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책임
명한의 움직임은 이내 무림맹 쪽에도 전해졌다.
숫자가 수백 명을 넘으면 가리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무림맹도 병력을 정비하고 회전을 대기했다.
"하지만 이대로 우리를 순순히 맞이할 리는 없겠지."
바보가 아니라면 노림수는 뻔하다.
변수가 나오기 전에 전면전을 펼치는 것이다.
회전이 시작되면 흑기의 난입도 쉽고, 다른 변수의 유동도 어렵다.
평원의 병력은 전부가 아닐 것이다.
"여기부터는 혼천을 조심해야 해. 상황이 이러하니 그들도 관망할 수는 없을 터."
"진군에 맞춰서 기습을 할 계획이라는 건가?"
"맹과 대치하여 변수를 만들기 직전. 서로의 패를 꺼내기 전에 상황을 난전으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지. 그걸 위한 독수 역시 준비되어 있을 거야."
명한은 지도를 펴고 몇 곳을 손으로 짚었다.
현재, 아군이 평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진군로였다.
숫자가 많으면 협로는 이동이 곤란한 것이 현실.
예측되는 지점은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응하여 우리는 수를 다섯으로 나눌 거야."
"다섯? 뭉쳐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한곳에 뭉쳐 있다면 우리의 변수 역시 한 곳에 있다는 걸 증명하는 꼴이지. 그러니 바구니를 여럿으로 해서 적의 대응을 어지럽게 할 거야."
"으음. 그러면 전력이 약화돼서 위험하지 않아?"
"전력투구라면 그렇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무림맹에 허선의 치부를 공개하기 위한 수단. 다섯 중 거짓은 넷은 버티기만 하면 돼. 그럼 아무리 전력이 나뉘어 있어도 쉽사리 깨지지는 않지."
다섯 중 넷에 ‘X’ 자를 표시했다.
"무림맹. 아니, 허선은 확실히 하나를 찾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못해. 그러니 넷이 막는 동안 하나가 돌파하면 돼."
"그물을 넓게 하여 틈을 찢는다?"
"다섯 중 하나가 돌파하면 무림맹도 응수를 해야겠지. 하지만 난전이 아닌 상황에서 돌파한 무리가 백기를 흔들면 응하지 않을 도리는 없어."
"적어도 그들은 정도 무림맹이니까."
"그래. 그래서 다섯으로 나누는 거지."
주변 눈치 때문이라도 응해야 한다.
그러면 그때 허선의 치부를 공개하면 그만.
아무리 맹이 한계에 몰렸어도 같은 정도 인사들을 납치, 감금한 허선을 용서할 가능성은 없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어떻게 해?"
"그때는 그 나름의 방법이 또 있지. 너무 걱정하지는 마."
계책은 공표했고 남은 건 실행뿐이다.
불안함을 잠재우며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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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허선의 치부를 공개할 증인이었다.
휘문가에서 구출한 이들 중 공신력을 가질만한 인물은 셋.
명성이 높고 얼굴이 많이 알려져서 말에 힘이 실릴만한 사람이었다.
이들을 다섯 중 어디로 묶는가가 쟁점이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선택은 결국 명한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하는 소명회가 증인들을 맡기로 했다.
남은 화산, 무당, 아미, 흑점이 한 무리씩을 담당.
"무운을 빌겠소."
"화산의 정기로 그대를 응원하지."
"무림을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해내야 합니다."
다섯이 다섯 방위로 각기 진군을 시작했다.
"맹주님.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무림맹의 허선에게도 전해졌다.
다섯씩 다섯 진군로.
본래의 계획과는 어긋났지만, 이것도 상관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본(本). 남(南). 그의 전언도 함께 도착했습니다. 응할까요?"
"익일 자시. 발을 묶어 두면 공을 높이 사겠다. 이리 전해라."
"네, 맹주님."
판세에는 영향이 없기 때문.
흑기의 등장으로 세력이 갈린 이상 범인은 판도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무림의 정의는 누가 뭐라고 해도 무림맹.
내부적 잡음이 있어도 상황만 정리하면 모두 쏙 들어갈 목소리에 불과했다.
"맹의 모든 이들에게 전해라. 악을 뿌리 뽑을 시간이 다가왔으니 준비하라고."
충만한 자신감.
불어오는 바람은 정도의 것이었다.
#
시작은 무당파가 진군한 협로에서였다.
길이 좁아지고 수풀이 무성해지는 지점에서 불이 붙고 화살이 날아왔다.
일찍이 준비하고 있던 막천우는 검수를 전면에서 세워 무리를 천천히 뒤로 물렀다.
기습에 허둥대는 것보다는 지공으로 받아내는 것이 무당의 방식이었다.
싸움은 격렬해지지 않고 차분하게 흘러갔다.
기습의 묘리는 어디까지나 혼란에 있는 법.
무당의 대응은 이를 잠식시키기에 충분했다.
"흑점과 아미파 쪽에서 봉화입니다. 아. 화산도 시작했군요."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기습이 시작되었다.
기습에 대한 신호로 쏘아 올린 봉화는 멀리서도 뚜렷했다.
이것으로 명한이 상정한 상황의 첫 번째 단계는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이제 남은 건 우리인가?"
"노림수가 있다면 같은 시간에…… 온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었다.
명한 쪽으로도 기습이 시작되었다.
바람을 타고 떨어진 불화살에 불이 수풀로 옮겨붙고, 소리 없는 화살이 쉼 없이 날아왔다.
하나하나 고수의 솜씨가 아닌 것이 없었다.
명한 일행은 절대적으로 소수였기 때문에 무당처럼 방어는 불가능했다.
개개인의 역량으로 이를 방어해 나갔다.
"……저 뒤다. 뒤의 무리를 노려라!"
"소백과 은소소는 무시해라. 저 뒤의 놈들을 노려!"
기습을 나온 이들의 목적은 뚜렷했다.
명한 등과 함께 온 장포 차림의 인물들이었다.
휘문가에서 구해온 증인이 맞다면 그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들의 목표는 달성.
순식간에 공격 방위를 나눠서 뒤를 노렸다.
"흥.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뻔한 노림수에 당할 명한이 아니었다.
"이, 이건!? 독이다!"
"바닥에 독이 가득이다! 피해!"
"젠장! 독수를 쓰다니!"
일행에는 독의 명수인 귀의와 칠채향을 가진 명한이 있다.
사방에 독을 깔아서 후위를 노린 암습자들을 걸러냈다.
선두에서 설치던 놈들은 독에 중독되어서 그대로 절명.
남은 이들도 쉬이 다가가지 못하고 발이 묶였다.
"목숨은 살려줄 테니 물러나라."
"……큭."
뒤집힌 전세.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무림맹. 허선만 끌어내면 족해. 굳이 여기서 목숨을 걸 이유가 있나?"
"……"
은근한 목소리가 암습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안타깝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소."
하지만 그때.
전혀 뜻밖의 목소리가 상황에 끼어들었다.
동시에 풍기는 매화향.
향이 독을 씻어내며 주변에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이런 재주가 가능한 것은 단 한 명뿐이었다.
"악무군?"
"이거 민망한 상황이구려. 이들이 통했다면 이렇게 대면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설마, 배신한 건가?"
"배신이라기보다는 실리를 따라간 거지. 회주, 그대가 우리에게 준 도움은 잊지 않았으나 황가가 개입하는 판에 끝까지 가기는 힘들지."
악무군과 화산의 무인들이었다.
쏘아 올린 봉화도 맞섰다는 암습자도 모두 거짓이었다.
그 모두가 그와 함께 명한 일행을 포위했다.
"악무군, 이 더러운 놈! 어떻게 배신을 할 수 있지!?"
"하하. 화내지 마시구려, 은 낭자. 얄팍한 의리 때문에 화산을 멸문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지 않소. 허선의 상태가 이상한 건 이해하지만, 그의 논리가 전부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이번 기회가 아니라면 언제 또 마교를 몰아내겠소. 시류를 읽는 것도 능력이라지. 난 그저 나은 곳에 도박을 걸었을 뿐이라오."
"하!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군! 화산을 두고 부끄럽지도 않은 거냐!?"
"꽃은 피기 위해 지는 법. 오늘의 부끄러움은 훗날의 매화를 위한 약식일 뿐이오."
"이……! 입만 산 배신자!"
은소소의 분노가 검으로 이어졌다.
번개 같은 검격이 악무군의 목을 노리고 쏘아졌다.
하지만 호락호락 당할 악무군이 아니었다.
절정에 이른 화산의 검으로 이를 빗겨내고 다른 화산 검수의 도움을 받아서 되레 기세를 역전시켰다.
압도하지 못하면 수에 장사 없는 건 불변의 진리였다.
"나쁜 말은 안 하지. 쓸데없는 분란의 씨앗은 우리에게 넘기고 항복하시오."
"그게 네 진의인가, 악무군?"
흥분한 은소소를 물리고 명한이 앞으로 나섰다.
"혼천이니 뭐니 장황한 이야기는 됐소. 어차피 천인들의 세상은 그들의 이야기. 우리가 사는 곳은 이곳, 속세라오. 힘을 가진 것이 누구이고, 기세를 탄 것이 누구인가. 저울질을 아무리 해봐도 그대에게는 승산이 없소, 소백."
"처음 봤을 때부터 속물 같더니. 여전하군, 악무군."
"하하. 어쩌겠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인 것을."
"그 말에는 십분 공감하지만…… 너는 한 가지를 오판했어."
"오판?"
명한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후위에서 잠자코 있던 무리가 장포를 벗어던졌다.
본래 예상하기로는 휘문가에서 구해온 증인들.
하지만 장포를 벗은 그들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개방!?"
"다섯 중에 반드시 증인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 생각했겠지. 하지만 나 역시 이 복잡한 무리에 배신자가 섞여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바라서. 그게 당신이라는 건 조금 의외였지만, 상관은 없어. 우리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증인은 무림맹에 접근하고 있을 테니까."
"소백, 네놈이……"
"화산의 정기도 갈 데까지 갔군. 매화향 대신에 악취라니."
"큭! 웃기지 마라! 아무리 증인을 빼돌렸어도 그들끼리 무링맹에 무사히 접촉할 수 있을 것 같아!? 허선이 미리 처단할 거다!"
"그럴 정신이 있다면 그렇겠지."
품에서 작은 서신 하나를 꺼내든 명한.
희미하게 찍힌 직인은 강유의 것이었다.
"지금 즈음 무림맹은 신교의 견제를 받아서 혼란스러울 거다. 허선 입장에서도 죽을 맛이겠지. 본래의 목적대로라면 마교를 타도한다고 전력으로 응해야 맞는데, 신경은 전부 이쪽에 쏠려 있으니까. 제대로 맹이 통제가 될 리가 없지."
"거, 거짓말! 대체 언제 그런 수작을 부렸다는 거냐!?"
"내가? 이건 내 수작이 아니야. 강유가 전해온 일방적인 통보지."
"……뭐?"
"행동을 읽고 다음 계획을 고려하며 발맞춰서 움직인다. 신교 제일의 후계자라 불리던 강유라는 인물이다. 우리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과 동시에 맹을 압박하기 시작한 거지."
악무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름대로 고심해서 한 선택이 말 한마디 없이 간파당한 셈이다.
분노와 함께 질투심이 들끓었다.
"상관없어. 여기서 네놈을 처리하면 허선이 내려오든 말든 관계없는 일이야.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지.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
"무림맹주 악무군. 그 이름을 탐하는 건가?"
"어차피 누구나 정상을 탐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소명회라는 허울뿐인 이름으로 세력을 규합한 것도 맹을 대신한 무림의 정상을 노린 거잖아!"
"하여튼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내가 고작 무림의 정상 같은 걸 탐할 사람으로 보이나?"
"고작?"
"그게 너와 내 차이라는 거다. 그러니 그런 얄팍한 셈으로 나를 배신했겠지."
시간은 끌 만큼 끌었다.
명한이 눌러 두었던 기운을 몸으로 표출했다.
사방 모든 영역이 그 힘에 짓눌려서 비명을 내질렀다.
매화향은 지고 꽃잎은 시들었다.
"화산은 오늘 이곳에서 진다."
절대적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