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8화 (208/235)

은밀한 움직임

두 번의 싸움과 한 번의 평가.

은소소는 당연하게도 검오 쪽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 결과에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봐도 염호보다는 검오 쪽이 더 우세한 싸움을 치렀으니까.

"불쾌한 놈들."

"고를 자의로 받아들인 사람만 있는 건 아닌가 보네."

"흥. 무림맹의 정의 어쩌고 하면서 회유했겠지."

만약 염호가 고의 힘을 사용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은소소의 패배는 둘째 치더라도 검오와의 비교는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다.

무림맹의 전력도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다음은 내 차례인가."

하지만 이 남자가 나서는 것에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검 한 자루를 허리춤에 단 채, 앞으로 나서는 막천우.

예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벌써 나서는 겁니까?"

"무당의 검이 건재함을 알릴 기회 아닌가. 딸아이가 저렇게 노력하는데, 아비 된 자가 지켜만 볼 수는 없지."

"후후. 경지에 이른 무당의 검. 견식하겠습니다."

"그럭저럭 눈요기는 될 거네."

훌쩍 뛰어 무대 위로 올라섰다.

짧은 휴식시간 동안에 박살 난 무대를 흑점이 전부 복원시켜둔 상태였다.

탁탁, 발을 구름에 튼튼함이 느껴졌다.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땅에 박았다.

"무당의 막천우라 하오. 내 검에 도전할 자는 누구요?"

검으로 일가를 이룬 자의 패기였다.

솜털이 비죽비죽 솟을 정도의 기운에 내기가 약한 이들은 저도 모르게 물러나야 했다.

무대 위로 성큼 오를 정도로 배짱 있는 자는 없을 것 같았다.

"무당제일검 막천우. 그대와는 한 번쯤 합을 섞어보고 싶었소."

하지만 그런 패기를 가르며 무대 위로 올라서는 사람이 있었다.

인세에 현현한 인왕의 얼굴을 한 남자.

신교의 모든 병력을 총괄하며 창 한 자루로 일세의 무인으로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마창, 육마완.

그가 직접 오른 것이다.

"대장이 등장하는 건 이르지 않소?"

"후후. 무인이 호적수를 보고 피가 끓지 않는다면 무기를 놓아야 할 때겠지. 나, 육마완은 신교의 일익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무인이오. 무당의 검과 겨룰 수 있다면 그보다 큰 영광은 없겠지."

"하하하! 마음에 드는군. 과연 신교의 가장 큰 기둥이라 불리는 마창답소."

서로 호기를 드러냄에 거리낌이 없었다.

양쪽의 패기가 충돌하여 커다란 균열을 만들었다.

하늘부터 땅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금이었다.

바닥이 흔들리고 대기가 끓어서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양보는 필요 없소."

"피차 마찬가지요."

더 이상의 격식은 의미 없다.

견제에서 공방으로 전환되는 건 그야말로 찰나.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진 힘의 경계가 뒤섞이고 서로의 영역을 넘은 힘에 바람이 폭풍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검과 창.

대가의 격돌이었다.

#

삼자회담의 열기가 점차 가열되는 시점.

멀지 않은 곳, 산 중턱을 일단의 무리가 오르고 있다.

모두가 검은 옷으로 도배를 하고 있는 터라 육안으로는 확인이 잘되지 되었다.

은밀하고 기민한 걸음이었다.

순식간에 중턱 능선을 가로질러 평원으로 이어지는 경계까지 당도했다.

"이 너머입니다."

선두의 누군가 앞을 보며 말했다.

"어르신의 예측대로 방비가 옅군."

"신교와 무림맹이 충돌하는 이 시점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흐트러진 천기라 이건가."

"제아무리 금장가라 해도 금문쇄진의 보호 없이는 방도가 없을 겁니다."

"좋다. 신호에 따라 저택으로 진입. 지정된 위치를 확보하고 상주하는 이들을 모두 잡아라."

"존명."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는 흑의 인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매우 익숙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이내, 선두의 한 인물이 무언가를 평원 쪽으로 던지자……

펑. 소리와 함께 공간이 일그러지며 감춰져 있던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색으로 칠해진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스스슥. 스슥.

흑의인들은 금장가의 모습이 드러남과 동시에 행동을 개시했다.

담을 넘고 뜰을 가로지르며 약속된 위치로 일제히 움직였다.

하나하나가 잘 단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적이 나오면 제압하고 벽이 있으면 부수는.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담을 넘느냐!!"

"……!"

하지만 그 어디에도 이런 괴물과 상대하는 법은 없었다.

거대한 언월도를 휘두르며 흑의인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가는 괴물.

검이 부러지고 철도 자르는 실이 끊어지며 바람 같은 보법조차 막혔다.

우후죽순으로 쓸려서 차례대로 주저앉았다.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던 흑의인들의 대장은 당황했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네놈! 나를 알아보는구나! 황가의 개렸다!"

"자, 잠깐!"

아차 할 순간도 없이 거대한 언월도가 날아왔다.

검을 들어 막아 봤지만, 통째로 부러질 뿐이었다.

충격에 손목이 시큰거리고 경맥이 상했다.

이건 상대가 불가능한 괴물이었다.

"퇴각하라! 접선 지역까지 물러난다!"

물러남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히히히히! 갈 수 없는데!"

"야호! 호랑 장군님 나가신다!"

"잡아, 잡아!"

"도망 못 치거든!"

하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악동 둘에게 도망치던 이들까지 전부 잡혀 버렸다.

무공이 빼어난 것 같진 않은데 쓰는 무기가 괴상했다.

끊기지도 않는 그물이 단번에 몸을 휘감아서 포박했다.

"이, 이럴 수가…… 어르신의 예측이 어긋났단 말인가!"

"천기를 셈함에 있어서 인과를 점하는 것에 실수가 있으니 그런 거다."

"누구냐!?"

귀신처럼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는 낯선 인물.

흑의인들의 대장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형체 없는 그를 관통할 뿐이었다.

"금장가를 통해서 철기대(鐵騎隊)를 사용하려는 계획. 지금껏 황가에 손을 대지 않은 인내심은 훌륭하나, 이미 읽혔다. 중원의 일은 중원이 처리하게 두어라."

"어, 어떻게……?"

"세상을 견지하는 건 네놈의 어르신만이 아니다."

툭. 이마를 두드리는 손길에 흑의인이 그대로 기절했다.

형체가 없지만, 실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괴한 존재였다.

"청청아. 남은 놈들을 정리하려무나."

"네, 사부님."

명한의 사부, 은휘라는 존재는.

#

싸움은 격렬했다.

육마완의 창은 산마저 꿰뚫을 것 같은 파괴적인 힘.

반면에 막천우의 검은 음과 양의 혼원에서 나오는 지극한 화경.

공간이 찢어질 것 같은 창격이 나오면 그 궤적을 비틀어 버리는 혼원의 화경이 맞섰다.

맞물리는 절예에는 위아래가 없어,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다.

"대단하군! 무당의 검이 태극에서 시작하여 혼원으로 이어졌다고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외다!"

"겨우 혼태극의 끝자락을 잡았을 뿐이오. 그대야말로 마창이라는 위명에 어울리는 창이구려. 미간이 뚫릴 것 같아 간담이 서늘하오."

"하하! 그리 말하는데 아낄 수야 없지. 최근에 얻은 심득이외다. 내 창이 무정하다 욕하지 마시구려!"

"무림의 무인이 어찌 무정함을 탓하리오. 나 역시 겨우 실마리를 잡은 이치가 있으니 한번 어울려 봅시다!"

두 사람은 동시에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필살의 적이 아니면 힘의 3할은 아끼는 것이 무림의 철칙.

하지만 평생의 호적수를 만남에 감추는 것이 예의가 아님도 사실이다.

들뜬 마음은 무예를 처음 배울 때처럼 철없이 날뛰고 있으니, 서로가 진심을 드러냈다.

두 사람의 창과 검에 아득할 정도의 힘이 모여들었다.

"……무시무시하군. 저것이 마창이라는 건가."

"산이라도 쪼갤 것 같은 위세. 마창이 팔반에서도 수위를 다툰다고 하더니, 명불허전이야."

"저 어마어마한 공격을 막 장문이 막을 수 있을까?"

"막 장군의 검도 극한에 이른 화경이야. 그의 검은 이미 낙수를 돌려 폭포를 거꾸로 옮기는 수준이지. 제아무리 마창의 일격이 강해도 되돌릴 수 있어."

의견도 분분하게 흘러나왔다.

세력의 겨룸이 아닌 순수한 무인의 충돌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세상 어디를 가서 마창과 무당 장문의 대결을 보겠는가.

일수 일수가 공부였다.

"소백…… 아버지가 괜찮을까?"

하지만 딸의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막천우의 실력은 분명 인정하지만, 상대가 마창이었다.

혹여나 상처를 입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앞섰다.

"걱정하지 마. 두 분의 공세에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 섞여 있어. 누가 크게 상처 입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응. 네가 그렇다니까 믿어볼게."

다독이는 손길에 두 손을 움켜쥐고 무대를 응시했다.

어느덧 바람은 가라앉고 두 사람의 간격이 다섯 족장 안으로 좁혀졌다.

일격의 거리.

퉁―!

소리. 그렇게 인지하기 힘든 어떤 진동과 함께 마창이 먼저 움직였다.

‘찌른다.’라는 개념이 창의 실체보다 먼저 뻗어 나가 실체를 관통했다.

이건 이미 화경 너머의 경계.

그 위를 거니는 수준이었다.

둘 사이의 공간이 순식간에 창격에 무너지며 통째로 찢어졌다.

카카카카캉!!

하지만 그 인지의 너머에 존재하는 찰나의 순간.

이해의 밖에서 태극이 똬리를 틀고 마창의 일격을 휘감았다.

마치 세상이 일그러지는 것처럼 나선의 흔적이 둘 사이로 이어졌다.

명한이 사용한 인과의 띠와 흡수한 운용이었다.

‘찌른다’라는 마창의 절대적인 의지를 막천우의 화경이 부여잡은 것이다.

창은 더디고 더디게 나아가 막천우의 가슴 앞에서 멈췄다.

콰드드득.

힘의 똬리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지는 창.

여력은 상쇄되어 먼지처럼 두 사람 주변으로 흩어졌다.

겨우 손잡이만 남은 창을 바라보며 육마완이 허탈하게 웃었다.

"안타까울 따름이오. 그대의 창이 조금만 더 단단했어도 꿰뚫리는 것은 나였을 터. 이 싸움은 내 패배요."

"아니외다. 내 창은 인세의 보물. 그보다 단단한 것은 세상 전부를 뒤져도 찾기 어려울 거요. 이를 움켜쥐어 부러뜨린 건 그대의 역량. 이번 싸움은 내가 졌소."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승리의 공을 넘기려 했다.

그만큼 한 끗 차이, 아쉬움이 남는 승부였다.

"두 분이 그리 서로를 인정하는데 굳이 승패를 따질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번 승부는 무승부로 하지요."

중재는 명한의 몫이었다.

냉큼 무대로 올라서서 장내에 모인 모두를 바라보며 제안했다.

이 정도의 싸움을 보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터.

적절한 중재였다.

"후에 좋은 창을 찾거든 다시 한번 붙어봅시다."

"하하하. 바라던 바요. 그때는 반드시 반걸음 밖에서 잡아보리다."

"지지 않을 거요."

포권을 하고 물러나는 걸음마저 당당했다.

수천의 사람 앞에서 모든 재주를 뽐내고 그것을 받아낼 호적수까지 찾았으니, 무인으로서 이보다 더한 기쁨도 없었다.

양쪽 모두 미련 없는 결과였다.

― 하하하하하! 우습구나, 우스워!!

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평원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굉음을 터뜨리며 무대 위로 오르는 한 남자.

길게 기른 수염에 넝마에 가까운 옷.

겉으로 보기에는 방랑 낭인처럼 보이나, 그가 뿜어내는 기세는 범인의 것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폭풍처럼 무시무시한 기운을 끝도 없이 풍기고 있었다.

"……권왕?"

권왕, 율무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참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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