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4화 (214/235)

각자의 전장에서

중원 일각의 변화를 알아차린 이는 더러 있었다.

표면에 드러난 세력 외의, 암약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안다고 엉덩이를 뗄 만큼 가벼운 이는 많지 않았다.

한 문파의 수장, 수많은 역학관계의 굴레.

저마다의 이유로 주판만 튕기고 직접 행동을 주저했다.

자유로운 영혼을 제외하면.

"클클클.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격조했습니다, 노 선배님.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젊은 친구들이 노력하는데, 이 늙은이도 거들어야 하지 않겠나. 자네와 헤어지고 난 뒤,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오랜 지인들을 만나서 방향을 잡았네."

"개방입니까?"

"아직은 다 털고 떠날 때가 아니라는 거지. 무림이 우리를 버렸어도 우리는 아직 무림을 버리지 않았네."

허허롭게 웃는 노유곽의 얼굴에는 현자의 빛이 서려 있었다.

중원의 이권 싸움에서 토사구팽된 몸임에도 그 마음의 넓이는 가히 바다와 같았다.

화산의 악무군, 무당의 막천우, 아미파의 백순순도 포권으로 존경심을 표했다.

"일단 내 뒤를 따라오게나. 멀지 않은 곳에 산사람들이 쓰는 길이 있다네. 추격자와의 거리를 벌릴 수 있을 거네."

"상황을 파악하고 계신 겁니까?"

"되바라진 놈들이 중원의 고수들을 납치해서 가두고 있음을 알아차렸네. 그 뒤를 캐다 보니 청홍과 적사라는 조직이 나오더군."

"청홍, 적사. 무림맹의 정보조직 아닙니까?"

"그러니 더 큰 일 아니겠나. 맹주 교체도 의심쩍은 판에 맹의 정보 조직이 그런 일에 동원되는 건 정상이 아니지. 게다가 청홍, 적사에 낯선 이들이 더러 섞여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네. 이 즈음해서 청홍 적사에 다른 무리가 섞였다는 걸 눈치챘지."

"혼천……"

"클클. 그래, 그 이름이네."

노유곽. 그리고 개방은 상당히 깊은 부분까지 도달해 있었다.

최근 들어 서복의 행동이 급해지며 허술한 부분을 노출한 건 맞지만, 대단한 역량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림 제일의 정보조직이라는 옛말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다.

"고수를 잡아간 이유가 뭘까요? 권왕처럼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기 위해서?"

"그것도 그렇지만…… 개방에서는 이를 ‘재편’을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네."

"재편?"

"무림의 재편 말일세."

노유곽의 주름이 깊어졌다.

"중원 각 문파에 잠입한 첩자들의 행동. 신교에 대응한 무림맹의 출정. 맹주의 교체. 이상한 사술을 부리는 맹의 고수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이름 있는 고수들까지. 굉장히 판을 크게 짜고 있어."

"……전쟁으로 싹 다 갈아버린 뒤에 새로운 인물로 채우겠다는 속셈이네요."

"자신의 말만 듣는 꼭두각시로."

"무림맹도 이 학살극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허선은 이를 알고 있는 걸까요?"

"하아. 허선 그 아이는 예전부터 욕심이 강했지. 제 사형인 허공과는 많이 달랐어. 그 아이가 혼천을 등에 업고 탐욕을 부리는 거라면……"

무림맹. 그것도 소림의 인물.

가장 해서는 안 되는 인물의 해서는 안 되는 탐욕이었다.

명한이 답답함을 어금니로 씹으며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허면, 노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방법이라는 건……?"

"맹은 혼란에 휩싸여 있네. 강경한 움직임에 이끌리듯 행동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의문을 품는 이도 적지 않지. 이 고리를 깨뜨리는 건 작은 사실 하나면 충분하네."

"무림맹이 이름 있는 고수를 납치하고 있다는 사실."

"그렇지. 진실은 고수의 검보다 무서운 법이라네."

복잡한 실타래의 빠져나온 실 한 가닥.

지금 잡아야 하는 건 그 작은 실이었다.

#

그르르르릉.

무덤의 비석이 옆으로 밀리며 통로를 드러냈다.

빛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이 이어진 통로였다.

덮어 두었지만, 사람이 왕래한 흔적이 희미하게 나 있었다.

"이곳으로 이어지는 건가?"

화무천이 손으로 먼지를 날리며 물었다.

"제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혼천에 잠입하여 알아낸 정보?"

"최근에는 절 신용하지 않는 듯하더군요. 겨우 흔적을 쫓아서 찾아냈습니다."

정확하게는 명왕도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은근히 거리를 두고 중요 정보를 숨겼다.

연연으로서도 이번 행동은 상당한 모험수였다.

"혼천에 잠입하는 건 그 아이의 요청이었나?"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신께서 사라진 직후. 당시 교의 요직에 앉아 있던 이들 사이에 은근한 긴장감이 생겼습니다. 신구의 불화라고 해야 하려나. 전 불필요한 경쟁을 피해 구실을 택했을 뿐이지요."

"그걸 혼천에서 믿어준 게 다행이로군."

"비슷하게 혼천에 투항한 이들이 적지 않았으니까요."

대대적인 숙청 이후로 첩자가 늘어난 이유였다.

화무천 이후의 천마 행보를 보자면 상당히 강경하고 억센 정책이 많았다.

이에 불만을 가지고 튕겨나간 이들이 상당했다.

지금 돌아보자면 솎아내기였지만, 당시로써는 상당히 불안한 행보였다.

"그 아이는 나보다 강단이 있었지. 아마 천마라는 위치로 보자면 나보다 그 아이가 훨씬 더 어울렸을 거야."

"그리 신경 쓰인다면 돌아와서 살펴볼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하하. 내가 무슨 염치로 말인가. 그 아이에게 있어서 나는 어머니를 배신한 천하의 쓰레기에 불과해. 지금 본다 해도 좋은 말은 안 나오겠지."

"그렇지는 않습니다. 천마는……"

"괜찮아. 장성하여 신교를 이끄는 모습만 봐도 나는 만족하니까."

길어지는 이야기를 화무천이 정리했다.

이미 자신은 신교를 떠난 몸.

주인이 있는 곳에 다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 서두르지. 소백, 그 아이가 급편으로 부탁한 걸 보자면 작금의 일과도 관계가 있는 상황일 거야."

"여전히 핏줄에는 약하군요."

"어쩌겠나. 정에 약한 것이 나라는 인간인데."

"그런 분의 별호가 천하제일악이라니. 우습네요."

"하하. 그 별호를 부르는 건 내 가까운 이들이 아니라네. 내 앞을 막은 자들이지."

화무천이 웃음 끝에 살기를 섞어서 계단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다가오는 어떤 형체가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것이 ‘적’임은 분명했다.

"이렇게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도 오랜만이군. 따라와 보겠나?"

"……이젠 제 뒤를 따라오셔야죠."

"기대되는군."

어둠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

명한 일행은 노유곽을 따라서 산을 가로질렀다.

산사람들만 사용하는 은밀한 길이 있었기에 시간을 단축했다.

산 밖, 작은 공터에 도착해서는 미리 대기하던 개방과 합류했다.

그 숫자가 물경 백은 족히 넘었다.

"너희는 산 주변을 돌면서 추격자들을 교란시켜라."

"네, 방주님."

노유곽은 사람을 움직여 후방을 대비했다.

걸어온 흔적을 덮고, 진행 방향을 교란하는 수법이었다.

명한도 일월과 이월로 하여금 개방을 돕게 했다.

이런 정보조작에는 개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흑점.

두 세력이 힘을 합친다면 따라올 조직은 없었다.

"이제 우리는 휘문가로 가야 하네."

"휘문? 휘문 선생의 본가 말인가요?"

"그래. 한때 강남대협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정의군자, 휘문종월의 가문이네."

휘문가는 명망 높은 정도 무림의 세가였다.

그 명성이 구대 문파와 겨룰 정도고, 신교나 사파의 거목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과거 변란이 발생하면 손수 검을 들고 나서서 싸우고, 홍수나 가문이 발생하면 곳간을 열어 민생을 살피는 곳이었다.

살아 있는 정도의 상징이라 해야 할까.

그 이름 하나로 뭇 사람의 추앙을 받는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설마 휘문가로 흔적이 이어지고 있는 겁니까?"

"말하기는 슬프지만, 모든 정황이 휘문가로 이어지고 있네. 상당히 오래전부터 혼천의 인물과 결탁을 하고 있더군. 무림맹으로 전달된 상당수의 물자 역시 휘문가를 통하고 있었어."

"휘문가가 혼천의 한 축이라 이건가요?"

"글쎄. 축일지 단순히 협력 관계인지는 모르겠네. 하지만 사라진 고수들을 찾으려면 그들의 담을 넘어야 한다는 건 분명하겠지."

"꽤나 부담이 큰일이군요."

"까딱 잘못하면 천하공적으로 낙인이 찍힐 거네. 어떤가, 무서운가?"

"황실의 흑기가 쫓아오는 마당에 공적이 무슨 대수겠습니까."

"클클. 그 마음가짐이네."

휘문가가 아니라 황실 자체라도 이젠 돌아갈 방법이 없다.

칼은 뽑았고 베어야만 한다.

"그럼, 일단 여기서 사람을 나누도록 하게나."

"사람을 나눈다면……?"

"휘문가는 성안에 있네. 이만큼 사람을 끌고가면 관에 곧바로 보고가 되겠지. 우리 처지에 그건 좋은 일이 아니네. 각기 모인, 무당, 화산, 아미파 등은 변복하여 주변으로 흩어지고 몇 명만 성으로 들어가는 거지."

"노 선배님. 소수만 움직이는 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악무군이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보게 악 후배. 이 마당에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네. 자네 화산의 위명도 마찬가지겠지. 선택을 내렸다면, 응당 각오해 주게나."

"……나름대로 승산은 있는 계획이겠지요?"

"면면을 보게나. 여기서 몇 명만 뽑아도 구대문파 중 하나 정도는 너끈하네."

"뭐, 그건 그렇겠군요. 그럼 노 선배만 믿겠습니다."

악무군이 그렇게 물러나자 더 이상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좋아. 그럼 명망 높은 휘문가를 구경이나 해 보자고."

"이대로 말인가요?"

"아, 그렇지. 자네 돈은 좀 있나?"

"……?"

손으로 동전을 그리며 웃는 노유곽.

상황에 맞지 않는.

아니, 어쩌면 상황에 잘 맞는 웃음이었다.

#

붉은색으로 뒤덮인 공간.

두 사람.

아니, 두 존재가 거리를 둔 채 대치하고 있다.

둘 사이의 공간은 그야말로 무(無)로 점철된 이치 밖의 것으로 칠해져 있었다.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고 누구도 끼어들 수 없었다.

"이대로 시간을 끌 생각인가?"

"네가 몸을 돌려준다면 나도 물러나 주지."

"헛된 기대다. 황가의 육체를 얻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다고 생각하지? 나는 이제 자유롭게 황가에 개입할 수 있게 됐다."

"얄팍하긴. 남의 것으로 자랑하는 남자는 볼품 없다."

도력제의 몸을 뺏은 서복과 은휘였다.

두 사람은 금장가에서 만나 쉼 없이 싸웠다.

하지만 시간을 불식한 싸움에서도 쉬이 결판은 내지 못했다.

완벽한 균형으로 대치하는 것이 전부였다.

"혓바닥을 놀려봐도 의미 없다. 혼천의 계획은 내가 없어도 진행되지. 지금 즈음이면 이 땅 위에 수많은 피가 흩뿌려졌을 터. 옛 심장이 다시 뛰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거다."

"그곳에는 내 제자가 있다. 네 생각대로 흘러가지는 못할 거다."

"하하. 소백, 그 어린것 말이더냐? 그래. 네 바람대로 대단한 재능이기는 하다. 그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오른다는 건 역사를 뒤져봐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래 봐야 아직 덜 여문 아이에 불과하다. 전쟁의 광기 속에서 스러지겠지."

"글쎄. 네 생각만큼 그 아이는 무르지 않다. 실패를 겪고, 좌절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 일어서야 아는 아이지. 너와는 다르게."

"……내기라도 할 셈이냐?"

"좋지. 이 무료한 대치에 한 가닥 즐거움이라도 있어야 할 테니까."

은휘는 뒷짐을 진 채 미소를 지었다.

"내 제자의 승리에 내 혼을 걸지."

제자를 믿는 것이 사부의 몫.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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