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담에 앞서
군소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엉망이었다.
부대주 여운파를 비롯한 청룡대의 대부분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소란에 기웃거리는 인파도 상당수.
무림맹의 체면이 구겨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잠깐 멈춰 주시오!"
다급하게 외치며 다가갔다.
"흠? 그쪽도 여기와 한패인가?"
"청룡대 대주 군소라고 하오. 그대가 소명회의 소백이 맞소?"
"그래도 이쪽은 통성명이라도 제대로 하는군. 맞다. 내가 소명회의 소백이다."
"끄응. 아무래도 이번 일에는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소. 저 친구…… 여운파의 행동은 청룡대와 무림맹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오."
"호오. 관계가 없다?"
입술이 바짝바짝 탔다.
신교와의 전쟁이 코앞인데 소명회까지 적으로 돌리는 건 위험했다.
"알다시피 최근에 맹에 큰 변화가 생겼소.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 것이지. 저 친구의 사상을 제어하지 못한 건 내가 사과하겠소."
"사상과 제어라. 무림맹 수뇌부는 저쪽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건가?"
"다르다기보다는…… 복잡하오."
"알 것 같군. 그쪽은 무림맹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인가 보지?"
군소가 고개를 끄덕이고, 명한이 짧게 웃었다.
다행히도 무림맹 전체가 혼천의 영향에 들어간 건 아닌 모양이었다.
맹주를 바꾸고 군소 방파를 세력으로 끌어모아도 주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긴. 아무리 고를 써도 수적으로는 한계가 있겠지.’
구세력을 모두 쳐낼 수는 없었다.
"크, 크으윽……! 대주! 허튼소리 하지 마시오!"
그때, 쓰러져 있던 여운파가 일어났다.
명한의 손속을 생각하면 굉장한 회복력이었다.
"대무림맹을 이끄는 것에 어찌 저런 박쥐를 포용한단 말이오! 우리의 편이 아니면 적이란 말이외다! 당장 청룡대 전원을 소집해서 저자들을 처리해야 하오!"
"끄응. 허튼소리는 네놈이 하고 있지 않더냐. 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중립 세력을 핍박하는 무리였다는 거냐? 우리는 무림맹이다. 행동에 질서가 없다면 무뢰배와 다를 바 없어."
"시…… 끄러워! 당장 저놈들을 공격하란 말이야! 모든 건 무림맹을 위한 일이라고! 대체 왜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냐! 이러니 우리가 마도 따위에게 무릎을 꿇은 것 아니냐!? 너 같은 썩은 장작들 때문에!!"
"여 부대주!"
"닥쳐! 닥쳐! 닥쳐!!"
여운파는 아예 점혈까지 풀고는 군소에게 달려들었다.
방어는 도외시한 동귀어진의 수법이었다.
깜짝 놀란 군소가 검막을 치고 회경의 수법으로 힘을 흘렸지만, 여운파의 공세는 그것을 그대로 찢으며 들어왔다.
턱 아래에 검이 닿았다.
터엉―!
하지만 그 검이 목을 관통하기 전.
명한의 손끝이 검날을 잡아서 멈춰 세웠다.
어마어마한 힘의 여력이 열기로 치환되어 바닥으로 퍼지고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었다.
"혈기가 머리에 닿았군. 고가 이지를 잠식하고 혈기를 폭주시켰어."
"고?"
"대주 정도 되면서 그것도 모르고 있었나? 저놈들 몸에는 벌레가 하나씩 심겨 있어. 내공을 폭발적으로 늘려주고 모든 능력을 배가시키지. 저런 군소방파의 인물이 갑자기 실력자가 된 것이 이상하지도 않았나?"
"……의아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고라니."
"뭐, 이놈들 딴에는 정의라고 여기는 것 같지만……"
명한은 그대로 여운파를 제압한 뒤, 머리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눈알이 뒤로 넘어가고 입을 떡 벌리며 꺽꺽거렸다.
사람 잡을 것 같은 모습에 군소가 움찔했지만, 그보다 벌레를 꺼내는 것이 먼저였다.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벌레가 명한의 손끝을 타고 딸려 나왔다.
"그, 그게 대체 무엇이오!?"
"혈고. 남만에서 쓰던 고의 개량판이지."
명한은 그대로 벌레를 밟아서 터뜨렸다.
"꺼억! 꺽!!"
그러자 여운파가 몸을 벌벌 떨면서 발작했다.
고는 숙주에 기생하며 생명을 빨아먹는 일종의 기생충.
본질적으로 숙주에 연결되어 그 생명을 공유한다.
고가 죽는다는 건 숙주의 죽음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가만히 있어라, 머저리."
물론, 그 사실은 명한도 알고 있다.
벌벌 떠는 여운파를 지그시 누르고는 그의 백회혈을 두드렸다.
고의 죽음으로 깨진 생명의 그릇을 억지로 눌러서 닫은 격이다.
죽은피를 토하며 그대로 푹 쓰러졌다.
"주, 죽은 것이오?"
"안 죽었어. 고를 제거하고 백회를 억지로 닫은 거야. 목숨은 건졌지만, 대신 평생 동안 무공은 못 쓰겠지."
"폐인이 됐다는 거요?"
"아니면 죽게 내버려 둬야 했나?"
"……"
무인에게 무공과 생명은 저울질하기 힘든 대상.
군소가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저었다.
눈이 있고 머리가 있으니 조금 전의 명한이 나쁜 의도로 행동한 것이 아님은 알았다.
문제는 이후였다.
"저런 벌레가 우리 청룡대원들에게 전부 심어져 있다는 거요?"
"전부는 아니겠지만, 상당수는 그럴 거다. 이들을 고를 받아들이고 상승 무공을 얻는 것으로 신분 세탁을 노렸어. 맹의 주류는 이제 곧 그들이 될 것이고, 나머지는 차츰 밀려나겠지."
"대체 왜 저런 벌레를……"
"말했잖아. 신분 세탁이라고. 힘이 없어 주류에서 밀려난 이들을 달콤한 말로 설득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거야. 게다가 신교와의 싸움이라는 좋은 명분도 있지. 영웅이 되고자 하는 청년들을 막기는 어렵지."
"허어."
군소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믿어야 할지.
믿는다면 이걸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청룡대의 대주이나, 그렇다고 시대의 영웅은 아니었다.
"후우. 내가 네게 뭔가를 요구하는 건 웃긴 일이겠지. 하지만 굳이 한 가지 충고를 하자면…… 이번 전쟁에서 손 떼. 이건 정과 마의 싸움도, 선과 악의 다툼도 아니야. 그저 추잡한 목적으로 둘러싸인 진흙탕일 뿐이지. 이 상황이 싫다면 뜻 맞는 이들일 데리고 떠나."
"하, 하지만 청룡대의 대주가 그런 식으로 도망친다면……"
"죽고 나면 그것도 없을 거야."
군소가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 대원들을 바라봤다.
이미 머리에서 벌레를 꺼낸 시점부터 질린 표정의 이들이 여럿이었다.
이런 걸 머리에 박으면서 싸우는 것이 정의다?
군소는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물러나겠소."
무인이기 이전에 사람이었다.
#
상황을 정리하고 난 뒤, 명한은 흑점의 분타로 이동했다.
이미 이월이 현장을 준비해둔 터라 각지에서 건너온 자료로 빼곡했다.
무림맹의 진군 방향과 세력의 군집 영역.
신교에서 나온 대응 병력 등도 전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전 장로. 예상 마찰 지역은 어디일 것 같나?"
"아무래도 이 정도 병력이 대치하기에는 이곳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화남 평야. 금장가의 맞은편이군."
명한이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장소가 금장가 인근이라는 것은 단순한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할 셈이야? 지금 기세대로라면 충돌은 피할 수 없어 보이는데."
"신교에서 물러나도 무림맹은 멈추지 않을 거야. 고를 통한 의식의 지배는 상당한 수준이지. 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이상 목숨을 걸고 덤벼들 거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 이건가."
"……아니. 그래도 최대한 할 수 있는 건 해봐야지."
양피지를 하나 잡아 일필휘지로 글을 써 내려갔다.
"각각 신교와 무림맹 쪽에 전달해 줘."
"양쪽에 모두 말입니까?"
"아까 그 무림맹 놈을 봤잖아. 이대로 말단끼리 충돌하게 두면 전면으로 번질 수밖에 없어. 수뇌부를 모아서 처리하는 편이 나아."
"응해줄까요?"
"응할 수밖에 없어."
무림은 결국 실력으로 대변되는 세계.
수뇌부에 앉은 자들이라면 명한의 세력과 힘을 좌시할 수 없다.
전쟁에 앞서서 뒤를 안전하게 하는 건 병법의 기본.
반드시 응한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건데?"
"기다림."
"기다림? 뭘?"
"혼천의 행보는 과하게 급해. 파운의 일로 실패를 겪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그런데, 이런 급박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이건 서복이 초조하다는 증거야."
서복은 서불을 확보하는 일에도 실패했다.
그의 육신은 붕괴하고 정신은 시간에 갉아 먹힐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파운을 택한 계획도 실패했으니, 그의 선택은 이제 하나뿐이다.
전면전을 통한 옛 황제의 심장.
하지만 지금처럼 천기가 어지러운 세상에서 급한 선택은 실수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번에 혼천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
그림자를 빛으로.
목적은 분명했다.
#
천마산에서 백 리가량 떨어진 한 야산의 중턱.
반쯤 무너진 절간 앞에, 돌로 된 바둑판이 놓여 있다.
사람이라고는 오갈 것 같지 않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바둑판을 마주하고 돌을 올려놓고 있었다.
탁. 탁. 탁.
대화는 없이 오로지 돌을 놓는 소리만 계속해서 이어졌다.
"머리에 근심이 가득하구나."
그러다 어느 순간에 한쪽의 입이 열렸다.
묵직한 목소리에 돌 놓는 소리가 멈추고, 여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천기가 이만큼이나 흐려져 있습니다. 눈앞의 작은 일조차 알아보기 어려우니, 어찌 근심을 내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죽지 않는 것이 없고, 변하지 않는 것도 없다. 순리를 따름에 최선을 다했으면 그 뒤로 남는 것은 후련함뿐이지 않겠느냐."
"저는 아직 모든 것을 비우지 못했나 봅니다."
"후후, 비움이라."
묵직한 목소리의 주인이 가볍게 웃으며 돌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달려 바둑판에 닿은 돌은 희미한 파문을 판 뒤로 퍼뜨리고 남은 모든 돌을 자기의 위치에서 조금씩 어긋나게 만들었다.
가벼운 힘, 가벼운 수.
하지만 맞은편 여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영(榮)에 이르신 겁니까?"
"그 아이를 만나고 벽 너머의 삶을 확신했다. 허나, 그곳에 있는 건 신도 악마도. 하물며 어떤 이치도 아니더구나. 그저 같은 세상의 연속이었어."
"그 말씀은……?"
"천기라는 건 그저 삶의 영속을 위한 작은 아이들의 옷과 같은 것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따라오는. 당연한 섭리가 없다면 작은 아이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견디고 살겠느냐."
"허면, 더욱 그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킬 옷도 없는 이런 상황에서 그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적(赤)아."
"네, 천마시여."
깍듯한 답에 남자.
아니, 천마가 말을 이었다.
"너는 그 아이가 아직도 옷에 의존해야 하는 작은 것으로 보이더냐?"
"그건……"
"내가 그동안 한 수많은 선택 중에 그 아이는 없었다. 전쟁을 이어가고, 수많은 문파를 굴복시키고, 후대를 생각하여 정 없이 여인을 취했지. 허나, 그 많은 행동 중에 그 아이를 위한 건 없었어."
"그 말씀은?"
"오롯이 인과의 밖에 존재하는 것. 이 땅의 모든 것들 중, 유일하게 자유로운 존재가 있다면 바로 그 아이다. 그렇기에 오래된 망령을 쓰러뜨릴 수 있는 것도 그 아이뿐이지."
천마가 다시 웃으며 바둑판 위에 돌을 올려 두었다.
어긋났던 돌들은 어느새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완벽한 형국을 이루고 있었다.
적은 입을 달싹이다 그만두고 마찬가지로 돌을 집어 들었다.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차마 묻지 못한 질문은 삼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