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로
판단은 빠르게.
명한은 화산파를 제압하는 것과 동시에 남은 모두를 은소소에게 맡기고 개별 행동에 들어갔다.
무림맹의 경계가 두터워도 그건 병력에 대한 개념.
초절한 고수가 은밀하게 행동하는 걸 간파하지는 못한다.
전력을 다해 평원을 가로지른 명한이 이곳에 있는 이유였다.
"정말이지 이래저래 상황을 잘도 꼬아 놨어. 덕분에 고생 좀 했다고."
"닥쳐라, 이 마교의 앞잡이! 네놈의 감언이설에 다른 놈들은 속았을지 모르나 나는 어림 없다! 모든 무림맹의 무인은 들어라! 저 마교 놈을 처단해라!"
허선은 발악하듯 외쳤다.
몇 안 남은 맹의 전력으로 시간이라도 끌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의 외침에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네 말을 따르는 것들은 제압해 뒀다. 이젠 넌 혼자야, 허선."
"웃기지 마. 고작 네놈 하나에 맹의 무인들이 전부 당했다고!?"
"한심하기 짝이 없군. 네놈이 맹신하는 고라는 건 그렇게 만능이 아니야. 인간의 잠재력을 폭발시켜서 경지 이상의 능력은 발휘하게 해 주지. 하지만 수련하지 않은 그저 껍데기일 뿐이야.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건 그저 힘만 센 파락호에 불과하다고."
"허튼소리. 우린 맹의 무공도 개방했다.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늙은이들이 꽁꽁 묶어 두었던 절기들도 모두 풀었단 말이다! 고의 힘에 각 문파의 비전이면 우리를 당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그게 허공의 사제로 가려져 있던 네 본심이냐?"
"……!"
덜컥. 마치 소리가 들린 듯 흔들리는 허공의 눈동자.
명한의 말은 그의 마음을 날카롭게 후비고 있었다.
"네놈이 허공 대사에게 미치지 못하는 건 단순히 항렬만이 아니야. 무공이란 본디 심, 기, 체. 세 가지가 모두 균형을 이루었을 때야 비로소 위력을 발휘하는 법. 아무렇게나 무공을 욱여넣는다고 힘을 발휘하지는 못해.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네가 소림의 방장이 될 수 없던 것도 당연하지."
"닥쳐. 그깟 정론 따위…… 중요하지 않아! 결국은 힘이다. 힘을 가진 자가 도를 세우는 법이야! 인간을 탈피하면 삼위일체의 원론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분께서는 내게 약속했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힘을 가지게 해 준다고!"
허선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풍겨 나오는 기운도 불가의 성스러운 것이 아닌, 어딘가 탁한 종류.
명한이 저도 모르게 코를 막고 한 걸음 물러났다.
"크…… 크흐흐흐. 크흐.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네놈만 죽이면 되잖아? 널 죽여서 망루에 걸면 무림맹을 거역하던 것들도 전부 꼬리를 말 거야. 그러면 모두가 날 추앙할 터. 바뀌는 건 없어. 달라지는 건 없어!"
"소, 소 공자! 저건 대체 무슨 모습이오!?"
"다들 뒤로 물러나세요. 아무래도 단순한 고가 아닌 거 같습니다."
명한이 장내의 인물들을 뒤로 물리고 기를 실처럼 방사했다.
허선의 몸에서 풍겨 나온 기운이 실에 닿아 마구잡이로 뒤엉키더니 그 끝을 타고 올라왔다.
남의 기운마저 잡아먹으려는 탐욕이 느껴졌다.
‘쐐기. 쐐기를 이렇게도 쓰는군.’
그 바탕은 마음의 공허였다.
고를 통해서 부풀린 신체에 마음에는 쐐기로 구멍을 뚫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굶주림 같은 것.
어떤 면으로는 심, 기, 체가 하나가 된 상태였다.
무인들이 추구하는 삼위일체가 긍정의 것이라면 지금의 허선은 지극히 부정의 것.
부정의 무도라고 할 수 있다.
"비틀고 깨고 뚫고. 대체 얼마나 사람을 이용해야 적성이 풀리는 거냐."
명한이 잇소리를 내며 몸 안의 힘을 바로 했다.
눈앞의 허선의 어리석음은 화가 나지만, 그보다 더 그를 분노하게 하는 건 서복이었다.
아무리 못난 인간도 이렇게 쓰고 버려져서는 안 된다.
"네가 바라는 대로는 안 될 거다, 서복."
주먹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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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선의 삼위일체는 지극하게 패도적이었다.
그의 육체는 범처럼 강하고 마음은 격렬하고 기운은 탐욕스러웠다.
표출된 욕망을 짐승의 거죽으로 싸면 이런 모습일까.
사납게 몰아치는 모습이 지옥의 야차와 닮았다.
"내 앞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세 갈래로 나뉜 조법이 벽을 긁었다.
나무가 그대로 뜯어지고 흔적이 검게 탄화했다.
독공 고수의 그것처럼 그의 몸에서는 독한 기운이 넘치도록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이런 명한의 칠채향마저도 침범했다.
향이 타며 경계가 잠식되기 일쑤였다.
함부로 근접해서 겨룰 수가 없었다.
"한때 소림의 승려였던 인간이 이런 꼴이라니. 부처님 보기에 부끄러움도 없는 거냐?"
"닥쳐! 닥쳐!! 부처가 내게 뭘 해줬다는 거냐!? 자애가 뭘 낳는다는 거냐! 나는 모든 불가의 설법을 부정한다!"
"소림의 법이 바닥까지 떨어졌군!"
허선이 땅을 차며 몸으로 명한을 밀쳤다.
거력에 기의 벽이 흔들리고 층계가 푹 주저앉았다.
단번에 아래로 무너지는 바닥.
폭음과 함께 층과 층의 경계가 연달아 무너졌다.
쾅. 쾅. 쾅. 쾅.
허선에게는 충격과 고통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수십 장의 높이에서 추락함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땅에 닿자마자 웅크렸던 몸을 펴며 명한을 공격했다.
쿵――!!
화경에 뒤집혀서 기둥에 박히는 허선.
나무가 그대로 부서지며 주변 구조물도 함께 쓸려가기 시작했다.
무림맹의 집결지로 쓰인 건물이 통째로 붕괴된 것이다.
애초에 내구성을 염두에 두고 지은 건물이 아니다.
날뛰는 허선을 견딜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주저앉았다.
"……다들 피한 것 같군."
일찍이 사람을 물린 덕에 붕괴에 피해 입은 사람은 없었다.
주저앉은 건물 잔해 밖으로 전부 무사히 대피한 모습이었다.
제압해 두었던 무림맹의 사람도 사정은 비슷했다.
다들 도망치는 건 빨랐다.
"소백――!!"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건 허선이 유일했다.
잔해를 힘을 밀어내며 짐승처럼 소리쳤다.
삭일 수 없는 분노는 이미 한계치를 넘어선 상태였다.
붉게 변한 눈으로 명한을 찾은 뒤 앞뒤 안 재고 달려들었다.
훙! 후웅―! 훙!
일권일권이 태풍처럼 몰아쳤다.
하나하나가 절기였고,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녔다.
허공이 돌아온다 해도 이런 위력은 불가능.
그야말로 허선, 그 자신만이 낼 수 있는 초절한 무공이었다.
"죽어! 죽어!! 죽어버려! 무림맹은 내 것이다! 누구도 내게서 무림맹을 뺏어갈 수 없어!"
허공의 사제로 수련하기를 40년.
소림사 방장의 사제로, 언제나 그림자 속에서만 지내왔었다.
정마대전에서 패할 때도, 두 번째 무림맹 규합 기회가 왔을 때도.
언제나 앞에 나서는 건 허공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고리타분하고 틀에 박힌 허공의 방식으로는 안 된다.
힘만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
정도의 가치도 소림사의 위용도.
허선이라는 이름도.
"……허선 맹주님?"
"저게 맹주님이라고?"
"맹주? 맹주님이 맞아?"
"저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어?"
어느새 주변에 모인 사람들.
마교를 상대하기 위해서 나갔던 무인들이 전부 돌아와 있었다.
대체 언제? 아니, 왜?
허선의 심장박동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 모습이 그토록 자랑스럽다면 숨지 마라, 허선."
"……너!"
"네가 바란 길 아닌가? 고를 통해서 힘을 얻는 대가는 그런 거다. 정의를 외치는 무림맹의 모습이며, 맹주의 진면목이다."
"그, 그건……"
허선이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났다.
자신의 모습이 정확하게 어떤지 모르니 두려움이 컸다.
양손 가득 징그럽게 튀어나온 혈관이나 갈라진 목소리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모든 걸 버려서까지 얻은 ‘힘’의 대가가 무엇인지.
그러니 모든 건 타인의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저게 고를 쓴 최후라고? 아니지? 우리에게 그런 말은 없었잖아!"
"전부 제어할 수 있다면서! 어떻게 된 겁니까, 허선 맹주님!"
"소림사의 방장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모습을……"
"저자가 정말로 맹의 맹주가 맞습니까?"
수군거리는 모습들.
손가락질과 혐오에 물든 눈동자.
자신을 맹주라며 떠받들던 이들이 지금은 불쾌한 오물을 보듯 바라보고 있다.
어째서.
힘을 얻기 위한 대가 아니었나?
정의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한 것 아니었나?
허선이 손을 올려서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
손끝에 닿은 일그러짐.
그건 이미 인간의 형태가 아니었다.
"네가 어르신이라 모시는 자의 모습이다. 고독을 통한 통제의 끝에는 언제나 이런 파멸이 기다리고 있지. 그 자신을 제외한 남은 모두를 쓰고 버릴 도구로 생각한다는 의미다."
"거,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그게 아니라면 그는 어디에 있지? 널 통해서 무림을 재편하겠다는 인간이 지금껏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데? 어차피 그런 거다. 네가 아니라도 상관없는 거야. 판만 적당히 짜고 나면 흑기로 섬멸하면 되니까."
"개소리 집어치워!! 그분이 나를 버릴 리 없다! 흑기가 남은 모두를 죽여도 나는 살려주신다고 했어!!"
"……그래."
"아."
허선의 눈동자가 굳었다.
주변의 시선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걸 그도 알아차렸다.
무림맹의 맹주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방금 그 말 사실입니까, 맹주님?"
"흑기의 공격에서 우리 모두가 죽어도 맹주님은 살아남는다고요?"
"그럼 흑기를 이끌던 황가와 이미 약조가 돼 있었다는 겁니까?"
"우리 모두를 죽일 생각이었습니까!?"
담았던 분노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애초에 허선이 맹주에 앉은 뒤부터 계속 담아왔던 감정이다.
맹을 위해서. 정도를 위해서.
그저 그런 명분으로 참았던 것이 이제는 둑 없이 쏟아졌다.
"마, 말이 헛나왔을 뿐이다! 모두 다 살았을 거라고!"
"거짓말! 이미 그날 흑기에 밟힌 우리 동료가 여럿이야! 어떻게 당신이 그러고도 무림맹의 맹주라고 할 수 있어!?"
"이 배신자! 황가의 앞잡이!"
"나는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나는……"
무엇이었지?
허선이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소림사 방장의 사제, 무림맹의 맹주, 허선이라는 이름.
무엇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비틀비틀 몇 걸음을 걷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허무함에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꺾이면 몸과 기운도 유지하지 못하는 건가."
서복이 박아 넣은 쐐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심, 기, 체의 삼위일체를 유지한 터라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도 함께 무너졌다.
괴물 같은 육체는 말라 비틀어지고 탐하던 기운은 사라졌다.
그야말로 일장춘몽과 같은 모습이었다.
"……어째서냐? 어째서 나는 사형처럼 될 수 없었지?"
부서지는 손을 부여잡으며 허선이 물었다.
그로서는 끝끝내 이해하지 못한 한 가지 질문이었다.
"불가에 몸을 두고 탐욕을 일삼고, 정도에 속했으면서 마도를 택한 자. 너는 결국 단 한 번도 네가 가진 것에 만족한 적이 없다. 부추김을 한 서복의 사악함을 탓할 수도 있지만…… 네 스스로 택한 결과임은 변하지 않겠지."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는 거냐……?"
"사필귀정이라."
"하. 하하. 빌어먹을……"
바라던 답이었을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바람에 허선이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