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장가로
황제의 피를 통한 결과물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다.
그건 생명에 대한 집착이었다.
마치 현대의 암세포처럼 끝없이 증식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했다.
부서진 자리를 채우고, 망가진 공간을 메우며 모든 것을 자신으로 채우려 한다.
하지만 육체도 영혼도 그런 식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과한 증식은 대상을 망가뜨릴 뿐이다.
"벌써 삼 할인가. 길게 끌면 가망이 없겠어."
명한의 눈에는 율무기를 잠식한 황제의 기운이 여실히 보였다.
고를 매개체로 해서 숙주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 잠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화타가 아니라 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다.
‘이렇게 죽어도 좋을 사람은 아니야.’
명한의 숨에 각오가 깃들었다.
"크…… 아아아! 날 방해하지 마! 모든 마교도를 죽여야 한다!"
"영아를 위해서라도 그건 용납할 수 없어."
"감히 영아의 이름을 올리다니!"
분노한 율무기의 권이 벼락처럼 날아왔다.
천의무봉 상태의 명한을 뚫고 그의 육신을 흔들었다.
인과의 띠를 풀어낼 정도의 강한 집념.
권왕 정도의 인물이 황제의 피에 물들면 이런 위력이 가능했다.
쉽게 볼 수 없는 상대.
명한이 호흡으로 천지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파(破)!
손뼉을 마주쳐 힘의 파랑을 만들고 활처럼 몸을 튕겼다.
갈고리와 같은 손에 걸리는 건 율무기의 뒷덜미.
그대로 낚아채서 무대 구석에 처박았다.
땅이 운석에 처맞은 듯 파이고 토사의 파도가 수 장 높이로 치솟았다.
보통 인간이라면 산산조각이 나고도 남을 정도의 위력.
하지만 상대는 권왕이며 황제의 피로 잠식된 괴물이었다.
퍼엉!!
토사를 뚫고 붉은색 거대한 주먹이 날아왔다.
권왕의 패왕권.
명한은 인과의 띠로 주먹을 묶고 화경의 요체로 돌렸다.
거대한 힘의 똬리가 하늘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폭음과 함께 인형 하나가 튕겨 나갔다.
"사 할……"
인외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율무기였다.
얼굴부터 상반신 대부분이 인간의 형체를 벗어나 있었다.
지독한 잠식의 결과.
‘황제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야.’
그를 만나고 읽고 느껴 봤기에 안다.
이런 광기와 집착은 그의 바람과는 멀었다.
"돕겠네. 필요한 걸 하게나."
"참으로 귀찮은 아이로구나."
그때, 기회만 보던 막천우와 구검신녀가 끼어들었다.
장내에 몇 없는, 상황에 개입할 역량이 있는 이들이었다.
순식간에 율무기를 포위하고는 절기를 쏟아냈다.
둘 다 검에 있어서는 정점에 이른 이들.
서로의 능력을 파악하고 합공을 함에 있어서 문제가 없었다.
"제가 점을 찍겠습니다! 선을 이어주세요!"
이건 기로 하는 외과적 수술이었다.
율무기를 잠식해 나가는 황제의 기운을 도려내기 위한 칼.
머리부터 목, 가슴, 팔, 허리……
명한의 손이 잠식의 경계를 빠르게 점해갔다.
잠식의 속도와 방향, 막천우와 구검신녀의 실력까지 고려한 한계선이었다.
그리고 이를 두 사람이 번개처럼 베었다.
"커어억……!"
엄청난 출혈과 함께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율무기.
심맥이 끊기고 오장육부가 토막 나는 엄청난 부상이었다.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경계.
하지만 이 정도가 아니라면 황제의 피에 깃든 집착을 완전하게 배제할 수 없다.
쩍 벌어진 상처로 거대해진 고가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사라져라."
명한이 그대로 고를 불태웠다.
끝없는 집착과 저주에 가까운 원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권왕에게 사용한 황제의 피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증거였다.
짧은 숨으로 이 지독한 감정을 털어냈다.
[아미타불!!!]
그 순간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허선이 염불을 외며 장내로 뛰어 들어왔다.
금색의 휘광이 부처의 형상으로 모습을 드리우더니 일행을 강하게 압박했다.
"감히, 무림맹의 사람을 해치다니! 이제야 간악한 속셈을 드러내는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율 대협의 상태가 어떤지는 봐서 알지 않소?"
"흥. 무당의 정기를 저버린 자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 무림맹의 인물을 그대들이 해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 죄를 어찌 갚을 것인가!"
"……이래서 끼어들지 않은 거요?"
막천우가 이를 갈았다.
아무리 이해득실이 걸렸어도 같은 맹의 일원이다.
이렇게 쓰고 버린다는 건 용납하기 어려웠다.
"쿨럭! 쿨럭!!"
"어?"
"권왕?"
그때였다.
죽은. 아니, 죽었다고 생각한 율무기가 피를 토하며 깨어났다.
윽박지르던 허선조차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나는…… 나는 어떻게 된 거지?"
"말은 아끼고 가만히 계세요. 피를 많이 흘려서 정양이 필요합니다."
"소백. 소백이로군. 머리가 어지럽다. 내가 널 공격했던 건가?"
"얘기하자면 깁니다. 지금은 일단 쉬고 계세요. 몸이 회복되면 다시 얘기하죠."
"……미안하다. 네게는 그러면 안 됐는데."
율무기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기절했다.
상처를 봉합했다고는 하지만 출혈이 과했다.
명한이 재빨리 치료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 허선 대사. 우리가 누굴 해쳤다고 했습니까?"
"……"
부상과 죽음은 엄연히 다르다.
허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리 쪽의 신의가 있으니 권왕의 치료는 맡도록 하지요. 그때까지 잠깐 대결은 미루는 것으로. 괜찮을까요?"
"마음대로 해라."
도망치듯 떠나는 허선을 보며 명한이 입술을 비틀었다.
이 악독함을 갚아줄 때가 올 것이다.
속으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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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유예를 가지기로 협의했다.
율무기는 그대로 소명회 쪽으로 후송하여 치료를 시작했다.
‘이건 시체 아닙니까!?’ 펄쩍 뛰는 귀의를 뒤로 한 채, 나머지도 겨우 숨을 골랐다.
"태사,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해가 떨어져 밤이 찾아올 무렵.
이월의 손에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벌써? 아무리 흑점의 정보력이 좋아도 좀 많이 빠른데?"
"우리만 쫓던 것이 아닌가 봅니다. 중간에 같은 일을 추적 중인 다른 무리와 조우하여 상황을 공유했습니다."
"다른 무리? 누구?"
"개방입니다."
이월이 오래된 양파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손때가 가득하고, 여기저기 오물 흔적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물건이었다.
명한은 이를 받아들고 잠시 생각했다.
왠지 모를 익숙함 때문이었다.
"이 양피지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증표라며 건네주고 간 터라 생김새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변 인물들의 반응이 매우 지극하고 그 비범함이 눈에 띌 정도라 하니……"
"노걸개, 노유곽 선배님이겠군."
오래전에 타구봉법과 타구봉을 건네준 기인.
명한에게 있어서는 스승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다.
"그래, 그분께서는 다시 개방을 조직하고 계셨던 건가?"
"예전과는 다르지만, 확실히 개방은 개방이었습니다. 흑점에서도 겨우 알아낸 정보를 이미 파악하고 있더군요. 권왕, 율무기를 포함한 여러 고수들의 행적도요."
"여러 고수라. 하나가 아니었다는 거냐?"
"네. 파악된 고수의 숫자만 다섯.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경우까지 합치면 배는 될 겁니다. 개방에서는 이를 의도적인 행동이라 판단하고 조사하고 있더군요."
"결과는?"
"도구입니다."
명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단어였다.
"회유? 협박?"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여러 혈사에서도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고, 후에 몇몇 지점의 물자 유동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함도 확인했습니다."
"사람을 모아두고 있는 건가?"
"계속해서 위치가 바뀌고 사람과 숫자가 달라지고 있는 터라 개방도 확신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간의 행적을 볼 때 살인멸구의 가능성은 되레 더 낮다고 보입니다."
"권왕의 경우는?"
"성정 탓에 회유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일을 꾸민 것으로 보입니다."
추측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율무기의 아들, 영아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면……
"내가 서신을 하나 써 줄 테니, 사부님을 찾아가라."
찾는다.
그것이 옳은 일이니까.
명한이 일필휘지로 글을 써 내려갔다.
#
"이곳에 안 계신다는 말입니까?"
흑점 요원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새벽에 특급으로 날아온 전서구로 받은 명령.
한시도 쉴 틈 없이 찾아온 소명회 저택에는 서신을 전달받아야 할 사람이 없었다.
"우리 쪽에서도 소식을 전달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군."
"어떻게 이런 일이. 서로 엇갈렸단 말입니까?"
"상황이 매우 급하다 보니 이쪽의 일은 뒤로 미뤄진 거네. 설마, 태사께서 찾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소명회에 남아 있어야 할 사람들이 전부 떠나버린 것이다.
도력제, 군율휘는 물론이거니와 청청과 호랑, 호랑도 마찬가지였다.
이래서야 서신을 전달할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소란인가."
"……아. 어르신."
그때, 저택의 소란에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머리를 길게 기른 도인 풍의 중년인이었다.
"태사님의 서신을 전달해야 하는데, 엇갈리고 말았지 뭡니까."
"소백의?"
"네. 급편으로 온 거라 중요한 일일 텐데 곤란하게 됐습니다."
울상인 흑점 요원을 보며 중년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내가 봐도 되겠나?"
"어르신께서……"
"자네들의 규칙이면 고사해도 괜찮네. 허나, 급한 일로 사람을 찾았다면 시간이 문제 아니겠나.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이 늙은이도 한 손 거들까 하네만."
"어르신께서 돕는다면 문제없을 겁니다."
요원은 냉큼 서신을 중년인에게 건넸다.
보통이라면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눈앞의 인물은 그 범주 밖이었다.
"호오. 그렇군."
서신을 눈으로 훑으며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지 않은 글이었지만, 핵심을 간파할 정도의 통찰력이 그에게는 있었다.
상황이 눈앞으로 그려지며, 명한이 뭘 원하는지를 알아차렸다.
"자네. 가까운 흑점의 분타가 어디에 있지?"
"멀지 않습니다. 어르신께서 직접 움직이실 겁니까?"
"무림에서는 손을 씻은 몸이나, 그 아이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아무것도 안 해서야 쓰겠나. 이 정도는 이해해 줄 거네."
가볍게 웃으며 걸음을 내딛는 중년인.
쉬이 볼 수 없는 품격이 걸음마다 풍겨 나왔다.
은휘가 아니더라도 이 사람이면 괜찮다.
흑점의 요원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은 천하제일악, 화무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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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사당 안.
흔들리는 촛불이 빛의 전부인 이곳에 두 사람이 마주하고 앉아 있다.
한때, 태후로 불리며 황궁의 안주인을 자칭하던 여인.
그리고 천하의 아버지이며 황궁의 주인이었던 남자였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정적 끝에 새어 나온 목소리에는 물기가 묻어 있었다.
황후는 손끝으로 도력제의 뺨을 더듬었다.
큰 죄로 황가의 버림을 받은 아이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아이였다.
슬픔은 감출 수 없었다.
"금장가. 금장가로 가야 해……"
"이미 왔다. 여기가 금장가란다."
"금장가? 금장가?"
같은 말을 반복하는 도력제.
‘금장가’라는 단어에 반응하여 더듬더듬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증과 모자람 사이의 모습.
황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배 아파 난 아이가 이런 모습이라는 건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때.
"드디어 금장가에 들어왔구나."
"너……?"
도력제의 목소리가 일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