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 (212/235)

격변

허선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이 생각만큼 마음대로 굴러가고 있지 않았다.

본래라면 지금쯤 전면전을 시작하여 지역을 밀어버렸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에게 힘을 준 ‘어르신’에게 보답이 가능했다.

저주받을 마교를 척살하고 정도를 세울 힘을 내려준 어르신에게.

"아직도 이곳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거냐?"

"……누구냐!?"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허선이 반사적으로 불청객에게 복마장을 날렸다.

웅혼한 장력에 막사의 천이 거칠게 요동쳤다.

"소림의 복마장이라. 얄팍하군."

하지만 불청객은 장력을 가볍게 지르밟으며 입술만 비틀었다.

보통 고수가 아니었다.

허선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용조수를 사용했다.

강철도 뜯어낼 것 같은 억센 조법이었다.

"큭!"

허나, 이번에도 불청객은 한 손으로 허선의 공세를 무마시켰다.

엇갈린 손가락을 힘으로 찍어 누르니, 허선은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아무리 전력을 내지 않았다고는 해도 터무니없는 격차였다.

허선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흥. 이런 놈을 믿고 일을 맡기다니. 어르신도 많이 약해지셨군."

"어, 어르신?"

"못난 놈. 앉아서 들어라. 어르신의 전언이다."

손을 풀고 가볍게 미는 경력에 허선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가벼운 손짓 하나에서도 비할 데 없는 경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표정이 더 어두워지지 않는 건 그가 말한 ‘어르신’이라는 단어 때문.

적어도 같은 편이라는 의미였다.

"흑기(黑騎)가 곧 움직일 거다. 어명은 떨어졌고, 이번 일에 살아남을 존재는 없다."

"흑기가 말입니까? 하지만 관은 무림에……"

"살아남은 황가의 핏줄이 금장가에 접근했다. 이 사실이 황가에 얼마나 큰 부담인지 너는 모른다. 모든 걸 파괴하고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것이다."

"……허면 저희는?"

"물고 늘어져라. 쥐새끼 한 마리도 이곳을 빠져나가서는 안 된다."

허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저희는 어찌 되는 겁니까?"

"이 땅에서 마도를 쓸어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목숨을 바칠 각오도 돼 있어야지."

"저, 저희도 죽으라는 말씀이십니까?"

"……흥. 소림의 방장이라는 인간이 이렇게 무게가 없어서야. 받아라."

불청객은 짧게 코웃음 치며 금색의 패를 던졌다.

평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었다.

"열이다.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인간은 열뿐이다. 마도든 뭐든 싹 쓸어버리고 중원에 새 판을 짠다.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그 정점에 서는 건 네놈이 되겠지."

"……새로운 중원의 정점."

"두 번의 기회는 없다. 마교와 무림맹. 새롭게 떠오르는 소명회라는 집단. 중원의 거대 세력이 직접적으로 충돌하며, 민생이 혼란스러워지는 지금. 황가의 사정과 맞물려서 한 번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절대로 이를 놓치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래해야지. 실패한다면 사라지는 건 마도가 아닌 네놈들이 될 테니까."

말을 끝으로 불청객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 어떤 경공술로도 해석되지 않는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허선이 마른침을 삼키며 굳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상황은 한 번에 소화하기 버거울 정도로 컸지만, 그는 의외로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새로운 중원."

바람이 걱정과 불안보다 훨씬 컸기 때문.

수백, 수천의 죽음 같은 건……

고민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다.

#

불길한 바람이었다.

명한은 서서히 터오는 동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많은 것을 대비하고 많은 것을 준비해도 인간에게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

천기라는 건 수많은 인과의 결정체.

수를 읽고 만전을 다해도 인간은 무수한 점 중 하나였다.

진인사대천명이라.

옛 선인의 말에는 언제나 지혜가 담겨 있다.

"도련님, 여기서 뭐 하세요?"

"음? 아. 잠이 안 와서 잠깐 바람을 쐬고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향아가 반걸음 안쪽에 섰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기에 명한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뭔가 걱정되는 얼굴이세요."

"그게 보였나? 이렇게 되고도 표정 관리에는 영 재주가 없네."

"후후. 곁에서 오래 봐 온 저니까 알 수 있는 거죠."

농 섞인 말에 명한이 가볍게 웃었다.

이럴 때 속을 읽고 기분을 풀어주는 건 그녀만의 재주였다.

아직 촉촉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동이 터오는 하늘을 손으로 가리켰다.

"율 대협이 깨어나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어. 아들…… 영아가 죽었다고 생각한 이유와 그간의 사정도 건네 들을 수 있었지. 수법과 시기를 고려해 보자면 역시 혼천의 계획이었어."

"정말 끝도 없이 사람을 괴롭히네요."

"그만큼 집착과 탐욕이 크다는 거지. 한 번이 안 되면 두 번. 두 번이 안 되면 세 번. 아니, 백 번 천 번이라도 할 각오가 된 이들이야. 불로불사. 생에 대한 집착은 불에 이끌린 날벌레처럼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지."

"자신이 타버린다고 해도 말이죠?"

"그 끝에 무엇이 있다고 해도 달려드는 욕망이지."

추하지만 그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명한은 그 본능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런 갈망이 없었다면 인간은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도 없었다.

선택과 결과에 대한 서로 다른 위치는 둘째 치더라도.

"서복이 펼쳐 놓은 여러 수에 대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시는 거예요?"

"……응. 한때, 서복은 나를 무시했고 후에는 이용하려 들었어. 그 덕에 그를 앞지르고 몇 가지 이득을 챙길 수 있었어. 하지만 그는 나보다 긴 세월을 한 가지 욕망을 위해서 살아온 인간이야. 그 집요함과 수의 악독함은 상상도 되지 않아. 그걸 전부 막을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어."

"아마 도련님 혼자서는 어려울 거에요."

"음?"

"도련님은 팔이 여덟이고 머리가 넷인 괴물이 아니에요.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한 사람이죠. 서복과 같은 이를 상대하고자 한다면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그리고 도울 사람이라면 충분히 있죠."

자신을 손으로 가리키며 싱그럽게 웃는 향아.

무언가 한 꺼풀 벗어낸 듯한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었다.

명한이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슬쩍 볼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예전과는 다른 어떤 감정이 그곳에 있었다.

"도련님?"

"크흠. 흠. 아니야. 네 말이 맞아. 나 혼자서 전부 할 수는 없겠지. 그걸 위해서 많은 이들과 인연을 맺은 거니까."

"그래요. 도련님은 수많은 이들과 만나며, 항상 최선을 다해왔어요. 하늘은 최선을 다한 이들에게는 응당 그에 맞는 보답을 내린다고 하죠. 조금은 단순한 해답을 믿어 봐요."

"그래. 우리가 선 곳이 인과의 끝이라면…… 나는 내가. 아니, 우리가 한 일을 믿을 뿐이야."

모든 걸 다했다면 후회는 없다.

명한은 그렇게 믿었다.

둥둥둥둥둥……!!!

그리고 그때.

"도련님!"

"그래."

결말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이곳인가."

이름 없는 산, 이름 없는 묘지였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잡초만 무성했다.

보통이라면 찾을 이유가 없는 장소.

하지만 화무천에게는 아니었다.

"잔향이 이어지고 있어."

손에 들린 건 피로 젖은 천이었다.

명한과 맞서 싸웠던 권왕의 의복, 일부분.

옛 황제의 피가 섞인 만큼 그 안의 기운도 역시 느껴졌다.

화무천이 이런 외지까지 온 건 같은 기운을 쫓아서였다.

‘생각보다 방비가 적어.’

지고의 경지에 달한 존재의 수.

그리 생각한다면 지금까지의 추적은 너무 쉬웠다.

천에 남긴 기운을 쫓는 것이 보통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어떤 방비도 없었다.

"……함정일까?"

언뜻 생각하자면 그것이 옳다.

하지만 화무천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함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얄팍하다.

이런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다가 크게 실패했다는 걸 알지 않는가.

두 번이나 같은 식으로 처리할 것 같진 않았다.

"그럼 정말로 허술하다는 의미인데."

그럴 경우 가능한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시도한 자가 무능하거나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

‘아마도 후자겠지. 그렇다면……’

생각보다 상황이 급박하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음!"

순간.

시야의 사각에서 비검 한 자루가 날아왔다.

실린 기운과 속도가 무시무시했다.

화무천은 한 걸음을 뒤로 물리며 화경의 힘으로 비검을 바닥으로 눌렀다.

묘지가 쩍 갈라지며 비검이 그대로 박혔다.

웅. 웅. 남아 있는 진동은 여력이 여전하다는 증거였다.

"누구냐? 정체를 드러내라."

소리가 주변을 돌면서 어지러이 흩어졌다.

현란함이 경지에 이른 보법이었다.

화무천 정도의 고수가 거리를 단번에 점하지 못할 정도였다.

멀어지고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다 벼락같이 비검을 연달아 쏟아냈다.

그 숫자가 무려 아홉이었다.

‘구궁비신검?’

이를 알아본 화무천이 크게 놀라며 걸음을 떼었다.

비검과 비검 사이로 이어진 기운이 뇌력을 불러와 주변을 하얗게 물들였다.

주변 십여 장 공간이 새카맣게 탔다.

"멈춰라, 연연."

"……!"

은밀하던 기척이 흔들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색 야행의로 온몸을 가리고 있는 여성.

아는 이들에게 ‘적’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역시 그대로군. 설마, 이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누구냐, 너.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날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그건 야속하군."

"……설마. 불가능해. 그는 죽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니. 보다시피 이렇게 살아 있다. 세상에서는 지워졌지만, 그렇다고 귀신이 될 수는 없지."

가볍게 웃는 화무천에 적이 뒷걸음질을 쳤다.

눈앞의 남자, 화무천은 오래전에 죽은 인물이다.

아니, 죽은 인물이어야 했다.

"정말로 당신이 화무천이라 이겁니까?"

"머리도 하얗게 세고 수염도 이리 길렀지만, 나라는 사람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천산 끝자락에서 폭포를 맞으며 수련하던 그 사람이 맞다, 연연."

"아……"

적. 화무천이 칭하기를 연연.

그녀가 힘이 풀린 채 주저앉았다.

"어, 어떻게 당신이 살아 있는 겁니까? 우리 모두는 당신이 죽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내 업이지. 그 지독한 살육의 끝에서 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라는 건 거의 없었다. 소림의 삼신승께서 날 가엽게 여기지 않았다면 한 줌의 재가 되었겠지."

"하. 천마는 당신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리해야 했다. 내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의 신교도 무림이 균형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알려주실 수 있지 않았습니까!?"

연연의 외침에 화무천이 쓰게 웃었다.

그가 화무천이기 이전, 천마의 삶을 살았을 때.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검을 들던 것이 바로 연연이다.

어쩌면 아내나 연인.

자식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사이.

아무런 말 없이 훌쩍 떠난 건 그로서도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내 죽음은 이어져야만 했다. 너희가 내 생존을 알게 된다면 되레 그 아이에게 부담만 됐을 터. 비정한 선택이었지만 이해해다오."

"당신이라는 사람은……"

"하하하. 그리고 나 같은 늙은이보다는 젊은 아들놈을 모시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더냐."

"농으로 무마하려 하지 마세요. 예전이나 넘어갔지, 지금은 어림도 없습니다."

"이런. 그건 좀 아쉽군."

혀 차는 화무천의 모습은 언뜻 예전을 떠올리게 했다.

연연이 복잡한 얼굴로 그 모습을 천천히 더듬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말 중 아흔아홉이 거짓이라도 하나만큼은 절대로 사실이었다.

지금 모시는 건 그가 아닌 천마라는 것.

"……이곳에는 무슨 연유로 온 겁니까?"

짚고 넘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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