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3화 (203/235)

삼자 균형

상황은 이랬다.

접경지역의 문파가 괴멸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자 무림맹 쪽에서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

맹에 가입된 문파의 정예들을 소집하여 하나의 대(隊)로 편성하여 출병했다.

그 숫자가 무려 1천.

화경을 넘긴 고수가 수십에 그 이상도 적지 않은 엄청난 규모였다.

"신교 쪽은?"

"마창, 육마완이 무력대 3개를 이끌고 접경지역으로 이동 중이야. 수는 오백이지만 전력으로는 비슷한 수준이지."

"천마는 아직 움직이지 않는 건가?"

"글쎄. 섣불리 움직일 상황은 아니라는 거겠지."

명한이 머릿속에서 서로의 전력을 셈했다.

흑점의 정보를 기반으로 비교해도 쉽사리 한쪽 손을 들기 어려웠다.

양패구상을 하기 딱 좋은 균형이었다.

"이대로 충돌하면 혼천만 좋은 일 시켜주는 거야. 최대한 빨리 소식을 돌려서 대응할 전력을 소집해."

"그들이 응해줄까?"

"움직일 거야. 현 상황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건 우리만이 아니야. 겪어본 이들이라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지."

화산, 무당, 주검산장, 백약문……

한 차례 홍역을 앓고 난 이들은 선택지를 달리할 수밖에 없다.

명한이 보여주었던 힘이나 여러 도움은 충분한 설득력이 된다.

문제는 이 삼자균형을 깨뜨리려는 요인.

"무림맹 쪽 정보가 더 필요해. 임시 맹주로 있는 허공 대사가 이 정도로 일을 급하게 처리하는 사람은 아니야. 뭔가 변화가 생긴 게 분명해."

"역시 혼천에서?"

"전쟁을 원하는 건 그들이니까. 파운의 일로 상처가 적지 않아 한동안은 움직이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나……"

아무리 흑점의 정보력이 좋아도 한계는 분명히 있다.

무림맹 내부의 핵심 정보는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우리만이라도 현장으로 가자. 전면전으로 번지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지."

눈앞이 어두워도 당장은 어쩔 수 없다.

피해갈 수 없는 일이라면 부딪치는 것이 최선.

소명회의 첫 출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

조금 이른 시간.

갑자기 찾아온 요의에 서불이 부스스 일어났다.

예전 납치 이후로는 호릉, 호랑과 함께 생활하고 있던 터라 뒷간이 멀었다.

‘추운데.’ 작게 중얼거리며 바지춤을 잡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찬 바람이 훅 불어와 솜털이 비죽비죽 섰다.

"하아아암. 다들 떠나서 그런지 조용하다."

전날 장원이 떠들썩하더니 우르르 떠났다.

‘큰일이 났다.’ 정도는 파악하지만, 자세한 건 관심이 없었다.

조용하니까 무섭네.

홀로 중얼거리며 뒷간으로 총총 걸어갔다.

"히이익! 누, 누구세요!?"

그리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서불이 뒤로 쿵 주저앉았다.

"……어? 황상 아저씨 맞죠?"

뒤늦게 얼굴을 확인하니 귀신은 아니었다.

뒷간 앞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 중얼거리는 사람은 도력제였다.

언제나 황상, 황상 하기에 서불은 그를 황상 아저씨라 불렀다.

바지를 탁탁 털고 쪼르륵 돌아가서 도력제 앞에 섰다.

"황상 아저씨 여기에서 뭐 해요?"

"……"

"아저씨……? 악!"

대꾸 없는 도력제에 서불이 갸웃거리는 찰나.

도력제가 번개처럼 손을 뻗어서 서불의 한쪽 팔을 잡아챘다.

억센 손에 저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가야 해. 가야 해. 가야만 해!"

"화, 황상 아저씨! 아, 아파요!!"

"나는 꼭 가야 한다! 나만이 할 수 있다!"

"황상 아저씨!"

"나는……"

흥분하여 점점 목소리를 키우던 도력제는 어느 한순간, 갑자기 말을 잃고는 푹 쓰러졌다.

서불은 두려움과 놀람에 얼어붙어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도력제의 마지막 말은 들을 수 있었다.

"……금장가로 가야 해."

이내, 소란을 듣고 장원 곳곳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금장가’ 서불이 그 이름을 곱씹었다.

어쩐지 잊으면 안 될 것 같은 이름이었다.

#

명한 일행은 최대한 빠르게 접경지역으로 이동했다.

인근 성에도 이미 소문이 다 퍼진 터라 분위기가 흉흉했다.

무림의 격돌에 관은 관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의 인원이 충돌하는데 아예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긴장한 군 병력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분위기가 험악하네."

"그 정도 숫자가 움직이는데 모른 척하기는 힘들지. 성주도 반응을 두고 고민하고 있을 거야."

"여차하면 관부와도 싸울 수 있다는 말이군."

이래저래 피해가 가늠이 안 되는 범위.

최대한 확전은 피해야 했다.

"일단 이쪽의 흑점 분타와 접선해서 상황을 파악해 보자."

"그래. 이쪽 일은 이쪽 사람들이…… 응?"

말을 잇던 은소소가 멈칫했다.

거리 끝쪽에서 뭐가 이상한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소백. 저거 전창소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무슨 일이지?"

흑점의 장로까지 올라간 전창소였다.

일단의 무리에게 둘러싸인 채 무언가를 토로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꽤 흉흉한 터라 사람들은 피하기 급급했다.

"전 장로.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아! 태사님 오셨습니까."

인파를 가르며 전창소가 명한 앞에 무릎을 굽혔다.

주변 인파는 그 모습에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겉으로 봐서는 겨우 약관이나 됐을까 싶은 명한이니, 이상한 터였다.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 분타를 찾던 차였다. 여기는 무슨 소란이지?"

"그건……"

"그쪽이 흑점의 높은 인물인가?"

막 전창소가 답할 찰나.

뒤쪽 인파의 한 인물이 끼어들었다.

잘 차려입은 복색에 귀티가 흐르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흐음. 그쪽은 누구지?"

"무림맹 청룡대의 여운파다. 흑점의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겠지."

"청룡대라. 무림맹의 사람이 흑점은 무슨 일로 찾는 거지? 무림맹도 따로 정보대를 움직이지 않나?"

"마교의 싸움이 코앞이다. 쓸 수 있는 수단은 모두 가용해야지. 너희 흑점은 정마지간의 위치에서 중립이라 말하고 다녔다지? 이번에는 그런 편법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무림맹의 편을 들라?"

"무림맹이야말로 정의다. 당연한 일 아닌가?"

턱을 들고 답하는 얼굴에는 자긍심이 넘쳐흘렀다.

"무림맹이 정의인 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흑점은 어디까지나 중도 문파. 둘 중 어느 쪽도 편들 생각이 없다."

"그런 소리는 안 먹힌다고 했을 텐데? 무림맹을 돕지 않는다면 너희를 마도와 한패로 생각하겠다! 그 결과를 책임질 자신은 있나!"

"이런 시정잡배를 봤나. 네가 뭔데 흑점의 정체성을 두고 왈가왈부냐. 결과라고? 네놈이야말로 흑점을 적으로 돌린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 거냐?"

"감히!!"

놈은 그대로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성 내에서 관군이 돌아다니고 있음에도 여차하면 뽑겠다는 태세였다.

주변 분위기가 흉흉해지고, 슬쩍슬쩍 구경하던 민간인들은 서둘러 문을 닫고 도망쳤다.

‘반응 봐라?’

보통이라면 나올 수 없는 과격함이었다.

"너. 어디서 뭐 하던 놈이냐? 청룡대 이전의 신분이 뭐지?"

"흥! 이제 와서 겁이라도 먹은 건가? 걱정할 것 없다. 나는 오로지 무림맹에만 충성하는 사람이다. 예전 방파 따위는 의미가 없어."

"의미가 없다고?"

"무림명문이라는 자들은 언제나 저들끼리만 무공을 공유하지. 진실절기는 절대로 외인에게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림맹은 달라. 맹주께서는 모든 비전들을 맹의 사람이 자유롭게 익힐 수 있게 했다. 그러니 나는 오직 무림맹의 사람이다."

"……하."

과한 반응의 답은 이것이었다.

지금 무림맹을 장악한 ‘맹주’라는 인간은 본래의 전력이었던 구파를 제외.

나머지 인력에게 무공을 공급하는 것으로 신망을 얻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아마도 ‘고’가 있을 터.

상승 무공에 고의 힘이 더해지면 중소문파의 인력으로도 충분한 힘을 낼 수 있다.

막대한 충성심 또한.

"그 충성이라는 게 이런 거냐? 대체 무림맹이 언제부터 중립 방파들을 무력으로 억압했지? 그건 너희가 말하는 마교와 다를 바 없지 않나?"

"시끄러워. 무림맹이 중원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도 마교는 뿌리 뽑아야 한다.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건 적일 뿐이야."

"결국, 힘과 권력을 위한 변명일 뿐이었네."

"우린 정의다. 정의에 힘과 권력이 따라오는 건 당연한 이치.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손을 씻고 무림에서 떠나라."

자신들이 당하던 억압을 그대로 풀어내겠다는 심보.

이래서야 정도, 사도, 마도의 차이가 없다.

명한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중재를 위해 온 몸이지만, 이런 개 같은 논리에 굴복할 수야 없지. 원한다면 덤벼라. 네놈들 몸뚱이에 무엇이 힘인지 아프게 새겨주마."

불같이 타오르는 힘.

못난 놈들을 위해서 회초리를 들었다.

#

청룡대 대주, 군소는 구겨진 얼굴을 펴지 못했다.

자신이 무림맹의 대주직을 맡은 것이 벌써 10년.

정마대전 이후로 무림맹이 잠정 해체되었을 때도, 그 직위는 유지되어 있었다.

종남파의 일원으로 언제나 이 직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려고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러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갑작스러운 맹주의 교체와 대대적인 개편.

시대에 발맞춘 반응이라기보다는 급변에 가까웠다.

낯선 방파의 인물들이 대거 들어오고, 그 행동 또한 전과는 달라졌다.

"그러니까 흑점을 협박하러 갔다는 거냐?"

"네, 대주. 중립은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무림맹에 포섭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미친 건가. 흑점이 언제부터 중립을 지켜왔는지 몰라? 괜히 압력을 넣었다가 마도로 넘어가면 어쩌려고?"

"저도 그렇게 설명을 했지만……"

난처한 부관의 설명에 상황이 훤히 그려졌다.

최근에 청룡대의 부대주로 임명된 여운파라는 놈.

자신과 비슷한 외부 출신으로 무리를 꾸리더니 번번이 결정에 반발하고 나섰다.

자기 딴에는 무림맹을 위한 일, 이라며 주장하는 것 같지만 군소가 보기에는 전혀 아니었다.

어쩌다가 좋은 무기를 주운 철부지의 객기였다.

"대, 대주! 큰일 났습니다!"

그때, 막사 문이 거칠게 열리고 대원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이냐?"

"정말로 큰일 났습니다! 지금 저잣거리에서 여운파 부대주와 흑점 놈들이 붙었습니다!"

"……기어코 일을 저지른 거냐? 몇이나 다쳤어?"

"전부 제압했습니다."

"전부? 이곳에 전창소도 와 있지 않았나? 그는 화경의 고수라고 아는데."

"아뇨, 그게…… 제압된 건 저희 쪽인지라."

"뭐?"

놀란 군소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행태가 엉망이고 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나 여운파 등은 상당한 고수였다.

흑점에 전창소가 있어도 전부 당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만에 하나 가능성이 있다면……

"혹시, 흑점 본타에서 사람이 온 건가?"

"네, 네.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확인은 못 했지만 젊은 남자였습니다."

"젊은 남자라고? 이름은?"

"이름이…… 흘려들어서 정확한 건 아니지만, 소백이라고 들은 것 같습니다."

"소백!?"

아예 뒤로 넘어갈 듯 놀랐다.

아직은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이름일지 모르나, 맹의 핵심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무림맹에 무림맹주가 있고, 신교에 천마가 있듯이.

소명회에는 소백이라는 인물이 있다.

"어디냐! 당장 안내해!!"

절대로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사람.

맹에 내려진 지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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