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5화 (205/235)

증명

서신은 모두 정상적으로 전달되었다.

회신까지 소요된 시간은 나흘.

각기 다른 반응이 담긴 서신이 명한의 처소로 직접 배달되었다.

"일단은 둘 다 수락인가."

장소와 시간에 대한 협의는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둘 다 인근까지 진군해 있던 터라 선택지가 좁았다.

인근 평원으로 장소를 정하고 시간과 준비를 명한이 맡는 것으로 했다.

흑점은 할 일이 더욱 늘었다.

"돈은 신경 쓰지 말고 최대한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

이젠 흑점의 태사가 누구인지 사람들이 안다.

소명회의 힘을 뽐내는 과정에는 재력도 포함되어 있다.

재력을 총동원해서 삼자 회담을 위한 장소를 구축했다.

시간은 빠듯하지만, 그보다 돈과 인력이 더 많았다.

순식간에 건물이 올라갔다.

"오늘이네."

"시간은 통보해 뒀어."

"우리 쪽 사람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괜찮을까?"

"걱정하지 마. 때가 되면 올 거야."

아직 소명회로 합류한 세력은 흑점이 전부.

남은 둘과 비교하자면 너무 초라한 세력이었다.

하지만 명한은 굳이 이를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껏 해온 모든 일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따라오는 법.

세상에는 아직 순리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가자.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소명회의 남은 이들을 이끌고.

회담의 장소로 향했다.

#

신교 측은 마창, 육마완이 이끄는 흑창대가 주력을 이루었다.

전원 창술사로 이루어진 부대로, 신교 내에서도 무력은 한 손에 꼽힌다.

그리고 이를 보좌하여 별개의 무력대 3개와 강유를 포함한 다수의 소궁주들도 참전했다.

한 명, 한 명 고수가 아닌 이가 없었다.

반대편, 무림맹의 경우는 참절검(斬絶劍) 공손수가 부대를 이끌었다.

전전대 고수로 나이가 이미 백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과거, 정마대전에서도 활약한 인물로 무공의 깊이가 천마에 준하다고도 알려진 불세출의 고수였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로 이루어진 4개 대를 운용했다.

그 숫자가 물경 천에 달할 정도였다.

"화려하게도 모여주셨군."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담 장소를 제공한 소명회.

명한을 필두로 한 측근과 흑점의 일원을 포함해서 스물이 안 되는 인원이었다.

다른 둘과 비교하자면 그 숫자와 위세가 매우 초라했다.

실제로 옅은 비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저게 그 유명한 소명회인가? 큭큭. 소문만 거창했을 뿐이지, 실속은 없군."

"뻔하지. 명가들이 뭘 믿고 저 어린놈을 지지하겠어? 전쟁이 싫어서 엉덩이를 뒤로 뺄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야."

"흥. 그럴 줄 알았다. 마교에서 뛰쳐나왔다고 해 봐야 마교지. 저 빌어먹을 놈들의 사주를 받아서 자리를 마련했을 거야. 시간이나 끌어 보겠다는 거지."

"큭큭. 우리가 두려운 모양인가?"

저들끼리 떠든다고는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전부 고수.

한마디, 한마디를 전부 또렷하게 들었다.

"명한."

"참아, 소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야."

발끈하는 은소소를 만류하며 명한이 회담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서로의 군대는 백 보 밖으로 물린 채, 핵심만 참여하는 자리였다.

신교 쪽에서는 육마완과 강유를 포함한 다섯이 움직였다.

"……무림맹은 참가하지 않을 셈이오?"

하지만 무림맹 쪽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가 회담에 응한 건 어디까지나 소명회의 명성을 믿고 정당한 삼자 회담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자니, 소명회는 그저 마교의 일부인 것 같은데. 어찌 우리가 믿고 소수만 회담에 참여하겠나."

"그쪽은 누구지?"

"백호대를 이끌고 있는 삼절도 하백이다."

"삼절도 하백! 누구인지 모르겠군."

"너……!"

슬쩍 건 도발로 기세를 잡고 명한이 무림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찌 됐든 당장의 회담은 성사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신교를 떠나서 새로운 터를 잡았소. 그러니 신교와의 공조는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거요. 무림맹 분들은 자리로 와주시기를."

"그 말은 신용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곤륜?"

무림맹의 앞으로 나오는 한 남자.

곤륜의 상징을 가슴팍에 달고 뚜렷한 적의를 감추지 않았다.

"무암이다. 죽은 무연이 내 동생이지."

"……아. 무연 도사님의 형님 되시는구려. 소림사에서의 일은 안타깝게 여기고 있소."

"흥! 모두를 속였을지는 몰라도 나는 아니다! 네놈이 간악한 속임수로 무연을 죽이고 무림맹의 결속을 방해했다는 걸 내가 모를 것 같더냐!?"

"당시의 일은 소림이 증명했소. 소림의 행동도 부정하는 거요?"

"소림도 속았을 뿐이지. 해서, 당시의 책임을 통감하고 허공 대사께서 맹주직을 반납하고 내려온 것 아니냐."

"그런 식인가.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지?"

이렇게 노골적이면 예의를 차릴 이유도 없다.

명한도 말을 낮추며 무암을 쏘아봤다.

"네놈 스스로 몸을 묶고 곤륜에 와서 그날의 일을 조사받아라! 죄가 없다면 그때 풀어주지."

"허튼소리! 네놈들을 어떻게 믿고 소백을 내어준단 말이냐!"

참다못한 은소소가 끼어들었다.

"하! 마교의 마녀가 입이 뚫린 대로 떠드는군. 대곤륜이 보장하는 일이다! 죄가 없다면 떳떳하게 와서 증명하면 될 것 아니냐!"

"곤륜의 늙은 도사들은 나이 먹고 망조가 든다더니 네 꼴이 딱 그렇구나! 곤륜 놈들이 소림사 일로 이를 갈고 있는데 우리가 미쳤다고 그 안에 들어갈까!"

"이 계집이 감히!"

우르릉.

무암의 발밑이 크게 흔들리며 우렛소리를 냈다.

경지에 이른 공력의 발현이었다.

"집어치워 늙은이!"

하지만 은소소도 이에 밀리지 않았다.

강한 발 구름으로 퍼지던 우렛소리를 짓누르고 사위를 침묵으로 만들었다.

무암의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였다.

"약관도 되지 않은 계집이 어찌?"

"무예를 익힘에 나이가 무슨 대수라고. 계속 그따위 허튼소리만 지껄일 거라면 나도 더는 참을 수 없다."

"큭. 어린 계집이 기고만장했구나! 네가 참지 못하면 뭘 어쩌겠다는 거냐!? 고작 그 숫자로 마교에 붙겠다고? 할 테면 얼마든지 해봐라! 맹의 힘으로 이 땅에서 마도를 쓸어버리겠다!"

무암은 물러나지 않고 되레 소리쳤다.

소명회의 전력이 고작 스물이라면 굳이 회담에 응할 이유가 없다.

더해서 무너뜨리면 되니까.

― 누가 감히 은공께 그따위 망발을 내뱉는가!!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어마어마한 공력이 실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문의 사자후에 비견할 만큼 대단한 힘이었다.

"크, 크윽! 누구냐!?"

무암이 겨우 내공을 몸을 보호하며 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회담 장소의 뒤편, 소명회 쪽으로 일단의 무리가 접근하고 있었다.

청색 도포에 태극 문양.

다름 아닌 무당파였다.

"막천우!?"

선두에 있는 건 무당의 장문이자, 은소소의 부친 막천우였다.

땅을 박차고 순식간에 거리를 격하여 날아와 은소소의 옆에 내려섰다.

"오랜만이외다, 은공."

"격조하셨는지요, 막 장문."

"하하. 은공 덕분에 나이를 잊고 혈기만 넘칩니다. 문내에서 기생충처럼 자리하고 있던 자들을 처리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그럼, 무당은 뜻을 정한 건가요?"

"무당의 도는 편협하지 않습니다. 한때 맹을 위해서 검을 들었던 우리이나, 그 기치가 쇠락해 감에 오롯이 무당만의 뜻을 따르기로 정했습니다."

도포를 펄럭이며 막천우가 검을 땅에 박고 소리쳤다.

"나, 막천우를 포함한 무당의 칠검제자 백은 소명회의 일원임을 천명하오!"

사위를 쩌렁쩌렁 울리는 선포였다.

단순하게 무림맹을 떠난 것이 아닌, 소명회 소속이 되었다는 걸 알렸다.

이젠 무림맹이 소명회를 마교의 일원으로 몰아서 치려 해도, 무당파가 걸림돌이 되는 상황이 돼 버렸다.

무암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막 장문! 어찌 무당산의 청백을 저런 사마외도를 위해 더럽히시오!"

"무암 도사. 옳고 그름은 옷의 색에 있지 않소이다. 정과 사. 마도를 떠나서 우리가 봐야 하는 건 그 본질이오. 우리 무당은 큰 아픔을 겪은 이후로 세상의 본질을 보기 위해서 노력했소. 지금의 무림맹은 결코 옳지 않소이다."

"어찌 무당의 장문이라는 자가……!!"

"무당만이 아니라면 어떠신가?"

"!?"

낯선 목소리가 또 끼어들었다.

이번에는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 무리였다.

화산파를 상징하는 매화 문양을 달고 바람같이 자리를 잡았다.

선두에 있던 화산 장문 악무군은 자신의 검을 발로 밟고 긴 거리를 날아서 일행 옆에 안착했다.

엄청난 수준의 어검비행이었다.

"직접 얼굴을 맞대는 건 오랜만이구려, 소 공자."

"서신으로 주고받은 것이 전부니까요. 그간 소득이 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하. 자하신공이 올바른 모습을 찾았으니, 화산에 매화가 만개한 것 같소이다."

"감축드립니다. 화산은 앞으로 영화가 끝이 없겠군요."

가벼운 포권으로 답을 한 뒤 악무군이 몸을 돌렸다.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유감이오, 무암 도사. 오늘부로 우리 화산도 무림맹을 탈퇴하여 소명회에 가입하겠소."

"아, 악 장문! 어째서 그런!?"

"난 저기 막 장문처럼 도의를 따진 건 아니오. 다만, 이쪽이 더 현실적으로 우리 화산에 도움이 될 것 같은지라."

"무림맹보다 저 작은 집단이 더 가치가 있다는 말이오!?"

"투자는 가치 있는 쪽에 하는 편이오. 현재의 맹은…… 그리 좋은 형태가 아니지. 난 화산을 위해 보다 나은 쪽에 도박을 거는 것이오."

"이, 이이……!!"

무암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무당에 이어서 화산까지.

한때 무림맹을 대표하던 두 문파가 통째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다들 마도에 빠졌군! 마도에 빠졌어! 화산과 무당까지 넘어가다니! 더더욱 정도 무림을 위해서 무림맹의 힘이 필요할 때다!"

"무암 도사는 우리가 마도를 위해서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시오?"

"허면, 아니오!? 대체 저 어린놈을 위해 일한다고 뭐가 나온다고!"

"무림맹보다야 낫소이다, 무암 도사."

"……! 백 장문?"

또 한 무리의 사람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꽤 복잡이 여럿인 것이, 다른 일행이 섞인 무리였다.

그 선두에서 백의를 휘날리며 들어오는 건 다름 아닌 아미파의 백순순.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건 무려 구검신녀였다.

"우리가 왜 소백 공자를 따르는 거냐고 물었습니까?"

"뭐, 뭐?"

"맹이 허덕이며 제대로 된 일 하나 처리하지 못할 때, 곳곳에서 수습한 건 저기 소백 공자였습니다. 소백 공자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이면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겠죠."

"대체 왜? 무림맹이 건재하거늘!"

"우리에게도 눈과 귀가 있습니다. 현재, 맹을 이루는 주축이 누구인지 모를 것 같나요? 갑자기 맹주가 바뀐 이유를 모를 것 같나요? 신교의 발족과 함께 사방에서 진행된 암살이 누구 사주인지 모를 것 같나요?"

그녀는 구검신녀라는 통로가 있기에 보다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믿기 어렵지만, 정황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의도적인 암수와 눈에 보이는 공작.

그녀는 일찍이 무당이나 화산과 은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여기에서 선언하죠. 우리 아미파는 앞으로 소명회를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이거 굵직하신 분들 뒤라 긴장이 되는군요. 백약문도 소명회를 천명합니다."

"주검산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흑점과 오월상단도 소명회의 일부임을 알려야겠군요."

우후죽순으로 이어지는 지지선언.

이미 소명회의 인원은 수백으로 늘어나 있었다.

신교나 무림맹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세력.

"이래도 소명회가 삼자회담의 축으로 부족하다고 보시오?"

"……"

당당히 일축임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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