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1화 (221/235)

피의 유대

허선의 죽음은 많은 것을 결정지었다.

모두가 의문을 품던 ‘어두운 일면’에 대한 확증.

괴물처럼 변한 모습으로 무림맹의 모두에게 확신을 주었다.

무기를 버리고 싸움을 포기했다.

어떤 사람도 괴물이 되면서까지 싸우고 싶진 않았다.

"고를 사용한 이들은 따로 분류해 주세요. 귀의를 통해서 어떻게든 치료해 보겠습니다."

"무림맹은 그대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됐군요."

"모든 건 이 의미 없는 싸움이 끝난 뒤에 해결하도록 하죠."

명한은 무림맹을 부맹주에게 넘기고 상황을 정리했다.

고를 사용한 이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귀의를 남기고 추가적인 반발을 억제하기 위해서 무리를 잘게 쪼갰다.

그리고 동시에 신교로 인편을 보내서 상황을 전달했다.

쉴 틈은 없었다.

"도련님, 흑기예요."

아직 처리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

평원 저편으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숫자가 처음 맞닥뜨렸던 것보다 배는 돼 보였다.

이번에는 확실히 도주를 차단하겠다는 각오가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금장가 쪽에서는 연락이 아직인가?"

"지금 도착했습니다, 태사님."

때맞춰 흑점에서도 연락이 도착했다.

금장가 쪽을 관찰하고 있던 소식통이었다.

일월이 건넨 서신을 펼쳐 눈으로 훑었다.

‘금군 오백에 흑기 오백인가.’

포위망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

도합으로 계산하면 동원된 병력만 물경 삼천이 넘어갔다.

작금의 무림맹과 신교의 전력이 강해도 숫자로는 턱도 없는 수준이었다.

"소백, 어떻게 할 거야? 네 계획대로 황가를 흔들려면 그만한 패가 있어야 할 텐데."

"패는 금장가에 있어. 아마도 사부님이 대치하고 있는 거겠지."

"그 패가 먹힌다는 건 둘째 치고 어떻게 접근하려고? 포위망이 두꺼운데."

"눈앞의 흑기도 처리해야 하고 포위망도 뚫어야 한다는 건가. 확실히 쉬운 문제는 아니네."

흑기를 앞에 두고 병력을 물리는 건 어렵다.

기동성에서 기마대를 따돌리는 건 어불성설.

이대로 병력을 나누면 그대로 추살되고 말 것이다.

상황을 유지하며 포위망을 돌파하여 금장가 안으로 돌입한 방법.

그런 수가 필요했다.

"아직은 수가 얄팍하구나."

"누구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장내에 운집한 고수만 수십.

그중 누구도 이 기척의 주인을 눈치채지 못했었다.

"이즈음에서 흑기로 곤란해할 것이라 말하더구나."

"……천마?"

"네 삼분지계의 마지막은 내가 맡아주지."

그건 다름 아닌 천마였다.

산보하는 듯한 가벼운 걸음으로 장내를 가로질러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에 섰다.

누구도 그를 막거나 저지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네가 이 무림맹의 애송이들을 저지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쓸어버릴 생각이었다만…… 그럭저럭 구색은 갖추었군."

가벼운 손짓에 땅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는 무림맹이 자리를 잡은 터의 주변 백여 장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바닥이 푹푹 파이고 그 안에서 오색기를 들고 있는 무리가 튀어나왔다.

숫자는 적게 잡아도 오백.

무림맹 쪽에서는 전혀 파악하지 못한 숨겨둔 병력이었다.

"처, 천마! 설마 우리를 기습할 계획이었나?"

"저 아이 바람대로 삼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것이 무너졌다면 너희 무림맹을 내가 남겨둬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우리가 그렇게 호락호락 당했을 것 같나!?"

"착각하지 마라, 애송이. 내가 경계하는 건 너희들 따위가 아니다. 그 발버둥을 내버려 두는 것도 이런 어설픈 작당질을 용납하는 것도 그런 이유지. 선을 넘어 덤벼든다면 씨를 말려버리는 것도 여반장이다."

"……!"

힐끔 돌아보는 천마의 몸에서 항거할 수 없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숨이 막히고 오금이 저리는 철저한 패도였다.

화경을 돌파한 고수들조차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정도만 하지."

그 기세를 걷어낸 건 명한이었다.

걸음으로 인과의 띠를 엮어서 패도의 맥을 막았다.

묶어둔 띠가 끊어질 듯 요동쳤지만, 겨우겨우 버틸 수는 있었다.

‘무시무시하네. 이게 진짜 사람이 맞나?’

이를 악물고 기세에서 밀리지 않도록 버텼다.

"흠. 그사이에 실력이 제법 늘었군."

"목숨 걸고 싸우다 보면 안 그럴 수야 없지."

"후후. 좋은 마음가짐이다. 죽음의 위협보다 좋은 자양분은 없지. 그대로 계속 정진해라. 적어도 나와는 양보 없이 맞설 수준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나중에는 그 얼굴에 여유가 없게 만들어주지."

"좋군. 네가 신교를 떠난 것이 아쉬워질 정도야."

"하."

짧은 웃음을 끝으로 서로의 기운이 동시에 사라졌다.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교차한 뒤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런 곳에서 구구절절 사연을 나눌 만큼 한가로운 이들이 아니었다.

"나는 이대로 금장가로 간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 목적은 피를 적게 흘리는 거야. 마음에 안 든다고 흑기를 다 잡아서 죽이지는 마."

"옛 황제의 부활. 조금은 기대가 되는 일이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네 뜻을 따라주지."

"고맙다고 말해야 하나?"

"그런 건 됐다. 그보다…… 그 늙은이는 아직 정정한가?"

"그 늙은이?"

"너와 내가 이해하는 죽지 못한 늙은이 말이다."

화무천.

명한은 천마가 언급하는 늙은이가 화무천임을 알아차렸다.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아들에게 묻는 상황.

"뭐, 한 천 년은 거뜬하겠더라."

"그런가. 후에 만나면 일생 정도는 봐준다고 전해라."

아이러니하지만, 이게 그들의 삶.

명한이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고는 천마의 옆을 스쳐 갔다.

각자의 길에 놓인 돌을 치울 때였다.

#

사방에서 들려오는 북소리가 신호였다.

명한은 무당과 아미파 등 전력은 무림맹에 잔존시켜 둔 채로 소수만 끌고 금장가로 이동했다.

천마가 직접 흑기를 상대함에 있어서 뒤는 안전해야 하는 법.

무림맹의 분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병력의 분산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많군."

"많아."

금장가를 포위한 병력과 맞닥뜨렸다.

흑기와 금군이 뒤섞인 구성으로 족히 오백은 넘었다.

햇빛을 받아서 번쩍이는 금색 갑옷과 방패는 고수와는 다른 위용이 있었다.

"우리 목적은 어디까지나 안으로 진입하는 거다. 돌파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뼈는 부러뜨려도 되는 거겠지?"

"뭐…… 적당히."

말을 맞추고 세 사람이 포위망으로 뛰어들어다.

고작 셋, 이라는 시선으로 이들을 보던 흑기는 그 기세가 범상치 않다는 걸 이내 깨달았다.

지휘관의 수신호와 함께 일부가 맞서서 튀어나왔다.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렸다.

"우리는 이곳을 지나가야 한다! 다치기 싫은 자, 물러나라."

노호성을 터뜨리며 진각을 밟는 명한.

땅이 원형으로 파이며 거대한 힘의 유동을 주먹으로 모았다.

그것은 마치 소림의 백보신권과 같은 방식.

소리보다 먼저 대기가 터지고 거대한 주먹의 기운이 전면을 휩쓸었다.

전력으로 달려오던 흑기 수십이 단번에 쓸려나갔다.

"고수다!! 차륜진으로 상대해라!!"

"수가 적다고 방심하지 마!"

잘 훈련된 병사라는 건 이런 것.

명한의 실력이 빼어남을 깨닫자마자 거리를 두고 차륜전으로 방식을 바꿨다.

두셋씩 흩어진 흑기가 거리를 둔 채 주변을 돌면서 단궁을 쐈다.

작지만 빠르고 그만큼 분간이 어려운 무기였다.

"치사하게 알짱거리지 말라고!"

"도련님은 방해하게 둘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이쪽에도 명한 혼자만 있는 건 아니다.

왼쪽으로 향아가 오른쪽으로 은소소가 나섰다.

검의 비가 단궁의 화살을 쳐내고 기수의 팔과 어깨를 관통했다.

향아의 권장은 우레처럼 공세를 튕겨내고 신기에 가까운 보법으로 기수들을 농락했다.

수의 이점으로 상대하기에는 이들이 너무 강했다.

"금강진을 사용해라! 놈들을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우――!"

이번엔 흑기가 아닌 금군까지 움직였다.

황금색 물결이 진을 짜고 방위를 압박하니, 그 자체가 힘이었다.

순식간에 은소소와 향아의 기운이 위축됐다.

"둘 다 물러나!"

이런 거대한 힘은 누르지 못하면 계속 밀리고 만다.

명한이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천지의 기운을 몸 안에 가뒀다.

이건 스스로를 천지간의 중심에 두는 행동.

하늘부터 땅까지 모든 기운이 연결되며 세상이 요동쳤다.

그그그그긍――

마치 거대한 해초를 끌고 움직이는 나룻배처럼.

한 걸음의 전진에 세상의 인과가 함께 딸려왔다.

거인이 남기는 족적.

쿠쿠쿠쿠쿠쿵!!!

땅이 무너지고 폭음이 그 위를 덮었다.

금군의 기세는 산과 같았지만, 명한의 기세는 하늘과 같았다.

힘으로 찍어 누르고 그 합치를 억지로 뜯어냈다.

백여 명의 금군이 일제히 쓰러졌다.

"……큭."

여파 역시 만만치 않았다.

백 명을 정면에서 맞서는 건 명한이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입가로 흐르는 핏물을 소매로 닦으며 호흡을 정돈했다.

무리한 건 사실이지만 이건 필요했다.

빠르게 들어가기 위해서.

"그건 안 된다, 꼬마야."

"여길 지나가게 둘 수는 없지."

하지만 그 순간.

날카로운 기운이 사위에서 치솟으며 명한을 옥죄었다.

내상을 다스리던 상태라 물러나는 것이 편치 않았다.

황급히 힘을 휘둘러 기운을 흘렸지만, 손해는 어쩔 수 없었다.

물러난 명한의 안색이 창백했다.

"……가면. 서복이 여기에도 안배를 해 두었던 건가."

모습들 드러낸 건 흰색과 검은색 가면 차림의 인물들.

죽거나 사라진 이들을 대신해서 자리를 채운 서복의 심복들이었다.

실력은 앞선 자들보다 약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실력은 아니었다.

명한 역시 쉬이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하하. 어르신의 대계가 코앞인데 고작 네놈이 방해하게 둘 수는 없다."

"순리를 거스르지 마라. 네 작은 힘으로는 큰 물결을 막지 못한다."

게다가 가면은 둘이 전부가 아니었다.

안개처럼 바닥에서 일어나 자리를 잡는 것이 둘.

전부 더해서 넷이었다.

아무리 명한이 무리한다고 해도 넷을 상대로 단기결전은 어려웠다.

‘젠장. 여기서 발이 묶이면 안 되는데……’

천마가 흑기를 묶어 둔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수단.

까딱 잘못하면 서복이 노리는 데로 이 땅 전체가 피로 물들 수도 있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군."

"……어?"

그때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이들이 등장했다.

사뿐한 걸음과 조금은 짓궂은 표정.

"파운?"

"네 눈에는 파운만 보이는 거냐?"

"강유까지? 너희 둘이 어째서?"

"흥. 빚을 갚으러 온 거다."

강유와 파운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도움에 명한이 얼빠진 얼굴을 했다.

상황이 맞아서 협력한 적은 있지만, 이런 건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한쪽 팔은 날아갔지만, 그럭저럭 구실은 할 수 있게 됐다. 네놈이 원하는 대로 저 너머로 가게 해 주지."

"구실이라. 잡념을 덜어낸 덕에 전보다 경지가 오르지 않았던가?"

"큭큭. 어쩌면 너는 넘어섰는지도 모르지, 강유."

"웃기는군. 한번 해볼 테냐?"

"하! 마침 잘됐군. 오늘 이 자리에서 누가 더 강한지 겨뤄보자고."

금세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

그 모습을 본 뒤에야 명한이 실감을 했다.

본래의 습작에서는 이렇게 될 수 없는 관계가 지금은 보란 듯이 이렇다.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의미.

"뒤는 둘에게 맡긴다. 상처가 적은 쪽이 이기는 것으로."

"하하! 좋군, 좋아! 오늘의 승리는 내가 가져가겠다!"

"헛소리. 너는 날 넘지 못해, 파운."

"해 보자고!"

형제의 도움을 발판으로.

명한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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