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불씨
새벽의 어스름이 깔린 시간.
산새마저 무거운 고개에 끄덕이고 찬 바람은 주변을 훑으며 지나갔다.
사위는 조용하여 흔한 소음조차 없었다.
적막을 두른 새벽의 고요.
그 위를 일단의 무리가 밟으며 달리고 있었다.
"……"
얼굴을 검은색 악귀 탈로 가리고 전신을 야행의로 두른 무리였다.
소리 없이 땅을 차고 벽을 넘어 담장 안으로 들어섰다.
새벽 기운에 꾸벅거리는 한 장원의 무인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선두의 인물이 그림자처럼 스며들어서는 무인의 목을 찔렀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절명했다.
스슷. 슷.
이어, 그의 신호에 맞춰 남은 무리도 안으로 속속 들어왔다.
그 숫자가 수십에 하나같이 높은 수신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선두의 인물은 시체를 조용히 땅에 내려놓고는 안뜰로 향했다.
"큭!", "꺽!" 장원을 순찰하던 무인들은 만날 때마다 차례대로 죽어 나갔다.
손속에 망설임이 없고 살인에 확신이 찬 모습이었다.
넓은 장원 수 명의 호위를 모두 척살하고 가장 안쪽까지 이동했다.
"하암. 이 새벽부터 무슨 연공이람."
때마침 안채에서 부스스 걸어 나오는 한 남자.
선두의 야행인이 망설임 없이 거리를 좁히고는 단검을 찔러 넣었다.
"뭐야!"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기민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한 뒤, 자연스럽게 퇴법으로 반격했다.
바람이 터지고 야행인이 밀려났다.
"누구냐! 감히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기어들어 온 거냐!?"
"……"
"헛! 장삼! 누계! 이것들이 감히!!"
뒤늦게 시체를 발견한 남자가 격노하여 달려들었다.
경지에 오른 내공으로 손등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흔치 않은 내공, 흔치 않은 출수였다.
"헛!?"
다만, 상대가 좋지 못했다.
야행인은 남자의 투로를 전부 읽고 있었다.
장법의 궤적을 비틀어 간격을 좁히고는 단검으로 심장을 찔렀다.
너무나 교묘한 수에, 완벽한 공격이었다.
제대로 된 싸움도 못 해본 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너, 너…… 어떻게 가문의 무공을!?"
"……불씨가 되십시오, 형님."
"!?"
익숙한 목소리.
남자가 부들부들 떨면서 야행인의 복면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밀려 올라가는 천에 눈에 익은 얼굴이 망막에 새겨졌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그런 얼굴이었다.
한때는 호형호제하던 사이.
지금은 후계 다툼으로 가문을 벗어난 자신의 죽마고우였다.
"네가…… 왜?"
"모든 걸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함입니다."
"그…… 쿨럭!"
단검을 비틀어 숨통을 끊어 놓는 야행인.
한때의 죽마고우를 죽임에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꺄아아악!! 교유야!!"
"도련님! 교유 도련님!"
"적이다! 암습이다!"
이내, 싸움 소리를 듣고 일어난 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장원 곳곳에 불이 들어오고 무기를 챙겨 든 무인들이 쏟아졌다.
암습이라는 개념에서는 실패였다.
하지만 야행인은 별다른 동요 없이 복면을 고쳐 쓰며 주변에 명령했다.
"전부 쓸어버려. 목격자는 남기지 않는다."
철저한 살인멸구.
보는 이 없는 멸문이면 결과는 같았다.
이곳은 신교와 무림맹의 접경지역.
화약고였다.
#
마른 산에 불이 옮겨붙듯, 사건은 연달아 터졌다.
신교가 있는 천산의 경계부터 무림맹이 터를 잡은 숭산의 외곽까지.
중간 지역이라 인식하는 장소에서 계속된 살육극이 나왔다.
생존자는 전무.
장원은 불에 타고 시체는 방치된 것으로 상황을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이 추측이지 사람들의 생각은 같았다.
"마교가 움직인 겁니다! 마교가!"
무림맹 부맹주 한공이었다.
전형적인 주전파이며 호전적인 성격을 지녔다.
"아직 섣불리 판단할 때는 아니지 않소."
반대하는 건 숭산파 출신의 예공.
소림사 사건 이후로 중도 출신이 자리를 잡으면서 높은 곳까지 오른 인물이다.
직책은 다르지만, 입김은 한공과 같았다.
"마교가 아니면 대체 누가 그런 짓을 저지른단 말입니까!? 경계지역의 모든 문파가 다 쓸려나간 후에야 관심 가질 생각입니까!?"
"섣불리 신교의 짓이라고 단정 지었다가 아니면 후폭풍을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시오. 일단은 상황 조사가 우선이외다."
"하! 예공은 그리 여유가 넘쳐서 다행이구려! 난 아직도 마교 놈들에게 당한 상처가 쑤셔서 잠도 안 오는데!"
"또 그리 예전 일을 가져오기는…… 여유가 아니라 신중하자는 말이오."
"그게 그 말 아닙니까!"
"아니……"
"그만!"
격화되는 대화를 제3자가 막았다.
임시로 무랭맹주를 역임하고 있는 소림사의 허공이었다.
큰 사건 이후로 명성에 따라 임시직을 맡기는 했으나, 영 껄끄러운 자리였다.
"아미타불. 두 시주께서는 부디 진정해주시기를."
"……맹주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흥. 그리하면 맹주께서 의견을 말씀해 주시면 될 것 아닙니까?"
이런 상황부터가 그랬다.
무림 전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어딘가 이상했다.
상황도 시기도 방법도 전부 정상적이지 않았다.
직접 관여하지 않았어도 오랜 연륜으로 그 사실을 파악할 정도의 역량은 있었다.
하지만 주변은 그런 판단의 기다림을 용납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선택을 해서 무림맹을 움직이기를 종용했다.
"아미타불. 현재 각지의 맹도들이 움직이고 있소이다.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를 위한 수를 강구하고 있으니 한공 시주는 조금 더 기다려 주시기를."
"흥. 그럼 맹주도 예공과 같은 의견이라 이겁니까?"
"무림맹이 움직이면 신교도 같이 행동을 취할 거외다. 그리하면 정마대전은 피할 수 없을 터. 또다시 피를 흘리는 것만은 피해야 하지 않겠소."
"어차피 저들 아니면 우리가 피를 흘리게 돼 있습니다."
"한공 시주……"
"됐습니다. 맹주의 생각이 달라질까 기대했지만, 이제 보니 허튼 바람이었나 봅니다. 역시 새 시대에는 새로운 바람이 필요한 모양이지요."
"한공 시주?"
답은 필요 없었다.
한공의 손짓에 갑자기 수십의 인원이 장내로 난입했다.
숫자도 숫자였지만, 그 하나하나가 허공의 감지 영역을 벗어날 정도의 고수였다.
놀란 얼굴을 추스르기도 전에 이미 그를 포위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무림맹은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악을 씻고 정의를 실현하는 단체로."
"……허선 사제?"
한 걸음 늦게 안으로 들어오는 소림의 승려.
허공의 사제이자, 강경하게 무림맹 집결을 요구하던 허선이었다.
소림사 사건 이후로 모습을 감췄던 그가 지금 다시 이렇게 나타났다.
"오랜만입니다, 허공 사형."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정의입니다, 사형."
"정의라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지난 일을 잊은 겁니까, 사형? 본사에서 마교 놈들이 어떤 수작을 벌였는지 기억도 못 하는 겁니까? 그 치욕을 저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때의 일은 어디까지나 곤륜의……"
"아니요. 저는 그날의 전모를 파악했습니다. 마교의 간악한 수작. 내분을 일으켜서 우리의 전력을 갉아먹으려는 계획이었지요."
일을 저지른 건 곤륜의 무연이었지만, 허선은 화살을 신교로 돌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가, 허선 사제."
"말하지 않았습니까. 정의라고. 정마대전의 패배 이후로 나태해진 무림맹의 틀을 바로잡을 겁니다. 악을 멸하고 정의를 바로잡는 정도의 기둥으로."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날 습격하는 건가? 그게 정의라 할 수 있는가?"
"썩을 걸 도려내는 걸 망설이면 몸통마저 썩고 맙니다. 용기가 없는 자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셔야죠. 이제 무림의 정의는 제가 이끌겠습니다."
"자네…… 제정신이 아니로군."
"망가진 건 제가 아닌 이 세상입니다."
허선이 가사를 펄럭이며 내공을 집중시켰다.
황금빛이 부동명왕의 형태로 그의 등 뒤로 떠올랐다.
무시무시한 압력이 주변을 짓눌렀다.
"어, 어떻게 자네가 금강부동명왕신공을?"
"정의의 힘입니다, 사형."
쏟아지는 황금빛.
이날 무림맹의 맹주가 바뀌었다.
#
명한은 일단 소명회로 돌아와 상황을 추슬렀다.
워낙 여러 일이 한 번에 벌어진 터라 정리가 필요했다.
"황제진경은?"
"그 문제도 생각 중이야."
황제진경은 황제가 기록했다고 알려진 천혜의 보물.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면 누가 저자인지는 뻔했다.
불사종법을 위한 천기자의 실험 기록.
"어쩌면 그 안에 천기자의 약점 따위가 기록되어 있을 수도 있어."
"자기 약점을? 굳이 그럴 리가 있나?"
"불사종법은 천지간의 법칙을 모두 뜯어고치는 사법이야. 그 자체가 기적이며 동시에 약점이지. 옛 황제를 통해서 무언가를 하려 했다면 내용도 적혀 있을 거야."
"근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은소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기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황제진경을 방치해 두었었잖아. 사본은 혈교가 사용했고, 진본은 명왕도에 있었어. 자신의 약점이 될만한 책을 굳이 남겨둘 이유가 있을까?"
"……흠."
단순히 기록이기 때문에 남긴다, 라는 건 말이 안 된다.
천기자 정도의 인물이라면 모든 방법과 과정을 기억해 두는 건 일도 아닐 터.
굳이 책을 남겨두는 건 따로 이유가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대접이 좀 그랬지.’
마음대로 사본을 만들어 쓰는 혈교나 명왕도에 방치 중이던 진본.
정말로 아끼는 물건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
"아니. 아니지. 아끼기 때문에 더 가까이 두기 힘들었을 수도 있어."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흔히 애증이라고 하잖아. 강한 애착이 있지만, 두 눈으로 보기에는 괴로운 것들. 그래서 남에게 맡겨 두거나 먼 곳에 보관하는 거야."
"천기자에게 황제진경이 그런 물건이다?"
"신기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황제를 떠올리게 해서일지도."
사랑했던, 하지만 자신 때문에 죽은 인물의 유품.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일련의 상황이 납득되기도 했다.
"그럼, 어떻게든 물건을 탈취해야 한다는 건데."
명한이 고개를 젖히고 생각을 정리했다.
결론은 단순하지만, 방법이 쉽지 않았다.
현재, 황제진경이 보관되어 있을 거라고 추정되는 장소는 ‘금장가’라는 가문.
이름 자체로 보자면 단순하지만, 상황이 조금 복잡했다.
"금장가는 황족 혈통이 명맥을 유지하는 가문이지?"
"맞아.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명을 이어받은 황족이지. 작금에 와서는 크게 영향력이 있는 집단은 아니지만……"
"문제는 위치지."
명한이 뒷머리를 긁으며 끄덕였다.
현재, 금장가의 위치는 신교와 무림맹의 정확하게 가운데.
모든 세력의 힘이 집중되는 핵심에 위치해 있다.
그야말로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
"잘못 움직였다가는 쌍방을 모두 자극할 위험이 있어."
"신교 쪽은 어떻게 되지 않을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현장에 대기 중인 무력대는 보고 없이 행동할 자유가 있거든. 무림맹의 움직임을 잘못 꿰어내면 그대로 충돌이지."
"하아. 그야말로 살얼음판이네."
일련의 사태가 있기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폭발 직전.
생각보다 위험도가 높았다.
"도련님!! 도련님!"
그때였다.
밖에서 향아가 다급하게 외치며 뛰어 들어왔다.
헐떡이는 숨만큼 급한 소식을 들고 온 것처럼 보였다.
"무, 무림맹과 신교가 충돌했어요!!"
아니, 그보다 급했다.
명한이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