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관은 무림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는 오랫동안 지켜져 온 철칙이었다.
무림에는 무림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내용.
과거, 어느 황제의 밀약을 시작으로 이 철칙은 깨지지 않고 이어졌었다.
오늘까지는.
"한 놈도 빠져나가게 두지 마라!"
흑기대를 이끌고 나온 장군, 마홍이 외쳤다.
황제의 명령은 매우 단순하고 직설적인 것.
금장가 인근의 모든 것을 섬멸하라는 것이 전부였다.
왜, 어째서.
물음 따위는 의미 없는 짓이었다.
황제의 명령은 그 자체로 의미였다.
검은 해일이 평원을 가로질러 주변을 포위했다.
"장군, 봉화가 올라왔습니다! 색은…… 붉은색입니다!"
명령의 조건은 단 하나.
금장가에서 생긴 변고의 여부였다.
정말로 죽었어야 할 이전 황제가 살아서 금장가로 돌아간 것이라면 이와 연루된 모든 것을 지워야만 한다.
그것이 무림의 인사라 해도 마찬가지.
"이 땅의 모든 자를 섬멸하라!"
이제 뒤는 없다.
마홍의 신호에 흑기가 일제히 돌격을 시작했다.
북방에서 단련된 군마에 정련된 금속으로 씌운 마갑.
게다가 기수 하나하나는 황실 전통의 무공으로 단련된 고수들.
공법 자체의 깊이는 무림이 더 깊을 수 있으나, 단련과 실전성에서는 황실을 따라가지 못한다.
흑기의 창끝은 순식간에 생명을 앗아갔다.
"이게 무슨 짓이오!! 관이 무림에 관여하다니!!"
"언제부터 관이 사람을 무도하게 해치기 시작했단 말인가!"
물론, 무림인이라고 무작정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가장 능력 좋은 고수들을 중심으로 흑기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찬란하게 검을 휘두르는 무당의 막천우나 화산의 악무군.
어마어마한 창격으로 말을 꿰어버리는 마창 등이 그러했다.
이들 앞에서는 흑기의 노도와 같은 진군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당의 검! 직접 맞대보고 싶었다!"
"무암……!"
"하하하! 나는 화산의 장문과 한번 겨뤄봐야겠군!"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관을 상대해야 할 이 시점에!"
하지만 그들의 무용은 무림맹에서 나온 고수들에게 막혔다.
난전에서 손발이 묶이면 군의 응집력을 상대할 수 없는 것이 현실.
고수 몇이 묶이자, 순식간에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네놈, 허선!! 설마, 관과 결탁이라도 했다는 건가!"
"하하. 이 모든 건 정도 무림을 위한 일이오. 그대들이 마교와 손을 잡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보다 깨끗한 곳과 손을 잡았을 뿐."
"무림은 결코 관과 손을 잡지 않는다! 네놈은 그 철칙마저 잊은 거더냐!"
"마교를 막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단지 그뿐!"
허선을 위시로 한 무림맹은 철저하게 신교와 소명회의 발을 묶었다.
고수만 묶어두면 나머지는 흑기의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그 고수도 절대적인 숫자 앞에서는 촛불 앞 등불일 뿐.
허선은 앞을 막은 모두를 제거하고 난 뒤, 살아남을 몇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무림맹의 대부분도 죽겠지만……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허공 대사께서 울겠다, 머저리."
"……소백!"
순간, 명한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전황의 파악은 이미 끝낸 상항.
활로를 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곳을 뚫어야 했다.
무림맹이 발을 잡는다면 그 족쇄부터 끊어내는 것이 정석.
한걸음에 거리를 좁히고 벼락같은 권격을 뿜어냈다.
콰르르릉!!
"크으윽! 모든 무림맹은 들어라! 절대로 이곳을 빠져나가게 두지 마라! 마교를 척살하여 정도 무림의 기치를 세우자!"
하지만 허선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복마장으로 명한의 권격을 흘리며, 남은 맹원들을 독려했다.
수천의 일파가 벽처럼 몰려왔다.
"마창!! 반대로 길을 열어라! 이 땅을 피로 적시면 우리는 지는 것과 같다!"
맞선다면 승기는 절반 정도.
허나, 그래서야 본말전도일 뿐이다.
애초에 이 회담의 목적은 전쟁을 막아서 피를 줄이는 것.
절대로 전면전을 열어서는 안 된다.
명한의 손짓에 육마완은 그대로 방향을 틀어서 반대쪽으로 탈출로를 열기 시작했다.
"도망칠 수 없다!"
"어딜 가려고! 네놈 상대는 나다!"
허선이 뒤를 잡으려 했으나, 그 앞을 명한이 막았다.
"어리석은 놈! 고작 그 숫자로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더냐!?"
"막아? 누가 누굴 막는다는 거지?"
쿵――!
명한이 땅을 거칠게 밟았다.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기의 통로가 그의 몸을 중심으로 확장.
천의무봉 상태에서 끌어오는 인과의 띠가 태풍처럼 그를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인세에 내려온 화신처럼.
"무림맹의 어리석은 자들은 들어라! 관과 무림의 불가침 조약을 깨뜨린 것은 허선의 독단! 맹의 정의라는 헛소리로 그대들을 사지로 몰고 있을 뿐이다! 관의 흑기가 정과 마를 나누는가!? 이 전쟁의 끝은 벗과 형제의 죽음뿐이다! 모두 물러나, 살길을 찾아라!"
그 위용을 빌린 외침이 평원 전역을 울렸다.
상황에 휩쓸려 검을 들던 무림맹의 일원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맹주의 지시대로 움직이기는 했으나, 그들도 관의 개입은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
명한의 말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감히! 요사스러운 혓바닥으로 현혹시키려 하다니!"
"당장 저놈을 막아!"
무암을 선두로 한 맹의 고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나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웅――!
거대한 힘의 와류를 손으로 모아서 방사하는 명한.
그의 전면 공간이 뒤틀리며 삼십여 장의 통째로 밀어냈다.
공간에 겹친 흑기도, 무기를 들고 달려들던 고수들도, 회담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거대한 단상들도.
모조리 싹 쓸려갔다.
하늘의 거인이 내려와 손으로 바닥을 쓸어버린 것 같은 광경이었다.
전장의 혼란이 멎고 침묵으로 그 광경을 경외했다.
"내 앞을 막는다면 죽음뿐이다."
중원에 새로운 전설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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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한이 전장을 돌파하고 있는 시점.
멀지 않은 곳, 금장가에도 흑기가 들이닥쳤다.
이들의 목적은 도력제의 처분과 증거 인멸이었다.
"무, 무슨 일이냐!?"
"말들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 금장가를 포위할 무렵.
항거할 수 없는 기운이 내부 사당을 중심으로 뻗어 나와 사위를 잠식했다.
짐승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날뛰고 간담이 작은 이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에이잇!! 황명이다! 어떻게든 완수하지 못하면 날아가는 건 우리 목이다! 말에서 내려 두 발로 진입해라!"
"아, 알겠습니다!"
다급히 말을 버리고 두 발로 진입을 시도했다.
수백의 흑기와 금군이 포함되어 있으니 문제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만약, 금장가에 있는 이들이 평범했다면 이건 괜찮은 판단이었을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이번 상황에서는 평범은 사치에 불과했다.
저택을 중심으로 핏빛의 물결이 땅에서 하늘로 치솟았다.
앞서 접근하던 몇몇 흑기의 몸이 단번에 녹아내렸다.
"뭐, 뭐야!? 다가가지 마라! 몸이 녹는다!"
"으아악!! 가, 갑옷이 녹아서 달라붙었어! 떼줘!! 떼어 줘!!"
사방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경험 많은 흑기의 장군들조차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염두에 둔 건 도망친 금의위 장군 군율휘 정도이지 이런 기사가 아니었다.
접근했던 이들을 물리고 발만 동동 굴렀다.
"장군! 저쪽에……!!"
그러기를 얼마.
한 병졸의 손짓에 지휘관의 시선이 하늘로 올라갔다.
핏빛 기둥의 끝자락.
겨우 육안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 두 사람이 충돌하고 있었다.
아니, 사람만이 아니었다.
"용? 아니, 불사조!? 맙소사 대체 저게 뭐란 말이더냐!?"
거대한 화염으로 몸을 두른 기이한 생명체였다.
날개에서 끝없이 불이 치솟고 입에서는 흉험한 빛이 하늘을 수놓았다.
선계의 선인들이라도 싸우고 있는 것일까.
지휘관은 저도 모르게 투구를 벗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 너머는 감히 인간이 끼어들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쿵――!
그리고 그때.
한 사람이 큰 소리를 내며 기둥 밖으로 추락했다.
땅이 깊이 파일 정도의 충격이었지만, 큰 상처 없이 툭툭 털고 일어났다.
"군율휘!?"
흑기의 지휘관은 그 인물을 한눈에 알아봤다.
전 금의위 장군이자 황궁 제일 고수였던 군율휘였다.
"큭. 너는…… 흑기의 지휘관인가?"
"팽월이다! 황명으로 널 이곳에서……"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비켜!"
"컥!"
냅다 팽월을 걷어차는 군율휘.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바위가 떨어져서 꽂혔다.
밀어내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크기였다.
"당장 병력을 백여 장 뒤로 물려라!"
"뭐, 뭐!? 그럴 순 없어! 우린 황명을 받고 왔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여기에 황명이 끼어들 여지가 있다고 보는 거냐!? 개죽음당하기 싫으면 당장 물러나!"
"하지만……"
쿠르르르릉!!
팽월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하늘이 크게 요동쳐다.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뇌성과 함께 벼락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설프게 기둥 주변을 서성이던 흑기는 단번에 벼락에 타죽었다.
"황명으로 저 벼락과도 싸워볼 셈이냐!?"
"크윽!! 전원 백 장 밖으로 물러나라!"
황명보다 무서운 건 개죽음이었다.
팽월의 명령에 병사들이 허겁지겁 도망쳤다.
그 과정에 벼락을 맞고 몇 사람이 죽었지만, 그래도 피해는 크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무림과 황가. 그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게 대체 무슨! 저 안에 반역자 영제도 있는 거냐!?"
"……있었다."
"있었다? 무슨 소리지?"
군율휘는 답 대신 입술을 거칠게 깨물었다.
도력제의 반응과 몇 마디에 그대로 넘어가서 금장가로 모셔온 건 다름 아닌 자신.
그 안에 서복의 계획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주인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내 목숨이 다하더라도 되찾는다."
"잠깐! 무슨 이야기인지 설명을……!"
퍼엉――!!
답은 생략한 채 군율휘가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
혼전이었다.
수천의 사람이 뒤섞인 가운데,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눈먼 검이 날아오기 일쑤였고, 아군의 검이 위험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혼란 속에서도 명한은 일행을 안전하게 보존시켰다.
소명회를 비롯한 무당, 화산, 아미, 흑점.
큰 이탈 없이 전쟁터를 돌파해서 인근 야산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사방에서 지친 숨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죽은 자의 침묵보다는 훨씬 나았다.
"다친 사람은 바로바로 치료해. 약이라면 여기에 충분히 있다."
"귀의 어르신! 여기입니다!"
"젠장! 환혼단을 가져와라! 물은 아직 멀었나!?"
주변을 경계하며 숨을 고르기 위해서 자리를 폈다.
지나온 길을 살피고 나아갈 길을 고리기에 좋은 위치였다.
힘이 남은 이들을 척후로 보내고 나머지는 운기 삼매경에 빠졌다.
"소백, 회주.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구려."
"악 장문."
이제 중요한 건 상황에 대한 수습.
전쟁터는 빠져나왔지만, 여전히 흑기와 무림맹은 추격은 이어지고 있었다.
악무군의 질문은 많은 걸 함축했다.
"이리된 마당에 다른 소리는 안 하겠으나…… 계획은 있습니까?"
"안전한 곳까지 피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흑기를 도시까지 움직이기는 힘들 터. 맹의 추격만 우선 생각하면 될 거 같습니다."
"낙관적이군요. 허나, 그 맹조차 쉬이 처리할 사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맹을 움직이는 허선은 맹목적인 자. 그는 어떻게든 맹을 구슬려서 쫓아올 겁니다."
"허선. 그의 독단을 저지할 방법은 없습니까?"
"허선만을……?"
지금의 무림맹은 기형적이다.
머리가 없다면 멈출 수 있을 터.
명한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 방법이라면 내게 있을 것 같은데."
그때였다.
일행이 온 곳과 반대 방향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변 무인들이 분분히 무기를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명한은 다가오는 사람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들을 제지했다.
"노 선배."
노걸개, 노유곽.
오제의 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