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문가
금색으로 온몸을 장식했다.
머리를 장식한 수술부터, 치렁치렁 늘어지는 도포도 마찬가지.
신발도 요대도 모두 금색이었다.
이게 무슨 꼴.
명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클클.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지 잘 어울리는구나."
"하아. 이게 꼭 필요하다 이거죠?"
"휘문가는 일대 도성에서는 명망이 높아. 어중간한 상대와는 접견을 허락하지 않지. 황금을 관 단위로 가지고 노는 거부가 아니라면 출입이 힘들 거다."
"그 거부가 저라는 거군요."
햇빛을 받아서 반짝이는 장식에 명한이 눈가를 찌푸렸다.
이런 화려함은 아무리 그래도 취향이 아니었다.
"쿡쿡. 과하긴 하지만 보기에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소소. 남 일이라고 그렇게 말하기야?"
"난 호위무사니까. 내가 지켜야 할 도련님을 칭찬하는 것도 의무 아닐까?"
"마, 맞아요! 도련님 나쁘지 않아요! 머, 멋있는걸요!"
"둘 다 아주 신이 나셨군."
소소는 호위무사로 향아는 평소처럼 시종을 맡았다.
큰 전쟁의 옆길로 새어 나와 잠시 숨 돌리는 것이 편한 모습이었다.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고, 옷매무새를 다잡았다.
"안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난 뒤에 바로 움직이는 겁니까?"
"저택 주변으로 우리 애들을 심어두고 있네. 저 안에 사람들이 갇혀있음을 확인하면 곧바로 밖에서 소란을 일으켜주지."
"성동격서의 병법대로 하자는 말이군요."
"신중해야 하네. 휘문가가 명문이라 안과 밖을 지키는 병력이 많은 것도 있지만, 까딱 잘못하면 잡혀있는 자들의 목숨을 건사하기 힘들어."
생명의 무게도 무게고, 실수하면 증거가 사라진다.
허선이 정도에서 어긋난 짓을 했다는 걸 증명하지 못하면, 무림맹의 폭주는 막지 못한다.
황궁과 흑기는 그 뒤의 문제.
‘아마도 이건 금장가와 이어져 있겠지.’
천기를 통한 예감이 찔릴 듯 강하게 느껴지지만, 지금은 눌러두었다.
여기서는 구출이 먼저였다.
"그럼, 거상의 역할은 준비됐나?"
"준비고 뭐고…… 전 원래부터 부자라서."
금색 옷깃을 탁 튕기며 명한이 앞장섰다.
바짝 세운 턱 끝은 이미 오만한 거상이었다.
#
휘문가는 역사가 깊은 정도의 명문가다.
객을 함부로 받지 않고, 뜻을 나누는 것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그들의 세 가지 원칙은 이렇다.
누구나 감탄할 만큼의 재주가 있거나, 고매한 인성으로 만인의 인정을 받거나, 최고로 평가받을 정도의 업적을 이루었거나.
이 중 명한이 택한 건 세 번째였다.
"그대가 오월상단의 상단주라 이거요?"
일행을 마중 나온 백의의 중년인.
자신을 총관이라 소개하며 접견 전 짧은 대화를 요구했다.
"그렇소. 이번 대 오월상단을 책임지고 있는 묵이라 하오."
"묵이라. 처음 들어보는 이름입니다만."
"상단을 넘겨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당연할 거요. 그래도 딱히 걱정할 건 없소. 내가 오월상단의 주인인 건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 있으니까."
"어떻게 말이오?"
"뭐…… 간단하게 이런 건 어떻소? 최근에 산 항주의 백경루라는 기루요. 이걸 선물로 드리지."
"백경루?"
항주의 명물이자, 물길의 접점에 위치한 금을 낳는 거위.
건물 하나에서 변방 도시만큼의 금을 뽑아낸다고 알려진 알짜 중 알짜였다.
"이렇게 말하면 우스울 수 있으나 돈은 넘치도록 있소. 백경루? 몇 개든 드리지. 내가 원하는 건 세간에 알려진 휘문가의 명성이오."
"으음. 백경루에 대한 걸 확인할 수 있겠소?"
"확인하고 나면 알아서 처분하시오."
명한은 그대로 봉투 하나를 던졌다.
전창소를 통해서 전해 받은 물건이었다.
전면에 찍힌 낙인과 안의 계약서는 한 점의 거짓도 없었다.
총관 역시 숱한 직인과 날인을 봐 온 인물.
이 계약서가 가짜가 아니라는 건 한눈에 알아봤다.
"으음. 이건 확실히 진짜구려."
"휘문가의 이름 앞에서 거짓을 말할 배짱은 없소. 호의로 가져온 선물이니 잘 넣어 두시오."
"그리 덜컥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건 일단 주인께 전달해 드리지요."
"그리하면 나야 고맙겠소."
"……그럼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역시 현물만큼 좋은 무기도 없다.
총관의 태도가 전보다 깍듯해졌다.
물러나는 잔걸음에서 약간의 초조함과 흥분도 느껴졌다.
"어때, 괜찮아 보여?"
"잘 어울려요, 도련님."
"그래. 그래. 완전 딱이야. 재수 없는 상가 도련님 같아."
"그건 칭찬이냐?"
가벼운 농으로 긴장을 풀고 주변을 훑었다.
고풍스럽게 꾸며놓은 정원 주변으로는 딱히 별다른 경계의 인원이 없었다.
굳게 닫힌 정원 입구를 제외하면 폐쇄적인 느낌도 아니었다.
정말로 이 안에 납치한 자들이 있는 걸까.
그런 의심이 스쳐 갈 정도였다.
"호오라. 오월상단에서 나오셨다?"
하지만 그 생각은 차 한잔 마실 시간이 지난 후에 싹 사라졌다.
총관과 함께 정원으로 걸어들어오는 한 중년인 때문.
‘같은 냄새.’
흑면이나 백면.
혼천의 가면들과 맞닥뜨렸을 때 풍긴 것과 같은 냄새였다.
오래 묵은 황제의 피와 뒤섞인 오물의 악취.
"처음 뵙겠소. 휘문종월이라 하오."
이곳이 정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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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
상 위로는 호화로운 음식이 올라가고 각종 미주가 빈 곳을 채웠다.
은은히 풍겨오는 향은 오감을 자극했다.
황궁이 부럽지 않을 정도의 환경이었다.
"오월상단의 명성은 일찍이 들어왔습니다. 공격적인 확장으로 중원 각지의 상관을 휘어잡고 있다던데. 설마, 그 상단의 주인께서 이리도 젊은 분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나이는 젊지만, 상단은 오롯이 제 것이라 자부합니다. 경쟁 상단을 집어삼키고 오월상단을 키운 것도 제 역량이죠."
"호오. 비밀에 싸여 있던 오월상단의 비밀이 젊음이었군요."
"가끔은 패기가 경험을 누르기도 하는 법이죠."
"하하. 옳습니다, 옳아요."
휘문종월의 웃음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그는 꽤 호방하고 격 없는 태도로 명한을 대했다.
거대 상단주라고 해도 나이는 반절도 되지 않는 상대라면 조금은 낮춰볼 만한데, 그런 기색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럼, 그 패기가 이번에는 어떤 기회를 제공하던가요? 휘문가의 무엇을 보고 이리 먼 걸음을 하신 건지 알고 싶군요."
"명성. 아니, 정확하게는 그 명성을 쌓은 방식이 궁금하더군요. 넘치는 건 돈이니, 금으로 그 방식을 좀 살까 합니다."
"호오. 명성의 방식이라?"
"듣기로 휘문가는 독특한 가풍과 그에 맞는 훈육법을 지녔다고 압니다. 가능하다면 그것을 제 눈으로 보고 싶군요."
명한에게 필요한 건 시간과 안을 둘러볼 기회.
조건만 채워지면 빼어난 감각으로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과연. 천하를 주름잡는 상단의 주인께서는 구매 목록도 독특하구려."
"돈으로 사지 못할 건 없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장사치들이 갈망하는 건 타인의 인정. 명성. 공경 따위가 있겠지요. 그걸 돈으로 사보고 싶습니다."
"쉽지 않은 걸 쉬이 말하는 것이 묵 상단주의 특기인가 보군요."
"어렵다면 더 많이 지불하면 그만이니까요. 어떻습니까? 가능할까요?"
명한의 태도는 확실하게 거상의 그것이었다.
오만한 시선 속에는 금력 만능주의가 깔려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소소 등이 속으로 감탄할 정도였다.
하지만……
"가능은 합니다만…… 전 금이 아닌 다른 것으로 대가를 받고 싶군요."
"금이 아닌 다른 것?"
"기회입니다."
툭. 휘문종월의 손가락이 탁자를 두드렸다.
그러자 물결처럼 기묘한 힘의 파동이 주변으로 번지며 정원을 흔들었다.
평화롭기만 하던 분위기가 일순간이 돌변했다.
범의 아가리 안에 들어온 살벌함.
"소명회의 소백 공자님과 명운을 주고받을 기회입니다."
"……"
이미 휘문종월은 알고 있었다.
명한이 누구인지 어떤 이유로 찾은 것인지.
상인 흉내는 의미 없는 장난에 불과했다.
"언제부터 알았지?"
"이래 봐도 정보에는 꽤 밝은 편입니다. 그런 촌스러운 금장으로 치장을 해도 공자의 얼굴을 다 가리기는 어렵지요. 너무 잘생긴 것도 불편한 겁니다."
"알면서 가지고 논 건가?"
"주인으로서 손님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도 도리겠죠. 적당히 장단을 맞춰 드렸을 뿐입니다. 그리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시기를. 공자께서도 제법 즐기지 않았습니까."
"……쯧."
무의미한 짓이었다.
명한이 치렁치렁 달고 있던 장신구를 전부 벗어서 던졌다.
"회담에서의 사건 이후로 흑기를 피해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설마, 대범하게 성으로 들어와 저를 찾을 줄이야. 확실히 젊음의 패기는 무시하지 못하겠군요."
"이쪽도 상황이 만만치는 않아서. 역으로 치고 들어가면 패 하나는 쥘 것 같았지. 설마, 이곳의 주인이 완전히 그쪽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어."
"명망 높은 정도의 휘문가니 적당한 협력자일 것이다…… 그리 판단했습니까?"
"아니었나?"
"아닙니다. 휘문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천의 일부였습니다."
직접 혼천을 거론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혼천이 하는 짓을 생각하면 그리 밝히는 게 정답은 아닐 거 같은데?"
"혼천의 행각이라. 비인도적인 실험이나 문파에 세작을 심어두는 짓. 아니면 죄 없는 이들을 납치하는 행동 말인가요?"
"잘 알고 있네. 정도와는 거리가 멀지 않나?"
"하하. 대체 뭐가 정도고 뭐가 마도일까요. 그런 구분 따위 의미 없다는 걸 공자께서도 잘 알지 않습니까?"
휘문종월의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빛났다.
"중원의 구대문파. 명문세가. 정도 종가들. 백이라 칭하는 이들 중, 그 어디에도 흑이 묻어있지 않은 이는 없었습니다. 그 이름 높은 소림도. 도사들의 성지인 곤륜도. 화신이나 무당도. 모조리 같았지요. 이 무림에 흑과 백의 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의미가 없으니까 아예 갈아엎자는 건가?"
"하하. 설마요. 전 그렇게 과감한 인간이 못됩니다. 그저…… 작게 소망할 뿐이지요. 이 땅에 진정한 의미의 기준이 들어서기를 바라는 겁니다."
"기준?"
"간단한 겁니다. 죄와 죄가 아닌 것의 구분. 정과 마. 악행과 선행 따위가 아닌,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기준입니다. 그것을 행하는 자는 초월적인 의지와 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세력을 지녀야 하죠."
"그게 혼천이라는 거냐?"
이에 휘문종월은 곧바로 답을 하지 않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틀었다.
"저와 내기를 하나 하겠습니까?"
"내기? 갑자기 무슨 소리지?"
"서로 간에 길고 지루한 논쟁을 해 봐야 시간만 잡아먹을 것 아닙니까. 그냥 간단하게 서로가 원하는 걸 걸고 내기로 결정을 지읍시다. 어떻습니까?"
"자세하게 얘기해 봐."
"공자께서 이긴다면 고수들이 갇혀있는 위치를 알려 드리지요."
"이곳이 아니었던 건가? 그럼 반대로 내가 지면?"
"절 도와 혼천의 일익이 되는 겁니다."
죽음이 아닌 회유.
명한은 눈을 좁히며 휘문종월을 바라봤다.
속임수일까 싶지만, 그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좋아. 그럼, 내기의 내용은?"
"선택입니다."
짝. 휘문종월의 손뼉에 정원 좌우 측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각기 다른 복색에 각기 다른 수레를 끌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세 번만 선택하시면 제 패배로 하지요."
수레를 가리고 있던 천이 걷어내졌다.
커다란 쇠창살로 사방이 막힌 감옥과 같은 형태.
그리고 그 안에 갇힌 사람들.
한쪽에는 비단옷의 중년인이 다른 쪽에는 넝마 차림의 아이가 묶여 있었다.
휘문종월의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느 쪽을 살리시겠습니까?"
선택의 의미.
명한은 이제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