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9화 (219/235)

배신의 끝

명한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유보적이다.

대외적으로 드러난 무력은 분명 현경 이상.

하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높이 평가하기 어렵다.

하물며 악무군은 고작 반년 전에 소림사에서 그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는가.

실력이 늘었어도 아직은 모자라다.

이게 그의 평가였다.

"화산파를 너무 호락호락 보는군."

"아니. 내가 만났던 화산파의 무인은 대단했어. 내가 무시하는 건 지금의 너희야."

"흥. 어린것이 기고만장하는군. 내가 네 실력을 인정해서 소명회에 발을 걸쳤다고 보는 건가? 주변에서 대우해주니, 너무 콧대가 높아졌군."

"그게 네 실수라는 거다, 악무군."

명한이 앞으로 보법을 밟았다.

대기가 원형으로 터지고 삭제된 공간만큼의 힘이 주먹에 실렸다.

낙화의 검이 그 궤적을 비틀어 힘을 흘리지만, 쉽지 않았다.

유리 긁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리고 검면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여력에 무너지는 바닥과 일그러지는 악무군의 얼굴.

주먹을 움켜쥐며 전체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크윽! 어린놈의 내공이 무시무시하군!"

파편을 밟아서 몸을 바로잡는 악무군.

검을 일자로 세워 매화검을 정수를 뽑아내니, 주변으로 향이 진하게 풍겼다.

절정에 오른 변검.

수십 수백의 변초가 꽃잎처럼 떨어졌다.

"이토록 화려하기만 한 것이 화산의 검이었나?"

"……!"

하지만 명한은 그 화려함에 현혹되지 않았다.

두 발은 대지에 박고 변초 속의 진짜를 찾아냈다.

손가락으로 검극을 잡아내어 아래로 당기니, 악무군은 견디지 못하고 추락했다.

입가로 새어 나오는 핏물은 내상의 증거.

당황으로 일그러진 표정은 도무지 감출 수가 없었다.

"어, 어찌!?"

"시류를 읽지 못하는 동태눈깔이니 당연한 건가?"

"크윽! 웃기지 마!"

악무군이 발악 같은 외침과 함께 검을 뒤집었다.

억세게 쥔 명한의 손가락을 튕기고 자색의 검강을 둘렀다.

극성의 자하신공.

주변 공간이 그 기운에 침식되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하신공은 화산에서도 제대로 익힌 자가 손에 꼽히는 극상승의 무공.

파괴력만큼은 발군이었다.

"자하신공이라. 분명 대단한 무공이긴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명한의 주먹이 틈을 파고들어 기운의 고리를 끊어냈다.

자색 물결이 깨진 유리처럼 튀고, 여파가 거꾸로 솟구쳤다.

일그러지는 공간은 마치 덧칠된 그림과 같은 모양새.

범인은 이에 당황하겠지만, 명한에게는 이런 일그러짐이 익숙했다.

자색의 실타래를 손으로 잡고 인과의 띠로 꼬았다.

쿵――!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자색의 힘에 악무군이 주저앉았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어째서 자하신공이!?"

"자하신공은 주변 공간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일 수 있는 천혜의 절학. 하지만 그걸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이용당하기도 쉽지."

"헛소리! 네놈이 자하신공을 어떻게 이용한다는 말이냐!"

"간단해. 자색보다 더 진한 것이 있으면 되거든."

순식간에 자색의 기운을 뒤덮어 버리는 칠흑의 어둠.

이건 인과의 띠가 아닌, 극천일무기의 기운이었다.

애초에 이것도 같은 원리로 움직이는 무공이었다.

화무천이 그것을 극한으로 익혀서 외경에 닿은 것처럼, 명한도 같은 방식의 쓰임에 익숙해졌을 뿐이다.

"너와 노는 건 이 정도로 하자."

"――!"

어둠이 일제히 악무군을 압박했다.

그의 전신 경맥이 끊어지며 모든 무공을 사라졌다.

화산심공이나 자하신공의 저항은 무용지물이었다.

파도에 쓸린 모래알처럼 그 형태를 남기지 않고 무너졌다.

"내, 내 무공이……?"

"욕심에는 그만큼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있을 수 없어. 말도 안 돼. 나는 악무군이라고. 화산의 악무군이라고! 내가 고작…… 고작……"

폐인이 된 악무군이 발버둥 치며 명한을 바라봤다.

자색을 집어삼킨 극천일무기의 기운을 장난감처럼 다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박혔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외면하던 진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누가 배신하든 상관이 없었다.

명한은 그 누군가가 누구이든 제압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바닥으로 주저앉아 소리쳤다.

"……모든 화산의 무인은 검을 내려라!"

그건 마지막 남은 장문인의 책임.

"우리는 졌다."

한 줌의 양심이었다.

#

명한이 화산과 맞물리고 있을 무렵.

휘문종월에게서 벗어난 무인들은 별동대를 구성해서 무림맹으로 향했다.

몸은 쇠하고 정신은 피폐했지만, 이들 나름의 결의가 있었다.

"찾았다."

"그의 말대로 맹은 신교에 묶여 있군."

산을 넘어서 발견한 무림맹의 주둔지.

멀지 않은 곳에 진을 친 신교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척 봐도 규율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누구를 찾아야 하는지는 모두 알고 있소?"

"부맹주 담월. 장로, 혁원상. 그조차 없다면 각주인 태운을 찾아서 상황을 설명하고 우리가 찾은 정보를 전달해야 하오."

"돌입하면 맹주의 측근이 우리를 방해하려고 할 터."

"각오는 돼 있소. 우리 중 몇이 죽는다고 해도 그것이 맹을 위한 길이라면 가치가 있겠지."

"좋소이다. 무림맹을 위하여. 무림을 위하여."

각오를 다진 이들이 맹을 향해서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경계를 서던 일부가 반응했지만, 그들의 위치와 얼굴은 통행증이었다.

명망 높은 정도 인사들.

자연스럽게 내부로 합류하여 원하던 대상과 접촉했다.

부맹주 담월부터 장로 혁원상, 각주 태운까지 전부였다.

놀라울 것도 없는 것이 이들은 현재 무림맹의 주류에서 밀려나, 개별의 파벌을 형성한 채였다.

무림맹의 앞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런 고민으로 골머리 앓던 그들 앞에 생존자들이 나타난 격이다.

"……하. 그게 전부 사실이란 말이오?"

"전부. 이 목숨을 걸어서 증명하겠소. 휘문가에서 가지고 나온 장부도 있으니 이를 비교하면 증명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 부디 맹의 앞날을 위해서 그자를 끌어내려 주시오."

"어찌 이런 일이! 허공 대사께서 맹주직에서 물러난 상황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감히 허선 이자가 외부와 결탁해서 무림맹을 사적으로 이용해!?"

"혁 장로. 이건 신중해야 하오. 현재, 맹 내부에는 허선을 지지하는 자들이 적지 않소. 그를 통해서 고와 접촉한 중소문파의 인물들이지.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우리가 당할 수도 있소."

"하! 그럼 어쩌자는 말입니까?"

도구와 기회는 주어졌지만,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허선의 세력도 반대파에 만만치 않게 성장한 상황.

자칫하면 내전으로 무림맹이 통째로 갈라질 판이었다.

"신교를 움직여서 주요 무력대를 밖으로 유도하는 건 어떻습니까?"

의견을 낸 건 각주인 태운.

"지금처럼 간만 보는 것이 아닌 대대적인 움직임이라면 맹에서도 대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가장 힘이 강한 허선의 세력이 선두에 설 터. 그때 상황을 공표하고 다른 이들의 힘을 빌려서 허선을 제압하도록 하죠."

"으음. 계획은 좋으나 신교가 우리 뜻대로 움직여 주겠소?"

"방법은 있습니다."

"방법이?"

"그 건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최대한 빠르게 호응을 유도하겠습니다. 그사이에 여러분은 다른 협력자를 확보해 주십시오."

태운을 제외한 나머지의 시선이 빠르게 오고 갔다.

방법은 의문이었지만, 지금은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수긍했다.

"해와 달이 있으니 우리는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태운은 일월교의 신자였다.

#

허선은 초조함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이미 신교와 소명회를 박멸하고 무림맹의 깃발을 꽂았어야 한다.

후에 수정된 계획을 기반으로 해도 자신만큼은 새로운 판의 정점에 올라야 한다.

하지만 뭔가.

흑기를 통한 토벌은 실패하고 적은 재집결했다.

게다가 휘문가에 숨겨둔 혼천의 핵심 지부까지 털린 상황.

그로서는 무엇 하나 편할 것이 없었다.

"맹주,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누구냐? 들어오라 해라."

때맞춰서 찾은 손님.

허선의 손짓에 장포 차림이 인물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과 밖을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으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렇게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이번 경우라면 그 특별함은 혼천.

"어르신께서 무어라 하십니까?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합니까?"

"걱정할 것 없다 하십니다. 흑기를 재집결하여 마교를 토벌하는 것에 힘을 보탤 테니, 지금은 대치만 유지하라고 하십니다."

"휘문가의 이야기는 들은 겁니까?"

"그 점도 크게 우려할 건 없다 하십니다. 전부 마교에 홀린 배신자로 치부하고 처단하면 그만. 맹주 직위만 굳건하게 지킨다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 그렇군요. 그래요. 내가 맹주인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허선이 배에 힘을 딱 주고 웃어 보였다.

어떻게 얻은 맹주 직위인데, 고작 이런 식으로 뺏길 수는 없었다.

‘내가 맹주야. 내가 맹주라고.’

주문처럼 읊조렸다.

둥. 둥. 둥. 둥.

"뭐, 뭐야!?"

하지만 때맞춰 울린 북소리에 평정은 유리처럼 깨졌다.

발걸음 소리가 요란스럽게 퍼지고 이내, 맹주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시뻘게진 얼굴로 다급하게 뱉는 소식은……

"마교의 기습입니다!!"

"큭!"

가장 듣기 싫은 그런 소식이었다.

#

왜 이렇게 되었는가.

질문에 대한 답을 허선은 알지 못했다.

마교의 기습은 그저 도발의 일종.

이에 응하는 무림맹도 같은 수준의 행동에 불과했다.

앞뒤 상황이 불확실하니 일단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초점을 맞췄을 뿐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예상과 달랐다.

마교의 공격은 격렬했고, 이를 막기 위해서 무림맹도 전력을 다해야 했다.

병력이 대거 빠져나가 싸움에 들어갔고, 안은 소수의 사람만 남았다.

"허선 맹주. 아니, 배신자 허선. 당신을 정도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그 틈을 배신자들이 찌르고 들어왔다.

휘문가에 잡아넣었던 고수 중 일부였다.

맹에 남은 몇몇 놈들과 손을 잡고 감히 반역을 일으키고 있다.

마교를 맞서서 맹의 용사들이 혈투를 벌이고 있는 이 시점에.

"이 비열한 놈들! 마교와 손을 잡고 이런 수작질이란 말이냐!"

"허튼소리는 집어넣어! 네 악행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혼천과 결탁하여 무림명숙들을 납치 및 감금하고 이를 사욕으로 이용하려던 죄! 목숨으로 갚아도 부족하다!"

"그런 속임수 따위에 당할 것 같아? 너흰 그저 시기할 뿐이야! 고를 받고 중소문파의 무인들이 고수가 되니까 그게 무서울 뿐이지!"

아직 제법 많은 이들이 남아 있다.

고를 취해서 한계 이상의 힘을 얻은 중소문파의 무인들이다.

쓰고 버릴 패에 불과하지만, 지금은 충분하다.

수의 부족을 채우고 상황을 무마할 수단.

어떻게든 이번만 넘기면 혼천이든 흑기든 기회는 충분하다.

"소림의 고승이란 인간이 이렇게까지 타락하다니. 맹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네놈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

"……흥. 소림이 무슨 대수라고. 허울 좋은 수행 따위로 힘이 나오는 건 아니다. 명성이 나오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허공 사형과는 달라. 의미 없는 존경 따위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라고! 반드시 난 중원의 패자가 될 거다!"

"네놈 따위가?"

"……?"

전혀 다른 방향에서 들려온 목소리.

허선의 고개가 부러질 듯 돌아갔다.

그곳에서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있을 수도 없는 인간이 서 있었다.

"아미타불. 빌어먹을 땡중아."

"네가 어떻게!?"

명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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