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의 종류
붉은색 장막에 도달했을 때.
명한은 이 장막의 본질을 알아차렸다.
"……너도 보이지?"
"네, 도련님."
그건 망자의 절규였다.
붉은 장막은 섭리를 따라 명계로 가야 했을 혼을 이 땅에 고정해서 힘으로 사역하고 있다.
그건 극도로 고양된 분노, 슬픔, 절망 따위의 감정.
극천일무기에서 알듯이 극한에 닿은 감정이 천지와 호응하는 걸 이런 식으로 비틀어서 쓰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잔인한 방식인가.
"들어갈 수 있겠어?"
"……응."
하지만 이 장막의 구석구석, 익숙한 기운이 섞여 있다.
그건 스승인 은휘의 기운이었다.
폭발하기 전의 극단적인 감정을 그가 억눌러서 잡아두고 있었다.
명한은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아마 사부님은 이것도 예상했겠지.’
그렇기에 만들어준 문.
명한이 호흡을 고르고 장막에 손을 얹었다.
"큭……!"
정신이 날아갈 것 같은 충격이 전신을 훑었다.
수백, 수천의 비명 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들의 분노, 슬픔, 좌절 따위가 마음을 헤집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코와 귀에서는 피가 흘렀다.
"나는 너희의 절망을 이해한다. 끝을 위한 것이니 날 도와라."
견디고 말했다.
잘게 부서져 형태조차 남지 않은 혼의 파편들이 호응했다.
혼에서 혼으로 이어지는 대화였다.
명한은 그 존재 자체로 혼에 가까운 성질을 가졌기에 그 교류가 더욱 강렬했다.
끝없는 비명 속에서 문을 찾아냈다.
화악―!
붉은빛 속에서 열리는 하얀색 문.
혼들이 남은 파편을 꼬아서 만든 틀이었다.
단말만 겨우 남은 의식의 꼬투리가 처절하게 저항하는 모습이었다.
명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 지긋지긋한 고통에서의 해방뿐.
"서복――!!"
안으로 들어왔다.
#
상황은 한눈에 파악됐다.
사당을 중심으로 대치 중인 건 은휘와 서복.
남은 무리는 군율휘를 중심으로 뭉쳐서 내부의 힘에 저항 중이었다.
호릉이나 호랑, 태후도 모두 그쪽에 있었다.
"서복아, 서복아. 이를 어쩌냐. 내가 내기에서 이긴 것 같은데?"
"……정말이지 끈질긴 인간이군. 고작 속세의 벌레 따위가 왜 이리도 선계의 일에 관여한단 말이냐."
"하하하. 선계라니. 등선한 이들이 듣는다면 기가 찰 일이다."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는 두 사람.
둘 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상처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명한은 겉이 아닌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사부님의 상태가……’
은휘의 혼이 상당히 부서져 있는걸 간파했다.
"흥. 됐다. 어차피 이제 곧이었어. 네 알량한 제어도 힘이 다해가고 있으니 내가 자유를 얻는 것도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속세의 아이 하나가 방해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내가 그걸 지켜만 볼 것 같더냐??"
"허세는 그만 부려라. 육신 없는 혼이 이 땅에서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더냐. 나와 루의 늙은이가 육신에 집착하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혼만으로는 결코 이 땅에 존속할 수 없어."
"……"
서복의 말대로.
은휘의 수준은 분명 서복과 동급.
하지만 육신을 보강하며 지독하게 버텨왔던 그와는 다르게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린 은휘는 본질적인 약점이 있었다.
심, 기, 체의 삼위일체 중 체가 없는 한계는 명확했다.
"헛된 희망 따위는 버리고 물러나라. 네 지고한 경지를 존중하여 이대로 물러난다면 손을 대지 않겠다."
"하하. 이 땅을 붉은 피로 물들이며 불사의 육체를 손에 넣기 위해서?"
"어차피 우매한 인간들은 넘쳐난다. 그중 일부를 죽여서 인세에 진정한 신을 맞이한다면 그것 또한 남는 장사가 아닐까?"
"그게 네 이상인가, 서복?"
"그래.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신. 루의 늙은이도 아니고 옛적에 사라진 황제도 아닌. 바로 내가 그 존재가 되는 것이 이상적인 흐름이다."
"……내가 저 아이의 부름에 단번에 깨어난 것도 이유가 있었어."
은휘가 흐리게 답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제자로 맞이한 아이들이 그곳에 서 있었다.
모든 미련을 버리고 떠났던 속세에 다시금 돌아오게 된, 어떤 필연.
그건 그로서도 예지하지 못한 흐름이었다.
"좋다――! 삶에 이유를 찾았다면 그것으로 부족함은 없겠지."
갑자기 광휘에 휘감기는 은휘.
그 빛은 서복을 밀어내고 주변의 붉은 장막마저 흔들었다.
거대한 힘이 한계를 초월해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서 있는, 외경에 닿은 이들은 안다.
이 빛은 광휘가 아닌 자신을 불태우는 마지막 몸부림이라는 사실을.
"사부님!!"
명한이 빛을 밀어내며 은휘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은휘의 선택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그 걸음은 처절했다.
본질을 꿰뚫고 나아갈 길을 제시해준 사람.
다하지 못한 제자의 삶이 아직 많았다.
"본디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났던 세상. 네 부름에 잠시 거닐다 감에 부족함은 없다. 이 너머의 일은 육신을 가진 너희의 역할이 맡겠지. 슬퍼하지 마라, 제자야."
"사부님…… 어째서입니까. 제가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부님을 지킬 수 있었어요."
"하하. 제자에게 짐을 지우는 것은 스승의 도리가 아니란다. 이 너머의 길에 내 것은 없다. 널 위해 길을 닦을 수 있으니 그것이 기쁠 따름이지."
"사부님, 사부님……"
"울지 마라. 너는 이제 종사니라. 어깨를 펴고 이 땅에 박힌 고름을 걷어내거라. 그걸 위한 부름이니."
빛은 더욱 퍼져서 주변을 휘감았다.
아득하지만 끝이 보이는 슬픔이 깃든 빛이었다.
명한은 눈물을 거두지 못했다.
마지막이 이렇게 갑작스러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네 스승이어서 즐거웠다."
"사부님!!"
퍼진 빛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작은 빛의 파편만이 겨울의 눈송이처럼 사락사락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은휘가 서 있던 곳.
그 자리에 남은 건 ‘귀신 귀(鬼)’ 자가 새겨진 목패와 ‘돌아갈 귀(歸)’자가 그려진 땅의 흔적뿐이었다.
"……부디 평안하시길."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흙에 박는 명한.
흐느낌 사이로 겨우 건넨 마지막 인사는 너무나 작았다.
#
부서지는 빛.
서복은 그 파편을 손으로 훔치며 짧게 코웃음 쳤다.
은휘가 도달한 경지는 그야말로 지고의 것.
천기자나 자신보다도 훨씬 이른 나이에 경지를 답파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어떠한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로 돌아가기를 택했다.
"무상함은 도가에서 부르짖는 허구일 뿐이다. 인간을 묶고 있는 인과의 굴레를 끊어내면 신의 경지가 찾아올 텐데 그걸 포기하다니. 어리석군, 어리석어."
"……헛소리하지 마."
부스스 일어나는 명한.
슬픔으로 그려진 눈물을 닦아내고 천천히 서복의 앞으로 걸어갔다.
"어리석은 자의 제자. 너 또한 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 무의미한 도전을 하겠다고? 네 스승조차 내게 닿지 못했는데 감히 네가 가능할까?"
"나는 이미 파운과 함께 널 꺾은 적이 있다."
"그건 고작 해봐야 내 편린일 뿐이다. 오랜 세월 숙성시킨 이 육체와는 비할 바가 아니지. 불로불사의 육체를 얻지 못했다 한들 너 따위는 내게 우습다."
"편린이라. 그럼 진짜 네놈은 어디에 있지?"
"……이곳에 있는 것이 진짜 나다."
"거짓말. 네놈의 육신은 세월에 먹혀서 쪼그라든 것 아닌가? 그게 부끄러워서 남의 몸으로 갈아타고? 진짜 자신을 내보이지도 못하는 놈이 신이라고? 우습지도 않군."
"건방진!"
쿵――
땅이 무형의 압력에 가라앉았다.
어떠한 기의 유동도 없이 마치 어떤 법칙처럼 현상을 비틀었다.
지진처럼 땅이 흔들리고 힘의 여파에 먼지가 날렸다.
"흠……?"
하지만 명한은 그 압력을 받으면서도 두 발로 서 있었다.
짓누르는 힘을 상쇄하는 흰색의 빛무리 때문이었다.
인과를 비트는 쐐기.
그리고 이를 상쇄하는 순리였다.
"사부님."
당연히도 이건 은휘가 남긴 힘이었다.
억지로 천기를 비트는 서복에 맞서서 흐름에 순응하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명한은 그 의지를 띠로 묶어서 자신의 안쪽으로 당겼다.
말로는 해석되지 않는 어떤 의지가 느껴졌다.
눈을 감고 조용히 그 감각을 되새겼다.
"세상에는 억지로 비틀어서는 안 되는 순리라는 것이 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의 곳으로. 산 자는 산 자의 삶으로. 네놈처럼 비통과 절망으로 죽음을 묶어두고 그것으로 천기를 비트는 건 옳지 않아."
"옳고 그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세상은 결국 승자의 것. 내가 천기를 굴복시키고 세상의 주인이 된다면 그때는 내가 옳은 것이 되겠지. 어리석고 나약한 네놈의 말 따위는 의미 없다."
"누차 말하지만…… 자신의 모습조차 당당하게 내보이지 못하는 너 같은 겁쟁이 따위가 세상의 주인이 될 수는 없어."
"네놈이 정말로 죽고 싶은 모양이군."
"아니, 살고 싶다. 반드시 살아서 네놈을 쓰러뜨리겠어."
흰빛이 천천히 몸을 휘감아 천의무봉의 형태로 스며들었다.
사부, 은휘가 남긴 마지막 선물.
"와라. 순리대로 네놈을 끝내주마."
제자의 도리를 다할 참이었다.
#
사라락.
책장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그 끝을 더듬는 건 주름진 손.
흰 수염이 바람에 날리며 책장의 마지막 소리를 덮었다.
"그래. 이제 시작한 모양이더구나."
읊조리는 듯한 소리에 수십의 인영이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한 명, 한 명이 지고의 경지에 달한 고수.
일대의 검수, 도제, 권신……
역사적으로 족적을 남긴 수많은 인물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바람을 이루는 것에 기다림은 어쩔 수 없다고 하나, 너무나 길었구나. 천 년의 시간을 은애함에 마음은 부서져 가루가 될 것 같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르신."
"그래. 그때가 너면 너희 역시 소명을 다하리라 믿는다."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일제히 무릎을 꿇고 조아리는 모습은 군대와 같았다.
한때 무림을 종횡하던 이들임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노인의 이름은 천기자.
천 년을 넘게 살아온 살아있는 신화였다.
"어르신. 저희가 대비해야 할 것은 역시 서복입니까?"
"이제 와서 예지는 의미 없는 일이다. 서복이 되든 그 아이가 되든 그분의 재림은 정해진 수순이지. 모든 것은 옛 영광을 위한 희생. 부서진 생명 위에서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듯, 인과의 수레바퀴가 굴러갈 뿐이다."
손끝으로 원을 그리는 천기자.
허공의 한 부분이 가위로 오린 듯 잘려나갔다.
그리고 그 너머로 ‘밖’의 모습이 언뜻 스쳐 갔다.
아직은 닿지 못하나, 이제 곧 닿을 영역이었다.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지고 필멸과 불멸의 의미 역시 사라진다. 그때가 되면 옛것들이 살아나 새로운 삶을 이 땅에 뿌리내리겠지. 지금의 덧없는 삶이 아닌 충만하던 그 시절의 재림……"
황금색 옥좌와 그 위에서 웃던 한 남자.
"무엇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모든 것은 그를 위해서였다.
천 년의 기다림.
천 년의 집착.
이제 곧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