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9화 (209/235)

천서

권왕의 등장은 예상외였다.

그는 정파 성향의 인물이나, 그렇다고 무리 지어 활동하지는 않았다.

무림맹에 포섭되어 이런 자리까지 오리라는 건 기존의 성향과는 달랐다.

"천하의 무당파가 어쩌다가 저런 마교 놈들의 수하가 됐단 말이냐!"

"말을 삼가시오, 권왕. 내가 따르는 건 소명회요. 신교가 아니라."

"다를 게 있나? 저 썩어빠진 마교 놈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막는다면 같은 놈들이다!"

율무기가 크게 발을 굴렀다.

땅이 갈라지고 지면이 들썩였다.

어마어마한 내공의 발현이었다.

"권왕께서 신교와 깊은 원한이 있는가 보오."

"같은 하늘 아래 머물 수 없는 관계다. 내 아이를 앗아간 마교 놈들의 뿌리를 뽑을 때까지 나는 결코 편히 쉴 수도 없다."

"아이를……?"

"답은 죽음뿐이다. 막는다면 당신과 소명회 모두 쓸어버릴 뿐."

분노로 불타는 율무기의 눈동자에는 타협의 틈은 없었다.

그는 오로지 신교의 멸망만을 원하고 있었다.

막천우는 검을 고쳐 쥐며 자세를 다잡았다.

이런 상대를 맞이해서 어설픈 설득은 의미 없는 일이었다.

"사연은 전부 모르나, 나 역시 물러날 수는 없소."

"그럼, 무당의 검이 여기서 부러지는 수밖에."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아는 일. 오늘 여기서 권왕의 권을 견식하겠소."

무인이기에 무로 증명하는 순간.

검을 쥐고 율무기와 맞섰다.

#

"이월."

명한은 무대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월을 불렀다.

"네, 태사님."

"권왕에 대해서 조사를 해 봐. 그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신교의 세력이 여럿이라지만 이유 없이 그의 아들을 해칠 머저리는 없거든."

"알겠습니다."

왔던 것과 같이 이월이 소리 없이 물러났다.

당장의 상황에는 도움이 안 될 행동이지만, 율무기는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잘못된 정보를 기반으로 폭주하고 있다면 바로잡고 싶다.

‘만약 이 상황을 혼천이 주도한 거라면……’

그것이야말로 선을 넘는 행동.

명한의 눈이 깊이 가라앉았다.

"붙었다."

그리고 그사이.

무대 위의 두 사람이 충돌했다.

짧은 은소소의 감탄과 동시에 검과 동이 붙었다 떨어지기를 십수 번 연달아 반복했다.

권왕의 권은 그야말로 태산.

무겁고 깊어 하나하나가 거대한 산처럼 움직였다.

마창의 창조차 흘려내던 막천우의 검도 이 무거움은 쉽지 않은 듯, 많은 흔들림을 보였다.

공방의 우세는 율무기에게 있었다.

"권왕의 경지가 저 정도였나?"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당시의 명한이 율무기를 전부 가늠할 실력이 아니었음은 맞지만, 그걸 감안해도 지금의 율무기는 과하게 강했다.

기존 삼왕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현경과 화경.

그 너머에 발을 디딘 막천우와는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고를 쓰고 있어. 그것도 보통 고가 아니야."

율무기의 동작에 맞춰서 꿈틀거리는 기운이 있다.

이질적이지만, 그 안에 서린 기운은 명한에게 익숙했다.

‘황제의 일부로 만든 고……’

서복이 이번 전쟁에 얼마나 많은 걸 걸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고를 쓰면 저렇게 강해지는 건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고에 대한 지배력은 둘째 치고, 저렇게는 무리야."

"하지만 권왕은 저만큼이나 강해졌잖아."

"대가 없는 힘은 없어. 내 생각이 맞다면 고를 만드는데 황제의 일부가 들어갔어. 자신의 생명을 힘으로 맞바꿔서 사용하는 거지."

"생명을 태운다는 건가?"

이미 비슷한 경우를 몇 번이나 봤다.

고를 통해서 그것을 보다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서서히 죽어간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

극단적인 수였다.

"싸움이 길어지는 건 좋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해? 억지로 싸움을 말렸다가는 빌미만 주고 말 텐데."

"……"

권왕 한 사람과 대국의 결과.

쉽지 않은 선택의 기로였다.

"저…… 도련님.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잠자코 있던 향아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무대 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런가."

마치 구름처럼 모이고 있는 거대의 검의 형태.

"막 문주도 알고 있구나."

승패를 가늠할 한 수였다.

#

"……어째서냐."

율무기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중얼거렸다.

전신 혈맥을 관통한 심검(心劍)으로 인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승기가 뒤바뀐 한 번의 공격으로 인한 결과였다.

"그대의 분노는 이해하오. 하지만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죽음으로 달려드는 것을 그대의 자식이 원했을 거라고 보오?"

"아들의 이야기는 꺼내지 마라!"

"내게도 같은 일이 있었소. 스스로 죄책감에 짓눌려서 현실을 외면하고 말았지. 허나, 돌이켜 보면 그저 두려웠을 뿐이오. 인정하고 난 뒤가 너무나 두려웠던 것이지."

"……"

"권왕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꺼지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이름이라오. 부디 이 막 모의 충고가 모자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외다."

막천우는 포권을 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승패를 나눔에 있어서 이 이상의 다툼은 필요 없었다.

"너는 알지 못한다. 내 비통함을. 내 절망을……"

"권왕?"

하지만 말 몇 마디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이 땅에 다툼은 없을 것이다.

율무기는 어금니를 깨물어 작은 단약 하나를 목 안으로 넘겼다.

그것은 몸 안의 고를 폭주.

혈맥을 관통한 심검마저 씻어내 버렸다.

족쇄를 단번에 풀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질주했다.

"……!" 놀란 막천우가 검을 들어 올렸지만, 목표는 그가 아니었다.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신교의 마창에게 주먹을 뻗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회담 따위, 마창이 죽으면 전쟁으로 뒤바뀔 뿐이니까.

쩌어엉―!!!

"……소백!?"

하지만 이미 읽고 있던 사람이 있다.

명한은 고의 박동이 달라지는 순간부터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

태산 같은 주먹을 인과의 띠로 휘감아서 붙잡았다.

그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지고 목소리에서 피가 묻어나왔다.

"비켜라, 소백!! 피는 피로 갚아야 한다!!"

"핏값이 신교의 것이라 장담할 수 있습니까, 권왕?"

"네놈은 모른다! 나는 마교의 무력대와 정면으로 싸웠다! 그들의 무공을 알고 속셈을 알고 비열함을 안다! 내 분노는 정당하다! 당장 비켜!"

"비킬 수 없습니다. 수백, 수천이 죽어 나갈 뿐입니다."

"그럼 내 억울함은 누가 갚아줄 거냐!"

율무기의 전신이 검붉은 색으로 뒤바뀌었다.

힘을 감당하지 못해서 핏줄이 튀어나오고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었다.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와의 뒤섞임이었다.

‘영물? 신수? 혼기를 이용했구나!’

지독한 방법이었다.

어차피 섞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건 일회성에 불과했다.

쓰고 버리는 지독한 수법.

"그렇게 둘 수는 없습니다."

천의무봉.

가장 완벽한 형태에 들어서 세상과 율무기의 경계를 눈으로 훑었다.

미칠 듯 날뛰는 고와 그것에 달라붙은 수많은 혼의 흔적이 엿보였다.

서복이 자신의 몸에 쓰듯이, 다른 이에게도 혼을 뭉개서 주입한 것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건 옛 황제의 피.

"조금 아파도 참아주시길."

전부 뽑아낼 생각이었다.

#

오래된.

아주 많이 오래된 사당 앞에 한 무리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가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앉은 건 다름 아닌 군율휘.

그 뒤로 호랑이나 호릉.

도력제를 모시던 이들이 무리 지어 앉아 있었다.

"무릎 저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

"쉿. 쉿. 장군님이 조용히 하라고 했어."

"히잉. 하지만 지루한걸."

투덜거리는 호릉과 호랑의 말대로 이 대치는 꽤 오래되었다.

사당 안쪽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기다림.

철없는 둘에게는 버거운 시간이었다.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가?"

그때, 사당으로 가로지르던 한 사람이 군율휘 앞에 섰다.

황궁에서나 입을 법한 관복 차림이었다.

"송 내관. 부디 안에 이야기를 넣어 주시기를. 황상께서는 태후마마를 만나 봬야 합니다."

"쯧쯧. 태후는 무슨. 자네가 아직도 궁의 금의위라고 생각하는 겐가?"

"……황상께서 이 정도로 하나에 집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부디 대면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인연임을 알지 않더냐. 의미 없는 만남이야."

"의미는 만나고 난 뒤에 찾겠습니다."

"쯧쯧쯧."

내관은 혀를 차며 사당 안쪽과 저 멀리 앉아 있는 도력제를 번갈아 바라봤다.

광증이 도져서 퇴위당하기 전.

총기 어린 시절의 모습이 언뜻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그걸 만지지만 않았어도.’

안타까움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알았네. 이야기는 전해보지.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말게나. 태후께서 응하지 않으면 나도 도리가 없으니."

"그것이면 족합니다, 송 내관."

이내, 문이 한 차례 열렸다가 닫혔다.

그리고 이어진 또 다른 기다림.

정적 속에서 길고 지루한 시간이 지나갔다.

드르륵.

문이 다시 열린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황상만 안으로 모시게."

"드디어……!"

"단, 황상만이네. 다른 이들은 모두 밖에서 기다려야 할 게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송 내관."

겨우 떨어진 허락에 군율휘가 바삐 움직였다.

조금은 멍한 기색의 도력제를 부축해서 사당 안으로 옮기고 주변을 정리하며 물러났다.

그제야 지루함이 끝났다고 생각한 호릉과 호랑도 힘껏 도왔다.

"다 된 건가요?"

그렇게 상황이 얼추 마무리될 즈음, 청청이 슬쩍 물었다.

워낙 분위기가 무거워 말 한마디 걸 수 없었으나, 호기심은 어쩔 수 없었다.

도력제의 행동부터 금장가의 정체까지 모두 궁금했다.

"음. 결과는 태후께 달린 거겠지.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네."

"그러니까 무슨 일이 태후에게 달린 건지 우리도 좀 알 수 있을까요?"

"……그래. 자네들도 이리 도왔는데 아무 언질 없는 건 도리에 어긋나겠지. 자네는 황상의 광증에 대해서 알고 있나?"

"네. 대충은 알고 있어요."

"그럼 그 광증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고?"

청청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군율휘가 짧게 혀를 찼다.

"황가의 광증은 피를 타고 이어지는 저주에 가깝네. 황가의 인물들은 대대로 총명하고 몸이 건강하여 성군의 자질을 타고나지만, 스무 살이 되는 해에는 열 중 여섯이 광증에 걸리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도력제를 제외하고는 광증의 이야기가 없지 않았나요?"

"그건 과거의 실수에서 비롯된 일이라네."

"실수?"

"황궁의 내궁. 정확하게는 태후께서 관리하는 천서(天書)지. 역대 황손이 스물이 되는 해에 이 천서를 가지고 광증을 예방하게 되어 있네. 하지만 그해, 황상께서는 스물이 되기 전에 천서를 만지고 말았지. 그리고…… 이렇게 된 거네."

광증이 도져서 결국 퇴위하게 된 황제.

금장가로 물러난 태후가 만남을 계속 거부하는 것도 이유는 충분했다.

작은 실수 하나가 황권에 직결되는 황궁에서 이런 실수는 보통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황상께서는 무슨 이유로 금장가를 찾은 거래요?"

"그건 나도 모르나, 천서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다."

"천서는 황궁에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 말했다시피 천서는 태후께서 관리하신다. 평소에는 금장가에서 보관하다가 때가 되면 황궁에서 사람이 찾아오는 거지."

"그럼 천서가 이곳에 있다는?"

"태후께서 가지고 계시지."

무언가 어긋났던 추가 딱 맞아 떨어졌다.

"그거 황제진경 아니에요?"

천서. 황제진경.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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