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싸움
마치 그림자가 몸을 일으키는 듯한 광경이었다.
굽어 있던 도력제의 허리가 펴지고 얼굴의 음영이 달라졌다.
기세, 분위기, 느낌……
모든 것이 달랐다.
"너는 누구냐?"
황후는 당황을 추스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 못 본 아들이라 해도 본능이라는 것이 있었다.
눈앞의 인물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었다.
"후우. 접니다, 어머니. 아들 영제입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그 아이는 이런 흉험한 기운을 내뿜지 않는다."
"하하. 정말입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의 아들 영제가 맞습니다."
"헛소리!"
황후가 상좌의 팔걸이를 손으로 돌렸다.
만약의 경우, 밖의 병력에게 신호를 보내는 기관장치였다.
하지만 아무리 장치를 가동해도 변화는 없었다.
도력제가 미소를 머금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모자가 만났는데, 다른 이의 방해는 사절하고 싶군요."
"무슨 짓을 한 거냐?"
"이 방의 모든 기관장치를 중지시켰습니다. 누구도 어머니를 도우러 올 수는 없습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러는 거냐? 정체를 밝혀라!"
"그러니까 전 어머니의 아들 영제라니까요. 감나무 아래에서 노래하던…… 항주의 밤에 뱃놀이를 좋아하던 그 영제가 맞습니다."
조금은 아련하게 읊는 도력제의 모습에 황후가 당황했다.
지금의 이 말투, 기억, 표정 등은 과거의 도력제를 떠올리게 했다.
천서를 만지기 전의 아들.
"……아니. 아니다. 네놈이 어찌 아들의 기억을 훔쳤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아이는 없다. 정체를 밝혀라, 이 더러운 놈아."
하지만 이내, 감정을 추슬렀다.
황후라는 직책은, 국모라는 위치는 그녀를 감정으로만 움직일 수 없게 했다.
천서에 접촉하고 저주를 받은 이가 멀쩡하게 살아왔다는 기록은 없다.
눈앞의 인물은 절대 아들일 수 없었다.
"후후. 그 냉정함은 과연 황후의 모습 그대로군요. 하지만 황후가 아닌 어머니의 모습은 어디에 있습니까? 작은 실수 하나로…… 고작 며칠 앞서 천서를 만졌다는 이유로 버려진 아들에 대한 모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어머니이기에 앞서서 황후다. 나라의 해가 될 존재라면 핏줄이라 해도 내버려 둘 수 없다. 알량한 고집과 집착으로 황위를 내어놓지 않던 너를 직접 몰아낸 건 내 나름의 사죄라 해야겠지."
"아아…… 어머니, 어머니. 당신은 그래서는 안 됐습니다."
"닥쳐라! 나는 알고 있다. 네가 더럽고 구역질 나는 무언가에게 점차 먹혀가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장군께 널 맡기고 세상 밖으로 숨겼던 것이다!"
"하하하!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어머니? 저는 결국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허락받은 이가 아니라면 결코 들어올 수 없는 이 금단의 구역에."
도력제는 양손을 펼치며 파안대소했다.
오랜 세월 흐려져 있던 기억과 감정이 깨끗하게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이제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염원을 이곳에서 이루겠습니다. 천서를 내어놓으십시오."
"어림없다. 설사 이곳에서 죽는다 해도 네놈에게는 절대 건네지 않는다."
"정녕 이 몸으로 하여금 패륜을 저지르게 할 셈인가요?"
"……큭!"
가벼운 손짓에 황후의 몸이 딸려가 도력제의 손아귀에 잡혔다.
힘으로 바동거려봤지만, 손가락 하나 떼어낼 수 없었다.
"저는 정당한 황위 계승자입니다. 올바른 자가 황권을 찾아야 이 땅이 평안하겠지요. 제게 천서를 건네고 황후의 역할을 다하세요, 어머니."
"크윽! 큭! 어림없는 소리……! 내 몸이 가루가 된다 해도 네놈에게는 줄 수 없다!"
"허면 황가의 피를 모조리 씻어내고 자리를 차지하겠습니다."
"뭐, 뭐!? 어찌 그런!!"
"그게 싫다면 천서를 포기하세요."
노랗게 빛나는 도력제의 눈에 황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건 이미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괴물. 오래전에 타락한 괴물의 눈이었다.
"나는……"
"아니되옵니다, 황후마마!!"
황후의 마음이 포기로 기우는 찰나.
굉음과 함께 사당의 문이 반으로 쪼개졌다.
그 틈으로 밀고 들어오는 건 거대한 언월도의 군율휘와 남은 일행들.
"서복아, 서복아. 너는 참 꾀도 많구나."
그리고 불사조 금홍의 머리를 탄……
은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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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한에게 있어서 2가지 걱정되는 부분이 존재했다.
첫째는 옛 황제의 심장.
세 개로 나뉜 심장 중 하나를 직접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큰 부담이었다.
심장은 그 자체로 황제의 힘을 사역하고 있는 기물.
사람을 유혹하고 온갖 기이한 것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은휘의 도움을 받아 일시적으로 봉인해 두었지만,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바로 서불의 존재였다.
"그 아이가 말하더구나. 몸을 회복시킬 존재가 분명 있는데, 이를 되찾으려는 행동이 고작 한 번이었다는 것이 의심스럽다고."
"……"
"해서, 생각을 더듬다 보니 몇 가지 가정이 생기더군. 하나는 계획이 급하여 포기했다는 것. 하지만 중간에 다른 노림수를 던진 것으로 보아 그건 어려울 터. 후자에 언급한 시기의 문제가 더 적절하다고 보이더군."
말 없는 도력제에 은휘가 가볍게 웃었다.
"이미 회복이 불가능한 수준까지 본래의 육체가 붕괴되었다는 가정이지. 다른 육체로 갈아타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걸 보면 가장 그럴듯하지 않나?"
"……그런 알량한 가정 때문에 날 의심했다고?"
"딱히 널 짚은 건 아니야. 소백, 그 아이는 황가와 연루된 모두를 주의하라 말해 두었어."
"……"
"역시 예상대로인가. 너는 황가를 직접 건드릴 수 없었던 거지?"
과거 도력제를 노린 건 혈교.
서복과 혼천은 이를 알았음에도 직접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신교에 사람을 잠입시키고 온갖 실험을 자행하는 거대 조직이 황궁 자체에는 손조차 대지 않는 것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사람을 죽이고 피와 절망을 뿌리는 일에 황궁보다 적절한 곳은 없으니까.
"그러니 되도 않는 철기 따위로 우리를 납득시키려 했군. 어떻게든 이 안에 들어와야 했으니까. 삼자회담으로 모두의 시선이 쏠려있을 때."
"……지긋지긋하군. 왜 간섭하는 거지? 너희와 상관없는 일인데."
"글쎄. 그건 소백, 그 아이에게 물어보라고."
"아. 그래야지. 너희 모두를 죽이고 난 뒤에, 그놈의 앞에서 직접 묻겠다."
도력제의 기세가 다시금 돌변했다.
보다 음습하고, 보다 어두운 기세였다.
"황상!! 정신을 차리십시오! 그런 괴물에게 져서는 안 됩니다!"
인외적인 기세에 군율휘가 다급하게 외쳤다.
"황상? 우습군. 이 안에 그 어리석은 놈이 남아 있을 것 같나?"
"닥쳐라, 괴물!! 당장 황상을 내어놓고 썩 사라져라!"
"미련한 놈. 애초에 그날 이후로 영제는 내게 흡수됐다. 제약 때문에 표면으로 나오지 못했을 뿐. 그놈의 의식, 기억, 감정…… 모든 건 내가 통제하고 있다."
"감히!! 무엄하다, 이놈!!"
"무엄한 건 내가 아니다, 네놈이다. 꿇어라."
"무……!?"
짧은 명령에 그대로 주저앉는 군율휘.
스스로도 이 사실이 이해되지 않는 듯 얼굴이 엉망이었다.
군율휘는 현경 끝자락, 그 너머에 닿은 지고의 고수.
아무리 힘이 강해도 이런 건 경우에 없었다.
"말하지 않았나? 제약 때문에 표면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이면에서는 그럭저럭 작은 장난질이 가능했지. 천기자, 그 늙은이의 독한 집념만 아니었어도 네놈들인 이미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몸이 됐을 거야."
"크…… 크으으윽!! 이걸 풀어라!"
"우습구나, 인간의 각오라는 건. 그럼, 이건 어찌 생각하느냐?"
"어?"
"모, 몸이 왜 이래!?"
이번에는 뒤에서 기웃거리기만 하던 호릉과 호랑이었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군율휘를 향해서 다가갔다.
손에는 평소에 쓰지도 않던 단검이 들려 있었다.
"네놈!! 대체 뭘 하려는 거냐!?"
"황상의 명령이다. 저 반역자를 죽여라."
"……!"
손짓에 따라 점차 거리가 가까워졌다.
호릉과 호랑은 어떻게든 거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이건 외부에서 들어온 어떤 압력이 아니었다.
몸 안을 장악하고 있는 특별한 무언가였다.
"으그그그그! 하지 마! 장군님 아프게 하지 마!"
"하기 싫어! 날 움직이지 마! 그러지 마!!"
호릉과 호랑이 울면서 소리쳤다.
엄하고 딱딱한 군율휘지만 둘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해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괴로웠다.
"청청아."
"네, 사부님."
그때, 잠자코 있던 청청이 드디어 움직였다.
금홍이 날고 붉은색 선이 사당 전역을 뒤덮었다.
영기로 엮어낸 하나의 망(網)이었다.
귀로는 들리지 않는 어떤 비명소리가 망 사이사이로 비집고 나갔다.
"몸이!"
"아!!"
그러자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던 호릉과 호랑이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들고 있던 단검을 던져버리고는 군율휘에게 달려가 몸으로 그를 보호했다.
"……귀혼사승박(鬼魂思繩搏)을 깨뜨렸어?"
그 모습에 놀라는 도력제.
"서복아, 서복아. 네놈은 재주가 있어도 사람은 볼 줄 모르는구나."
"뭐?"
"네놈은 그날 이후로 몸의 주인이 없다 하지만, 보아라. 네 속박을 깨트린 건 몸 주인의 마음이니라."
"……!"
도력제. 아니, 서복도 알아차리지 못한 틈에 왼손이 들려 있었다.
주술의 핵이 되는 축을 무너뜨린 아주 작은 반항이었다.
하지만 그것이면 은휘에게는 충분했다.
"썩 주인에게 몸을 돌려주지 못할까!"
추상같은 은휘의 호령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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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한이 감았던 눈을 뜨고 허공을 응시했다.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어떤 흐름이 감지됐기 때문이다.
이건 인과의 띠를 타고 흐르는 영적인 진동.
"……사부님이 움직이신 건가."
만일을 위해 청청을 통해서 남겨둔 지침이 몇 가지 있다.
그중 사부인 은휘가 직접 움직이는 건 마지막 수단.
그만큼 심각한 일이 아니라면 결코 나서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회담 위치가 금장가 인근이라는 것부터 의심스러웠는데……’
눈을 돌리기 위한 수단이며 일거양득을 노린 방책.
"황가와 연루되어 있다면 만력제와 관계가 있을 터. 이미 오래전부터 파운과 같은 안배를 해 둔 건가. 지독한 인간이네."
수십 년을 수일처럼 사는 인간이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만약을 대비하고 비상 대책으로 몇 순을 남겨두는 것.
하지만 그 행동이 이렇게 급해지는 건 결코 상황의 우위 때문이 아니다.
‘초조해하고 있어.’
서불을 탈환하지 못하고 파운을 통한 계획이 실패한 것.
큰 전쟁을 앞두고 그도 무리한다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작금의 삼자회담도 비슷한 흐름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허선이나 무암 같은 무림맹 내부의 암초도 문제이나, 결국은 배후에 있는 건 서복.
판을 움직이는 건 그의 노림수일 것이다.
‘황가를 통한 계획……’
명한이 잠시 눈을 감고 사고를 정리했다.
지금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다음 순서는 없다.
이미 상황은 종극.
남은 건 몇 번의 수였다.
"종극?"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한 장면.
습작의 말미, 그가 구상한 전투 장면이었다.
무림의 말소를 꾀한 적도와 이에 대응한 무림의 연합.
"아. 관을 끌어들일 생각이구나."
상황은 다르지만 같은 구도.
천기의 오묘함은 이렇듯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