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207/235)

첫 번째 싸움

육마완의 말에는 두 가지 의도가 숨겨져 있다.

하나는 무림맹의 수준을 겉핥기 수준으로라도 알기 위함.

또 다른 하나는 승기를 잡아 남은 무리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함이다.

철저하게 자신들이 강하다, 라는 측면에서 제기된 의견이었다.

"이거 자신감이 넘치는군. 과연 마창이라 이건가?"

"우리는 마도를 걷는다. 정파 나부랭이 놈들을 박살 내는 데 구구절절한 사연은 필요 없지."

"후후. 좋아, 좋아. 이래야 저들을 짓밟을 마음이 생기지."

"……"

이미 막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마창 이 양반은 신교에서와는 느낌이 또 다르네.’

정파를 대하는 마도의 입장.

힘을 고수하는 것에 전혀 부담이 없는 전형적인 마도인이었다.

천마를 설득하여 삼자의 균형을 맞췄지만, 마도라는 거대한 거인이 마음대로 움직일 거라는 생각은 너무 안일했다.

싸움이라면 피하지 않는 것이 마도다.

"직접 충돌은 피했으면 하는데……"

하지만 손 놓고만 있으면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양쪽 모두를 상대하지요."

"뭐?"

"하? 지금 뭐라고 했지?"

조금은 오만한. 그렇기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제안을 던졌다.

발끈하는 양쪽을 보며 명한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신교와 무림맹의 직접적인 충돌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서로가 힘을 견주고 싶은 건 사실. 그러니, 우리가 중재자가 되어서 양쪽을 재단해 주겠소."

"회주. 아무리 그대의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는 하나 무리한 말 아니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명성은 알지만, 과한 자신감 같군."

"왜? 겁이라도 나는 겁니까?"

도발은 언제나 확실하게.

육마완과 허선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입장이 어떻든 간에 무(武) 하나로 중원을 종횡하는 인물들.

이럴 때는 단순한 것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후회할 선택이오, 회주."

"소림사의 자애가 이곳에서도 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투쟁심은 서로가 아닌 명한으로 쏠렸다.

적절한 도발에 적절한 반응이었다.

"그럼 인원과 순서를 정해봅시다."

그렇게 무술대회가 시작됐다.

#

하나둘은 너무 적고 수십은 너무 많다.

짧은 논의 끝에 다섯으로 수를 정했다.

각 진형에서 다섯씩 나와서 소명회의 다섯과 싸워서 우열을 정하는 방식이었다.

한쪽을 봐주고 다른 한쪽만 집중하는 그런 불균형은 서로 따지지 않았다.

경지에 이른 고수는 척 보면 알 수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나갈게."

은소소가 선봉을 자처했다.

"네 검으로서 순서는 양보할 수 없어. 누가 나오든 내 검으로 승리를 가져올게."

"우리 쪽 승리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 네게 첫 번째를 맡길게."

"후후후. 현명한 선택이야."

잔뜩 들뜬 어조로 은소소가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 남은 건 나머지 순번.

명한이 소집된 일행을 쭉 둘러봤다.

화산, 무당, 아미파의 장문인들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이왕 모인 거 하나씩 맡아 주시죠?"

"하하. 회주는 쉽지 않은 걸 원하는구려."

"신교와 무림맹 양쪽과 번갈아 겨루는 일이라. 만만치 않군요."

"원한다면 하지."

악무군, 백순순, 막천우였다.

차이는 있지만 셋 모두 새로운 무공과 깨달음을 얻어서 전보다 일취월장했다.

버거울지언정 자격이 없지는 않았다.

남은 건 마지막 자리.

"마지막은 제가 할게요, 도련님."

"향아야, 네가?"

"네. 저도 도련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투쟁에 대해서는 큰 의욕이 없는 향아가 직접 나섰다.

장내를 살피자면 구검신녀를 포함한 고수가 여럿이었으나, 소명회의 의미를 생각하자면 그녀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

어찌 됐든 처음부터 함께해 온 핵심 중 핵심이니까.

명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향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부담가지지 말고 위험하면 포기해도 돼."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이렇게 다섯이 정해졌다.

신교와 무림맹을 돌아보니 양쪽도 선별이 끝난 분위기.

흑점의 인원들이 바쁘게 움직여 마련한 임시 경기장도 거의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그럼, 신교와 무림맹 양쪽에 우리가 어떤 이들인지 확실히 알려주자고."

수천의 눈이 지켜보는 무술대회.

중원의 행방이 걸린 첫걸음이었다.

#

은소소가 검을 정갈하게 쥐고 무대 위로 올랐다.

언제나 검을 쥐고 강자와 맞서는 것에 흥분을 느끼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긴장과 흥분. 그리고 책임에 대한 부담도 함께 딸려왔다.

혼자만의 검이 아닌, 누군가를 대표하는 검.

그 무거움을 알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소소야."

그때, 무대 위로 신교 측 사람이 올라왔다.

검은색 낭인 복장에 한쪽 눈은 붕대로 가리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신발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맨발만이 있으니, 행색만으로 이미 기인이었다.

"검오(劍汚) 사부."

소궁주들을 교육하던 여러 스승 중 하나.

스스로를 더러운 이라 하여 검오라 칭하며 검사부를 제외한 어떤 직책도 받지 않던 인물이다.

행동도 기이하고 행색도 기이하여 꺼리는 이가 많지만, 아무도 그를 무시하진 못했다.

실력이 진짜이기 때문.

오래전에 천마에게 도전했다가 한 눈을 잃고 검사부에 만족한 검의 천재였다.

"신교를 떠났다는 말에는 조금 놀랐다. 안이 아닌 밖을 택함에 주저함은 없었더냐?"

"검오 사부가 항상 그랬잖아. 망설임은 죽음을 향한 걸음이라고."

"하하. 잊지 않아 다행이구나."

짧게 웃으며 검오가 낡은 검을 꺼내 들었다.

날도 다 나가서 허름하기 짝이 없는 검이었다.

"사부의 그 고철도 오랜만에 보네."

"후후.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이도 있는 법이니까. 허나, 소소야……"

검을 비틀어 양손으로 움켜쥐는 검오.

실로 무시무시한 기운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무대 밖, 거리를 두고 지켜보던 이들까지 솜털이 비죽 설 정도로 섬뜩한 기운이었다.

"예전 그대로라면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

"하. 하하. 반가운 말이네. 근데, 사부."

이에 은소소도 검을 움켜쥐고 기운을 끌어올렸다.

세상 한가운데 그녀만이 오롯하게 서는 듯한, 무겁고 진중한 기운이었다.

검오의 살벌한 기세를 정면에서 가르며 뚜렷하게 존재를 내보였다.

"사부도 날 예전처럼 대하면 죽을 수 있어."

"……후. 후후후후. 그래야 내 제자지. 내 낡은 검이 오늘 제대로 포식하겠어."

"이참에 아예 부러뜨려서 새 검을 사주는 것도 제자 된 도리 아닐까?"

"그럼 어디…… 제자의 도리를 다해 보거라!"

시작의 신호는 필요 없었다.

검오의 검이 비스듬하게 거리를 생략하고 은소소의 목덜미에 닿았다.

거의 동시에 땅을 차 몸을 뒤집는 은소소.

중력을 거스른 회전에 검이 아래에서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궤적대로 무대 바닥이 부서지며 상처를 새겼다.

파편이 비산하고 그림자 두 개가 양면으로 튀었다.

팽이처럼 몸을 돌린 검오와 바닥을 짚고 뒤로 회전한 은소소였다.

벌어진 거리를 다시 줄이며 연달아 충돌했다.

불꽃이 튀고 천둥과 같은 소리가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

일격일격이 필살이고 기세는 노도였다.

누가 이것을 한때 스승과 제자의 싸움이라 할 수 있을까?

누가 이것을 실력 재단을 위한 겨루기라 할 수 있을까?

생사대적과 만나도 이보다는 덜 치열할 것이다.

"……소명회의 은소소가 이 정도 실력자였나?"

무대 밖의 허선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의 고속 공방은 맹의 수많은 검수 중에서도 하나둘 정도가 겨우 따라갈까 말까 할 정도였다.

단순히 내공이 강하고 육체적 강화가 됐다고 따라잡을 수준이 아니었다.

순수 공방의 하나하나가 높은 이치를 담고 있었다.

챙―!!!

그러던 한순간.

두 사람의 공방이 절정에 달하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 부러졌다.

검의 끝자락이 부러진 채 핑그르 돌아서 무대 바닥에 박혀버린 것이다.

그 파편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내려서는 검오와 은소소.

서로 쥔 검을 아래로 내림에 결과가 극명하게 갈렸다.

"하하하. 이 늙은 사부가 제자 덕에 호강을 하겠구나."

"좋은 검으로 다시 사줄 테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말고, 사부."

"청출어람 청어람이라. 제자의 비상을 보니 이 늙은이의 마음에는 한 점의 억울함도 없다."

부러진 건 검오의 검이었다.

그는 토막 난 나머지 검을 무대 밖으로 던지며 깊이 포권했다.

패배의 시인이었다.

은소소도 정성을 담아 포권에 응한 뒤 물러났다.

"승자, 은소소!"

이견은 없었다.

#

검오와 은소소의 싸움을 제대로 이해한 자는 채 1할도 되지 않았다.

둘의 공방은 그만큼 수준이 높았다.

경지에 이른 자가 가져야 할 힘과 속도, 반응에 대한 기민함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음 공방에 대한 기대감 역시 높았다.

"주작대의 대주를 맡고 있는 염호라 하오."

이에 무림맹 쪽에서 나선 건 주작대의 대주 염호.

염왕문이라는 정사 중간 문파 출신이며, 정마대전 당시에 무림맹으로 편입된 인물이다.

두 주먹으로 펼치는 그의 염왕권은 일세의 절학.

9대 문파의 장문이라 하여도 그를 호락호락 대할 수는 없다.

"염호. 그대의 명성이라면 들어본 적 있어. 사천패귀, 호귀랑을 두 손으로 때려잡은 것이 그대라지?"

"신교의 광검께서 내 이름을 알아주다니 영광이오."

"그쪽은 마교라고 안 부르네?"

"이 자리에 온 것은 맹에 대한 내 충심일 뿐, 뜻이 같음은 아니오."

"그렇게 말해도 괜찮은 건가?"

"나, 염호를 괄시할 수 있는 자는 없소."

커다란 바위 같은 남자였다.

은소소도 무림맹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호의적인 미소를 띄웠다.

순수한 무인이라면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구구절절 떠들 필요가 없겠네. 내 검. 받을 자신은 있어?"

"이 주먹으로 아직 못 막아본 것이 없소."

"후후. 그 기대. 실망하지 않기를……!"

이번의 선공은 은소소였다.

순식간에 뽑힌 검이 모든 방위로 갈라져서 염호를 노렸다.

검으로 만들어진 폭우와 같았다.

벗어날 방위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는 완전한 공격.

하지만 염호는 애초에 피할 생각이 없었다.

땅에 두 다리를 깊이 싣고는 독문무공인 염왕공을 극한으로 발현.

전신이 불길에 휩싸이자 이를 주먹으로 모아서 한 점을 때렸다.

콰르르릉!!

불로 만든 망치가 바위를 때린 느낌이었다.

새빨간 불의 파도가 파도처럼 퍼지며 은소소의 검세를 쓸어버렸다.

열기에 땅이 타고 대기가 겹겹이 뭉쳐서 터졌다.

극한에 이른 열염지공이었다.

은소소가 이를 내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과감한 수!’ 감탄은 그대로 다음 검으로 이어졌다.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절정의 검격이었다.

수십 장에 달하는 거대한 검이 환상처럼 궤적을 타고 땅으로 꽂혔다.

땅이 물처럼 부서지며 사방으로 밀려났다.

펑! 펑! 펑!!

거대한 흙의 파도가 연달아서 폭발했다.

가운데에 수 족장 너비의 구멍이 쉼 없이 파이며 힘의 유동을 제지했다.

땅이 거꾸로 솟고 파편이 비산하여 유성처럼 쏟아졌다.

무대 밖에서 보던 이들은 근처까지 떨어진 힘의 여파에 황급히 물러나야 했다.

작은 파편 하나라도 충분히 치명적이었다.

"좋군. 좋아! 아직 여력이 있어 보이는데, 제대로 해 보자고!!"

흥이 돌기 시작한 은소소가 검성의 진전을, 전력을 꺼내 들었다.

주변의 모든 공간이 검의 궤적으로 그려지고, 각각의 힘이 감각적으로 해석되었다.

순간적으로 삼라만상에 대한 이해가 눈앞으로 펼쳐졌다.

"내가 졌소."

"……뭐?"

하지만 그 순간에 염호가 패배를 시인하며 물러났다.

"이 이상의 싸움은 감당하기 어렵소. 내가 패배한 것이오."

"무슨 소리야!? 아직 여력이 있잖아! 보면 안다고!"

"여력이라면……"

염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피부가 벌떡이고 무언가 혈관을 타고 흘렀다.

이것은 고의 증거였다.

"원치 않은 힘이오. 이런 걸 사용하는 건 신념에 어긋나오."

"……원치 않았다고?"

"나는…… 큭!"

말을 이어가려던 염호가 갑자기 주저앉았다.

심장 부근의 혈관이 크게 부풀어 있는 것이 육안으로 확인됐다.

고에 의한 발작이었다.

"……패배를 받아주시오."

그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협박.

은소소가 입술을 잘근 씹으며 무림맹 쪽을 쏘아봤다.

모두가 수긍하고 받아들인 거라고 하더니, 전혀 아니었다.

"좋은 싸움이었다, 염호."

"감사하오."

힘겹게 포권을 하며 물러나는 염호.

개운하지 않은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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