해지는 것이면 너는 이미 초월하여 등선했겠지. 길을 벗어난 네놈은 전혀 두렵지 않다."

"길. 우습군. 하늘이 정해 놓은 길 따위에 함몰당하는 네놈이 날 징죄하겠다?"

"우리의 길은 인과의 띠로 묶여 무한하게 확장한다. 그것을 족쇄라 여겨 억지로 잘라내는 네놈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자유와 방종의 차이를 알아라, 서복."

"건방진 놈."

대화의 끝은 서복의 공세로 이어졌다.

서로 외경의 힘은 쓸 수 없지만, 나머지는 모두 가능했다.

움켜쥔 오른손에서 검강이 발현되더니 전면을 휩쓸었다.

공간이 반으로 갈라지는 듯했다.

‘소소만큼 무겁지 않아.’ 명한은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맞섰다.

양 주먹에 나눠 실은 기운이 고리처럼 엉키더니 서복의 강기를 튕겨냈다.

충격에 주변 공간이 통째로 주저앉았다.

외경이 없어도 단순한 힘만으로 이미 인간을 초월한 둘이었다.

"내가 몇 가지의 무공을 익혀왔다고 생각하지? 검술? 인간의 조악한 기술 따위라면 수천 가지가 넘는다."

"깊지 않은 무공이 수천이라도 무서울 건 없다."

"깊지 않다? 어디 네놈이 몸으로 답해봐라. 한때 검신이라 불리던 인간의 기술이다."

쩍――!

하늘에서 바닥으로 거대한 검이 떨어졌다.

순수한 강기로 이루어진 검이었다.

그 힘도 무시무시하지만 이처럼 거대한 검이 기척도 없이 등장하는 것이 문제였다.

명한이 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힘으로 맞서야 했다.

땅이 거미줄처럼 갈라지고 몸이 그 아래로 가라앉았다.

"무극검(無極劍)이다. 같은 인간의 기술에 죽어라."

"무극은 무슨!"

힘을 쥐어짜서 고리를 비틀어 버리는 명한.

강기의 나선이 검을 타고 올라가더니 면을 그대로 쪼개버렸다.

깨진 유리창처럼 강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날렸다.

금장가의 잔재에 파편이 긁고 지나가 깊은 상처를 새겼다.

"어디 한 번으로 될 것 같더냐?"

"……!"

하나가 아닌 다섯의 검.

기척 없이 나타나서는 명한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서로 외경이 차단되어 순수한 힘만을 사용한다는 가정이면 누적된 기운의 총량은 서복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도력제를 통한 그의 현현은 그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어차피 네놈은 무력한 벌레일 뿐이다. 아등바등 발버둥을 쳐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이대로 죽어서 내 영생의 거름이 되어라."

"발버둥 치는 건 인간의 권리다. 살기 위해서 애쓰는 걸 누구도 폄훼할 수는 없어. 그 처절함을 잊은 네놈에게 나는 지지 않는다."

"차이를 알아라, 인간."

떨어지는 다섯 검.

힘으로 이걸 받아내는 건 명한으로서도 버거운 일이었다.

‘차력타력(借力他力).’

가장 기본으로 돌아올 때였다.

양발을 땅에 깊이 심고 이를 축으로 떨어지는 다섯 검을 회전시켰다.

사람 손으로 강줄기를 바꾸는 턱없는 도전.

하지만 인간의 무예라는 건 애초에 그런 걸 극복하기 위해서 등장했다.

손으로 그려내는 태극(太極)에 다섯 검의 형상이 일그러졌다.

"……무당?"

"연이 깊거든."

거대한 힘의 유동에 공간이 일그러지고 명한의 육신이 비명을 질렀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온몸이 갈가리 찢어지고도 남을 힘.

만용이고 광기였다.

하지만 그런 도전이 없으면 어찌 인간이겠는가.

나아가는 건 권리.

당연한 순리였다.

웅――

바람이 잦아들고 다섯 검이 원에 갇혔다.

끝없이 순환하는 힘의 고리였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가둬두는 신기.

서복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커졌다.

"네놈이 어떻게 그런 재주가 가능하지? 옛 무당의 종사들조차 닿지 못한 기예다!"

"인과의 띠에 닿고 세상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지. 인간은 언제나 하늘에 도전했고, 그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노력했다. 억지로 비틀어서 순리를 벗어나려는 네놈과는 다르게!"

"헛소리! 나약한 인간의 변명에 불과하다. 나는 천리마저 극복했다. 그 족쇄를 끊고 완전한 자유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어설픈 도리 따위로 나를 논하지 마라!"

이번에는 도였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도강들이 하늘에 꽃처럼 피었다.

하나하나가 절대의 위력.

서복의 손짓하에 비처럼 떨어졌다.

"받아봐라. 한때 천하제일도로 불리던 인간의 도법이다. 천뇌멸도(天雷滅刀)라 하지."

끝없이 쏟아지는 날카로움이었다.

태극으로 모두 휘감기에는 그 날카로움이 지나쳤다.

그렇다면 부드러움이 아닌 무거움의 도리.

호흡으로 천지와 교류하며 뿌리를 깊게 내렸다.

"금강부동(金剛不動)?"

그 모습은 금색 휘광을 두른 부처의 모습과 같았다.

소림의 비전무학이자, 무거움의 정점.

쏟아지는 날카로움이 아무리 많아도 금강을 흠집 낼 수는 없었다.

도는 쉼 없이 쏟아져 쉼 없이 부서졌다.

"네놈이 어떻게 소림의 무학을 사용하는 거지?"

"이치의 끝에 도달하면 모든 길은 하나로 합쳐지지. 반야의 눈에 비친 진리라는 것이다."

"반야신공. 고작 그따위 얄팍한 무공으로!"

"얄팍이라. 인간의 무학에는 저마다의 뜻이 있다. 깊이 파고들면 그 또한 하나하나가 진리지. 너처럼 길에서 도망친 놈은 알 수 없는 도리라는 거다."

"궤변은 집어치워. 어차피 인간은 천기라는 굴레에 묶여 있다. 한계는 뻔해. 그것을 알기 때문에 루의 늙은이도 나도 밖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먼 곳에 서니 모든 것이 작아 보이더라. 그게 너희의 어리석음이다."

명한이 금강부동의 힘을 외력으로 풀었다.

금빛의 물결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무한의 도를 쓸어버렸다.

서복 역시 이를 경시하지 못하고 강기의 벽으로 맞섰지만, 크게 밀려 바닥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나는 인간의 도리로 네게 맞서겠다."

얼굴에 그려진 불신을 지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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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부었다.

서로의 역량을 알았으면 이젠 전력투구뿐이었다.

강기가 파도처럼 휘몰아치고 끝없는 무공의 향연이 이어졌다.

밀고 밀리고 칼날 위에서 목숨이 위태롭게 춤을 추었다.

"……젠장. 우리는 도울 방법이 없는 건가?"

이를 밖에서 지켜만 봐야 하는 은소소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실력이 검성의 수준이 올랐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격전에는 끼어들기 어려웠다.

힘은 둘째 치더라도 영역 자체의 특수성이 컸다.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 어렵고, 밖에서는 안으로 들어가기 어렵다. 저건 공간을 한정 지어서 서로를 사슬로 묶어둔 것과 같아. 너희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군 장군…… 하지만 뭐라도 방법이 있지 않겠어요?"

"나도 황상의 육신을 강탈한 저 괴물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다. 하지만 섣불리 끼어들어 상황을 망치기보다는 인내함이 옳다."

군율휘의 확답까지.

은소소가 입술을 깨물며 발을 굴렀다.

이곳까지 와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상당히 괴로웠다.

"천서. 천서는 어찌 되었지?"

그때였다.

군율휘가 보호하고 있던 태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꽤 충격받은 듯 얼굴이 창백했지만,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천서가 지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태후께서는 쉬고 계시지요."

"아니. 아니야. 천서에 저 아이를 바로잡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네."

"……천서에 방법이요?"

태후가 겨우 몸을 세우며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천서를 보관한 나만 아는 내용이네. 저 아이가 광증에 휘말리고 난 뒤 천서에 한 장이 더해졌지. 그 내용이 워낙 괴상망측하여 지금껏 잊고 지냈지만…… 어쩌면 오늘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괴상망측한 내용이라면……?"

"황제의 피라네. 황제의 피로 천서를 적시면 시작과 끝이 이어지는 길이 나타난다는 내용이었지."

정말로 괴상한 내용이었다.

하물며 지금 상황을 타계할 내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자네는 천서의 힘을 몰라서 하는 말이네. 이 책에는 강한 힘이 서려 있지. 내가 그 문구를 기억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네."

"하지만 지금 상황에 황제의 피를 어디서 구합니까?"

"그건 우리한테 있다."

"응. 응. 우리가 가지고 있어."

"호릉? 호랑?"

쪼그려 앉아 있던 호릉과 호랑이었다.

평소 도력제가 신고 다니던 신발이었는데, 안쪽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렇게 멀리 나와본 건 처음이었다. 황상은 체면 때문에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많이 힘들었다."

"이게 황상의 피라는 건가?"

"마차를 쓰지 못하는 길에서는 우리가 업으려 했지만, 황상이 싫다 하셨어."

"그때의 황상은 평소와 달랐어. 어쩌면 오늘을 알고 계셨는지도 모르겠어."

붉은색의 피는 유독 선명했다.

군율휘가 신발을 그대로 태후에게 전달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태후께서도 모르는 것이지요?"

"모르네. 하지만 저 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겠네."

"……알겠습니다."

군율휘가 격전 중에 챙겨 두었던 황제진경을 꺼내 들었다.

그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은 본능에 따른 행동이었을 뿐이다.

"천서가 말하는 시작과 끝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독일지 약일지 아무도 모르는.

그런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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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한이 짧게 숨을 몰아쉬었다.

벌써 몇 분이나 싸웠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쉼 없이 오가는 공방 속에서 감각은 무뎌지고 피로는 누적되었다.

계속해서 영역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버거웠다.

"과연. 그 알량한 말들을 지껄일 정도의 실력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황제의 육신이라는 건 혈통으로 이어지는 특별함을 수반한다. 이 육신은 더더욱 그러하지."

하지만 서복은 전혀 기친 기색이 없었다.

되레 시작할 때보다 힘이 나는 모습이었다.

육신을 쓰는 것에 익숙해지고, 점차 힘이 늘어났다.

"오랜 세월을 계획했다. 루의 늙은이를 피해서 천기의 그물 밖으로 모든 역량을 동원했지. 수십, 수백 가지의 계획이 존재하고 그것을 보완할 수천 가지의 구상이 존재했다. 늙은이의 제약 때문에 황가에 손을 대지 못해 얼마나 먼 길을 돌아왔는지 너는 모를 거다. 그러니 너와 나의 간극이 이런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래 봐야 남의 몸 빌려서 사는 기생충 같은 놈이 혓바닥만 길군."

"얕은 도발이다. 네 제주가 바닥났음은 이미 안다. 네 스승의 희생도 그동안 갈고 닦은 무공도 이제는 한계를 드러냈지. 통감하고 죽어라."

"……"

서복의 말은 대부분이 사실이다.

이제 정상적인 범주 내에서 명한이 던질 승부수는 없다.

남은 거라고는 영역을 풀고 목숨을 거는 것 정도.

하지만 그것만큼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기고 싶다.

외경의 싸움으로 돌입하면 승부 외적으로 은소소 등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장면을 묘사해라, 명한]

"……뭐?"

그 순간이었다.

익숙한.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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