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격준비
백 명의 죽음.
백 명의 무게.
아무리 명한이 강인한 모습을 취한다고 해도 결코 가볍지 않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쟁터에서 왜 군인들이 무너지겠는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잊지 못하고 정신이 병들겠는가.
죽음은 영혼을 갉아먹게 돼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은소소는 알고 있었다.
"……"
선택의 결과를 그가 지게 하면 안 된다.
지킨다는 건 그 사람의 육체만이 아니다.
정신과 신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용기도 함께 지켜줘야 한다.
백 명의 죽음을 어깨에 얹는다면 주저앉을 수도 있다.
그건 그를 지키기 위한 검이 용납해서는 안 되는 일.
손이 허리춤의 검으로 내려갔다.
"나는……"
막 명한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
짧은 마찰음과 함께 검이 검집 밖으로 밀려 나왔다.
베는 건 휘문종월.
실패로 인한 결과를 안는 건 은소소 자신이었다.
이걸로 명한이 원망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지키는 검의 숙명은 그런 거니까.
"택하지 않는다."
"……!"
하지만 무언가 그녀의 몸을 제지했다.
이건 인과의 띠.
은소소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흔들렸다.
"두 명은 괜찮지만 백 명은 안 된다는 겁니까? 그거참 편리한 판단이군요."
"아니.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내 곁의 사람이 슬퍼하는 모습이 보였거든. 나는 그런 꼴을 보고 싶어서 이 바닥을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야."
"그럼, 저 백 명은 아무런 의미 없이 죽어야겠군요."
"내 말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군. 나는 선택하지 않아."
"무슨……?"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지."
순간, 은소소를 묶고 있던 인과의 띠가 풀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닥에서 수백 가닥의 강기 다발이 치솟았다.
이는 묶여 있는 백 명의 고리를 끊고 틈을 만들었다.
움직일 틈.
"죽어――!"
은소소의 검이 거리를 격하고 휘문종월의 가슴을 베었다.
앞섬이 갈라지고 붉은 피가 튀었다.
당황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표정.
고소를 머금으며 은소소의 검이 이격을 이어갔다.
팔과 허리춤의 옷자락을 베며 그를 구석으로 몰았다.
"이런 식으로 도망치는 겁니까, 공자!!"
"나는 선택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것도 내 선택이지. 우연이. 아니, 필연이 나를 돕는다면 그 답이 있을 거라고도 믿었다. 그리고 보다시피 내게는 하늘의 도움이 있더군."
명한의 옆으로 내려서는 건 화무천과 연연.
두 사람이 납치당한 이들을 쫓던 굴은 휘문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정확한 시기에 정확한 방위를 노린 공격은 서로를 감지한 명한과 화무천의 합공.
백 명을 모두 살리는 길은 그것밖에는 없었다.
말마따나 하늘이 도운 결과였다.
"위선자! 두 사람은 거침없이 죽여놓고, 백 명은 아니 된다는 겁니까!?"
"내가 두 사람을 죽였다고? 확실해?"
"무슨? 두 사람의 경맥이 끊기는 걸 내가 확인했습니다!"
"글쎄. 너는 좀 더 신중했어야 해."
명한이 주먹을 움켜쥐며 기운을 회수했다.
그러자 쓰러져 있던 중년인과 아이가 숨을 토하며 깨어났다.
칠채향을 섞은 기운이 경맥을 차단하고 죽음을 위장해 두었던 것이다.
귀의 수준의 명의가 살피는 것이 아니라면 확신이 어려운 위장이었다.
휘문종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도 고작 그런 인간이었군!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겁쟁이야!"
"개소리는 집어치워. 내가 택한 길의 결과라면 그게 무엇이라도 감내할 각오가 돼 있어. 하지만 이런 장난질 따위에 어울려 달라고? 너 대체 몇 살이냐? 아직도 어미 젖이 필요해?"
"이, 이이……!!"
"어른들 노는 곳에 아이는 오지 말라고."
"죽여버리겠다!!"
확 돌아버린 휘문종월이 검을 뽑았다.
코앞까지 닿아 있던 은소소의 검을 쳐내고 반월 형태의 검기를 뿌렸다.
그 위력은 팔반의 수준.
하지만 그 너머에는 닿지 못했다.
명한은 양손을 마주치는 것으로 모든 검기를 상쇄했다.
부서지는 기의 파편에 휘문종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 어떻게?"
"이런 골방에 박혀서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있으니 그런 거다. 밖을 봐라. 넘치는 것이 고수고 나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들이 모래알처럼 많다. 네 그 얄팍한 사상 따위 아무것도 아니야."
"웃기지 마! 세상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절대적이라. 대체 누가 그 절대적이라는 기준을 정하지? 결국, 제멋대로 아닌가? 세상은 유동적이고 멈춰있지 않아. 그렇게 딱 붙어서 남이 정해주는 선 따위에 휘둘리는 네놈 따위는 결코 알지 못하겠지."
"닥쳐! 닥쳐!! 네놈은 아니다! 네놈은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없어!"
"멍청하긴. 난 그런 걸 바란 적 없어."
명한의 눈이 차분하게 주변을 훑었다.
묶여 있던 백 명은 모두 풀려서 안전한 곳으로 피했다.
화무천도 연연도.
이곳까지 따라왔던 모두 역시 마찬가지.
깊은 안도와 함께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네 죽음의 무게는 가벼울 것 같다."
천의무봉 ― 절(絶).
명가의 끝은 그렇게 간단했다.
#
지하에서 수백 명의 사람이 발견됐다.
개중에는 권왕과 비슷한 처지의 고수도 여럿이었다.
가족이나 지인 등이 납치된 터라 무력하게 갇혀 있던 사람이 많았다.
전부 풀어주고 사정을 설명했다.
"태사, 잔당은 모두 정리했습니다."
그사이, 흑점의 일부와 개방이 휘문가의 잔당을 처리했다.
정원 내부에 숫자가 적었던 건 대부분이 지하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
굴을 이 잡듯이 뒤져서 전부 잡아 왔다.
"수고했어."
"다만, 한 가지 문제가……"
"관인가?"
"네."
소탕까지 걸린 시간은 얼추 두 시진.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소란을 접한 성의 관병들이 우르르 몰려와 저택을 포위했다.
개개인은 대단할 것 없는 실력이지만, 숫자가 많다.
게다가 여기서 힘으로 일을 해결했다가는 나라와 정면으로 대척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너희는 일단 땅 아래 굴을 통해서 빠져나가라. 이곳은 내가 처리하마."
"노 선배……"
"관과 무림의 관계가 깨어져서는 안 된다. 너희는 살아남은 이들을 끌고 허선을 자리에서 끌어내려라. 흑기의 일은 그다음이다."
"개방은 어쩔 생각이십니까?"
"클클. 어차피 밑바닥 거지새끼들이다. 여기서 구르나 감옥 가서 구르나 비슷하겠지. 우리를 잡아간들 관에서 뭘 어쩌지는 않을 거다. 넌 일단 벗어나는 것에 집중해."
툭툭. 어깨를 치는 노걸개의 말에 명한이 끄덕였다.
여기서 정말로 관과 정면충돌하면 답이 없다.
그렇다고 오해라며 증거를 들이미는 것도 의미 없는 행동.
추적하고 있는 흑기만 불러들일 뿐이다.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선배님을 구하러 오겠습니다."
"클클. 다 중원 무림을 위한 일이다. 젊을 때 하지 못한 것을 이리 늙어서라도 할 수 있으니 기쁘다고 해야겠지. 남은 건 네게 맡기마."
"……기대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명한은 깊은 포권으로 인사를 건넸다.
누군가를 위한 희생. 아픔을 감내하는 선택.
휘문종월이 부르짖던 모든 것이 여기에 있었다.
#
다음 선택이 중요했다.
현재 명한 쪽 무리는 소명회를 필두로 한 연합.
당장은 무림맹에 대한 반감으로 동행에 거부감이 적지만, 이 상황이 길어지면 결국 갈라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 뒤는 황가의 흑기라면?
이건 이미 찢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계획은 단순합니다."
명한은 성을 벗어나 작은 뜰에 도착하여 야영지를 펼쳤다.
민가에 흩어져 있던 무리를 모을 시간도 필요했고, 다음 계획을 정리할 시간이기도 했다.
악무군 등 각파의 수장들이 응집.
화무천과 연연은 조금 일찍 무리에서 떨어졌다.
―― 내 얼굴을 아는 이가 하나라도 있다면 곤란해진다.
조언을 따른 행동이었다.
"파악한 바에 따르면 현재 무림맹은 이곳, 백석평원에 모여있다고 합니다."
"백석? 예상외로 움직임이 적군요."
"흑기의 난입으로 신교와 갈라진 덕에 의견충돌이 일어난 모양입니다. 무림맹 내에서도 신교를 쫓자는 쪽과 우리를 쫓자는 쪽으로 갈린 거지요."
"허면, 흑기는?"
"이곳. 협곡에서 마지막으로 목격이 됐다고 합니다. 우회하여 평원으로 들어올 수도 있고, 후방으로 빠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략적인 움직임이라 이거군요."
명한이 끄덕이며 종이를 치웠다.
흑점의 정보력이 아무리 좋아도 기마대를 쫓는 건 무리였다.
모습을 보여준 것도 혼란을 주기 위한 포석.
모습을 드러낸다면 바로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건 무림맹의 와해입니다. 휘문가의 지하에서 구한 분들이 적극적으로 증언한다면 무림맹 내에서도 허선을 다시 생각할 터. 그를 맹주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혼천과 연계된 부분을 모두 도려내야 합니다."
"그게 말처럼 쉬울까요? 혼천이 내민 고를 취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렵겠지요. 하지만 이대로 두면 무림맹은 혼천의 꼭두각시가 되고 맙니다. 흑기를 동원하여 무림의 핵심 인사들을 대거 정리하고 뜻에 맞는 이들만 심어두려는 속셈이지요. 그때가 되면 무림이라는 이름은 무의미해집니다."
"무림의 말살이라……"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허선을 끌어내려야 합니다."
모든 조건 중 첫 번째.
구심점이 없으면 맹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맹이 해체되면 흑기는 어쩝니까? 그들은 어디까지나 황명을 움직이고 있는데."
"……흑기의 목적은 금장가에서 일어난 일을 무위로 돌리는 것. 무림맹과 관계없이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겠죠."
"그럼 의미 없는 일 아닌가요?"
"아뇨. 맹이 없어서 뒤를 편히 하고 금장가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금장가로? 황가에서 노리는 것이 그곳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명한이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였다.
이다음부터는 자칫 ‘구족멸문’의 명분이 될 수도 있는 정보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고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노릇.
이내, 입술을 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전대 황제가 말입니까!?"
"그분은 이미 돌아가신 것 아니었습니까!?"
"맙소사. 도력제라니."
제아무리 대문파의 수장이라도 이건 버거운 정보였다.
당황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허면, 금장가로 가는 것이 더 위험한 일 아닙니까?"
"황가에서 마음을 먹었다면 어디로 가든 위험한 건 동일합니다. 말로 아무리 외쳐봐도 들어먹지 않겠죠. 해서 전 과격한 수를 쓸까 합니다."
"과격한 수?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네. 도력제를 모시고 황가를 협박할까 합니다."
"……네?"
"황가를 어쩐다고요?"
체면마저 잊고 쇳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만큼 명한의 제안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관과 무림의 불가침 조약은 어디까지나 황가에서 양보를 한 것.
서로의 관계는 절대로 평등한 것이 아니었다.
무림인이 황가를 협박한다.
상상조차 못 해본 일이었다.
"도력제의 생존. 정확하게 그의 존재는 황가의 치부입니다. 이건 황족과 황가 전체에게 부담되는 일이지요. 설득이 안 된다면 이 존재의 공표를 무기로 황가를 협박할 생각입니다."
"제정신이 아니군요."
"그 어느 때보다 제정신입니다. 고작 옛일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려는 것이 황가의 뜻이라면 이쪽도 막 나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관과 무림이 왜 불가침의 관계였는지. 그 사실을 보여줄 겁니다."
명한의 호기로운 말이 주변의 당황을 잠재웠다.
크건 작건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무인.
호기만큼 이들을 울리는 명분도 없었다.
"좋소! 나 막천우는 소 회주를 지지하리다!"
"하. 하하. 이거 제대로 된 선을 탄 건지 의문이군. 화산의 악무군도 회주의 뜻을 따르도록 하겠소."
"……이 마당에 저희만 빠질 수야 없지요. 아미파도 함께 하겠습니다."
반격의 결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