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의 회담이란
마침내 회담이 성사되었다.
각 세력에서 뽑힌 주력들이 회담장 중앙으로 모였다.
서로를 살피는 눈에는 긴장과 경계가 역력했다.
말 없는 대치가 꽤나 길게 이어졌다.
"서로가 웃으며 대화할 사이가 아님은 알지만, 회담에서까지 그렇게 인상 쓰고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차나 한 잔씩 하는 것이 어떻소?"
포문은 연 건 주최자인 명한의 몫이었다.
손짓으로 차를 내와 잔과 함께 탁자 위에 올렸다.
"차는 되었다. 그대의 입지를 생각하여 회담에는 참석했으나, 믿지는 않는다."
"그게 공손 선생의 답입니까?"
"우리가 이곳에 온 건 마교를 몰아내기 위함. 평화 같은 건 선택지에 없다."
딱딱한 공손수의 답에 맞은편 육마완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과거 정마대전에서 직접 공손수와 맞서본 사이.
앙금이 없을 수 없었다.
"나이를 먹더니 속이 더 좁아졌군, 공손수. 무림 후배의 찻잔도 받지 못할 정도로 겁이 많아진 건가?"
"마창. 창끝이 부러진 창이 여전히 입은 날카롭군."
"창대로도 네놈 머리통은 으깰 수 있다만."
"내 검이 네놈을 도륙하는 것이 먼저일걸?"
살벌한 말들이 오고 갔다.
정과 마. 신교와 무림맹은 근래에 목숨을 걸고 싸우던 사이.
애초에 이런 상황은 예견되어 있었다.
"두 어르신께서 마시기 꺼려진다면 이 후배가 먼저 잔을 들지요."
돌파구는 다음 대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강유가 잔을 낚아채서는 차를 그대로 넘겼다.
혀끝을 달콤하게 감싸는 상등품의 차였다.
"좋은 차군. 좋은 차야."
"특별히 신경을 좀 썼지. 두 분은 여전히 차에 손댈 생각이 없으신가요?"
명한도 강유를 따라 차를 넘기고 육마완과 공손수를 번갈아 바라봤다.
후배가 마셨는데, 선배가 꺼리는 거냐는 도발이었다.
육마완이 코끝을 찡긋거리며 차를 넘기자, 그제야 공손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셨다.
애초에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독수를 쓸 리 없다는 건 그도 알았다.
단지, 앙금과 기세 싸움의 발로였을 뿐.
"이제야 이야기를 나눌 분위기가 조성된 것 같군요."
"흥. 그래, 소명회의 아이야. 이 자리에서 뭘 논하고 싶은 거냐?"
"여러 가지 주제가 있겠지만…… 그 전에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거 같군요. 공손 선배. 제가 연배로는 한참 아래이니 말은 높이겠으나, 이 자리는 회의 회주로 참석한 겁니다. 아이라는 말은 자중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회주라고? 이 공손수가 널 공경이라도 하라는 말이냐?"
"아니면. 맹은 우리 소명회와 척을 지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명한의 웃음 속에서 실로 무시할 수 없는 기세가 풍겨 나왔다.
이건 내공이나 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닌, 사람 자체의 격.
풍파를 겪고 많은 이들을 아우르며 생긴 품격이었다.
공손수가 볼을 씰룩이며 말을 정정했다.
"좋다. 이제부터 널 회주라 칭해주지."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마창 선배께서도 이해하시겠지요?"
"물론이오, 회주."
"말까지 그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교의 일원이었을 때는 속하의 뜻으로 말을 편하게 했으나, 이제 외문의 자로 회주에 올랐으니 편하게 대할 수는 없소."
"외문이라. 확실히 그렇군요."
거리를 두는 것이 더욱 공정해 보인다.
육마완의 뜻을 이해하고 명한이 끄덕였다.
"자, 그럼. 사소한 이야기는 마무리 지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죠."
이제부터 시작.
혀끝에 수천, 수만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
의제를 정함에 있어서 중요한 건 공통된 의식의 존재였다.
한 가지 주제로 의견이 다를 때, 시작되는 것이 토론.
즉, 주제에 대한 서로의 견해가 존재할 때만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다.
지금 상황에서의 핵심은 ‘이면’의 존재.
"공손 선배는 혼천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혼천? 그게 무슨 소리지?"
"자금의 상황을 자아낸 이면의 집단을 의미합니다."
가늘어지는 눈, 파이는 주름.
명한은 공손수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가 알고 모르냐에 따라서 회담의 방향은 달라진다.
"지금 상황을 자아낸 건 어디까지나 마교의 진군이다. 현실을 호도할 생각은 집어넣어."
"신교의 진군은 어디까지나 후순입니다. 시작은 혼천의 계획이었지요."
"허튼소리. 대체 마교가 중원을 침범하는 일에 무슨 수로 다른 세력이 관여했다는 말이냐?"
"저를 지지한 문파들의 면면을 보십시오. 그들 같은 명문정파가 하릴없이 저를 따랐을까요? 저들 모두는 굵직한 이변을 겪었습니다. 핵심에 있는 건 혼천이었죠."
무당, 화산, 아미.
정파의 기둥과도 같은 이들이다.
공손수도 대번에 부정하지 못했다.
"그들의 목적은 전쟁으로 이한 참극입니다. 피와 살육을 중원 대륙에 재현함으로써 자신들의 일념을 이루고자 하죠."
"대체 사람을 그렇게 죽여서 뭘 얻는다는 거냐?"
"상고시대의 술법입니다. 불로불사. 영생에 대한 집착이죠."
"하. 그런 터무니없는 얘기를 믿으라는 건가?"
"공손 선배 정도 되는 고수라면 현경 끝자락에서 맞닥뜨리는 벽에 대해서 아시겠죠."
"……"
인간을 초월하게 되는 경계선.
이는 안과 밖의 차이를 인지하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공손수 역시 오래전부터 그 벽에 머물러 있다.
"벽의 너머에 존재하는 건 하늘과 땅을 잇는 섭리. 섭리를 다스린다는 건 생과 사의 법칙에서도 벗어난다는 의미죠. 혼천의 추구하는 건 이런 역천의 법입니다."
"그게…… 가능하다는 거냐?"
"글쎄요. 아직까지 그런 걸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하지만, 역천은 어디까지나 역천. 그것을 위해 그들은 셀 수 없는 많은 생명을 희생시키려 합니다. 무림맹과 신교의 충돌은 그 시작일 따름이죠."
"으음. 뭔가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나, 먼저 움직인 것이 마교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아닙니다. 혼천의 여러 계획 중 일부가 실패했을 때. 그들은 조금 더 격렬한 선택을 했고, 여러 문파에 숨겨둔 자신의 세력을 움직였습니다. 암살, 세력 교체, 포섭. 수많은 문파에서 변화가 감지되었고, 이는 혼란으로 치닫는 불씨였습니다."
"그걸 막기 위해 마교가 움직였다는 거냐?"
"산이 움직이면 작은 불씨는 꺼질 뿐. 위험한 수였음은 맞지만, 균형을 갖춰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필요악이었습니다."
명한의 삼분지계는 이를 위한 조치였다.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혼천의 계획은 다 막을 수 없다.
그러니 큰 덩어리로 뭉쳐서 한 번에 상대하는 것이 차선이었다.
설사 그것이 더 큰 전쟁을 불러온다 하여도 선택은 해야 했다.
"……혼란스럽군. 잘 꾸며진 거짓말을 진지하게 말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그 모든 것이 진실인지. 아니, 진실이어도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겠어. 마교조차 움직이게 할 만큼 거대한 세력이 암약하고 있다는 건가."
"진실은 밖이 아닌 안에 있을 겁니다."
"안?"
"최근에 맹주가 바뀐 것으로 압니다."
"그래. 허공 대사께서 건강상의 이유로 사제인 허선 대사에게 맹주직을 넘겼다고 하지."
"허선. 그렇군요. 그 허선 대사께서 직위를 넘겨받았어요. 공손 선배는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까?"
"……"
일찍이 공손수는 신교에 대응하여 병력을 움직였었다.
무림맹의 본거와는 사실상 꽤 먼 거리를 두고 있던 것이 사실.
맹주가 바뀐 것도 최근에서야 겨우 알게 됐다.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었지만, 움직일 수 없기에 수긍했던 것에 불과하다.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
"게다가 구파의 일부가 빠져나간 자리를 군소방파의 일원으로 채워 두었죠. 저도 이미 청룡대를 만나 봤습니다. 이름조차 모를 이들이 허다하더군요."
"문파의 크기로 맹의 충성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들도 모두 의기 가득하여 맹에 투신한 사람들. 자격이 있다면 충분히 자리를 꿰찰 수 있는 거다."
"그 실력이 의문이라는 겁니다. 선배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겠죠?"
맹의 수뇌부에서 무공을 개방하고 군소방파를 받아들인 일을 모를 수가 없다.
게다가 그들 하나하나가 이례적일 정도로 뛰어나다는 사실도.
무림맹이 강해진다, 라는 단 하나의 이점을 제외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의심스러웠다.
"이들이 강해진 건 모두 고의 영향입니다."
"고? 남만의 고독 말인가?"
"네. 고를 몸에 심어서 역량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지요. 다만, 이렇게 될 경우 숙주는 고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주인의 꼭두각시가 되는 셈이지요."
"하. 고독이라니. 점점 더 못 믿을 이야기로 진행되는군."
"아니, 꼭 그런 건 아니라네."
"……!"
순간, 목소리 하나가 회담장으로 다가왔다.
장내의 모든 이들이 내공을 일으켜 낯선 이를 경계했다.
하지만 이내 그 경계는 지워졌다.
아니, 지워져야만 했다.
"걸음이 늦은 걸 사과드리네, 신교의 마창. 그리고 소명회의 회주."
장내로 발을 들이미는 건 다름 아닌 소림사의 허선.
현직, 무림맹주였다.
"허선 대사…… 일전에 소림사에서 스치듯 본 이후로는 처음이군요."
"그때와는 많이 것이 바뀌었지. 신수가 훤한 것이 보기 좋네."
"네. 대사께서도 참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하. 큰 짐을 안았으니 나도 변해야겠지."
호방한 웃음은 예전의 허선과는 달랐다.
그는 도포를 휘날리며 공손수의 옆에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공손 선생. 내 대신 맹의 일을 처리해 주어 고맙소이다."
"……허선 대사. 맹주 직위를 확실히 인정받은 것이오?"
"보다시피. 맹에 가입된 문파들에게서 서신을 받았소이다. 의심된다면 각파의 장로들에게 따로 연락해 봐도 좋소."
"아니오. 허공 대사의 사제인 그대가 거짓말은 하지 않겠지."
슬쩍 허공을 언급했지만, 허선은 미동도 없었다.
공손수가 입술만 잘근 씹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제 맹의 입장은 그가 아닌 허선이 쥐게 됐다.
"그럼, 이 자리에서 다시 답변하도록 하지. 맹의 전력을 위해서 고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우리가 사용하는 고는 숙주를 통제하지 않네."
"그건 고독술의 상리와 어긋나는 말입니다만."
"믿든 안 믿든 상관없네. 맹의 투사들은 모두가 이를 인지하고 스스로 고를 투입했네. 맹의 미래와 무림의 정의를 위해서. 그 사실이 폄훼 당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으로 선공해도 말입니까?"
"하하. 자네가 그런 말을 하니 우습군. 소림사에서 마교의 둘째 공자와 손을 잡고 사파를 선동한 것이 어디에 누구였더라?"
"낭설입니다, 허선 대사."
"그런가? 그럼 자네의 말도 낭설이겠군."
주장은 맞물리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다.
고 자체를 부정하여 투입한 것이 아니라면 숙주에 대한 통제는 말을 붙이기 따름.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웠다.
"후후. 근데, 말일세. 이렇게 우리가 갑론을박하는 건 사실 의미가 없지 않나?"
"무슨 의미입니까?"
"어차피 마교와 무림맹은 불과 물의 관계라네. 자네가 어떤 말을 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아. 첫 번째 정마대전 이후로, 우리는 큰 상처를 입었네. 그 굴욕과 분을 해소할 때가 왔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거지."
"그걸 종용하는 세력이 있어도 말입니까?"
"그래. 피를 원한다면 피를 주고 살육을 원한다면 살육을 줄 뿐이네. 무림맹의 구겨진 자존심을 펼 수 있다면. 굴욕과 치욕을 갚을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나."
"……당신 정말로 소림승이 맞습니까?"
"소림승이기 이전에 무림의 무인이네."
허선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기세가 쏟아져 나왔다.
밖으로 알려진 그의 경지를 아득하게 벗어나는 힘이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허면, 힘으로 정해보겠나?"
닫혀있던 육마완의 입이 열린 건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