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화 (201/235)

이면의 이야기

오래된 사당.

반쯤 불타버린 잔해 위에서 한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혼천의 주인이자, 한때 환상루의 제일가는 기재였던 인물 서복이다.

켜켜이 쌓인 재를 손으로 털어내며 속 깊은 곳에서 숨을 내쉬었다.

붉은 기운이 안개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르신!"

그 모습에 주변 수십의 동도들이 움직이려 하자, 서복이 손으로 제지했다.

침묵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내 과오다."

다시 입이 열린 건 그로부터 한참 후.

자조 섞인 목소리였다.

"속세의 미물을 너무 간과했다. 그들의 각오도, 생각도, 판단도. 모두 잘못 생각했어. 이번 손실은 크구나."

"어찌 이게 어르신의 과오란 말입니까. 전부 저희가 모자란 탓입니다."

"아니. 이 모든 건 내 실수다. 처음부터 어중간한 태도를 보이면 안 됐어."

"어르신?"

서복은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천지간의 기운이 요동치고 주변이 어둠으로 휩싸였다.

불길함을 느낀 혼천의 인물들이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이미 속박당한 후.

어둠에서 피어난 기운이 그들 하나하나를 파고 들어갔다.

"어, 어르신!?"

"크아악! 어르신 어째서 이러시는 겁니까!?"

"어르신! 어르신!! 우리는 어르신을 모시는 충실한 종복입니다!"

고통과 충격이 섞인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안다. 그러니 그 충심을 내게 바치거라."

서복은 망설임이 없었다.

자신을 위해 모여준 이들의 영혼을 쥐어짜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파운과 명한의 공격으로 상처 입은 혼을 치유하고 깨진 부위를 덧대었다.

오래 묵은 혼은 이미 그 형태를 잃은 지 오래인지라, 자연적인 치유는 불가능했다.

남을 먹고 자신을 부풀리는 것만이 서복이 살 수 있는 방법이었다.

투둑. 투두둑.

하지만 그조차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얼굴이 도자기처럼 갈라져서 조각조각 부서졌다.

그는 황급히 소매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주변을 살폈다.

"……"

살아남은 자가 없음에 안도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더 이상 신선일 수 없었다.

살기 위해 남의 고혈을 빨아먹는……

그가 말한 벌레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

명한 일행은 상황을 수습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해는 떨어져 사방은 어두웠다.

근처 공터에 자리를 잡고 일시적으로나마 치료를 시작했다.

살아서 복귀한 무인들의 상처도 상처였지만, 파운의 상태가 심각했다.

전신 화상에 오른팔의 절단으로 인한 출혈이 치명적이었다.

"도련님은 괜찮을까요?"

신기자의 물음에 명한은 잠시 말을 아꼈다.

보통이면 죽어도 마땅한 상처.

상태를 낙관하기 어려운 것이 상식이었다.

하지만 파운은 달랐다.

"지독한 놈이야. 생기를 단전에 딱 뭉쳐서 보호하고 있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와중에도 자신이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거야."

"……도련님은 그런 분이시죠."

"게다가 배짱도 두둑해. 그 와중에도 챙길 건 챙겼거든."

"챙겨요?"

의아한 듯 바라보는 신기자에게 명한이 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손끝으로 파운의 화상 부위를 가볍게 누르자 마치 모래가 진동에 부상하는 것처럼 탄화된 부위가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건 무공의 고하와는 전혀 상관없는 반응이었다.

"설마, 이거……"

"그래. 서복이 가지고 있던 영기의 일부분이다. 도망치기 바쁜 와중에 모든 기운을 수습하기는 어려웠던 거지. 남은 영기가 파운의 몸에 스며들어서 자리 잡고 있다."

"부작용은 없을까요?"

"사람의 혼도 천지간의 기운도 결국 잡아줄 의식이 없으면 그저 덩어리에 불과해. 오른팔을 잘라서 떼어낸 이상 저 기운은 이제 파운의 것이야. 몸을 회복하고 나면 더 높은 경지로 오를 수도 있겠지."

"기연이라고 해야 할까요? 오른팔을 희생한 대가가……"

그늘지는 신기자의 얼굴에 명한은 말을 아꼈다.

괜한 위로 따위를 던질 사이는 아니었다.

"파운은 강한 남자다. 오른팔이 없다고 좌절하지는 않겠지."

그저 객관적인 사실이면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소백 도련님. 오늘의 도움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도련님을 잃을 뻔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내가 도운 건 어디까지나 내 의지의 발로. 그걸로 네가 빚질 이유는 없다. 다만…… 작은 고마움이라도 있다면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사부님에 대한 거군요."

"그래. 네 사부 천기자."

신기자가 입술을 달싹이다 멈추고 주변을 곁눈질로 훑었다.

꽤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그렇게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야영지를 편 뒤, 따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할 이야기가 많은가 보지?"

"저 역시 물어볼 것들이 있으니까요."

"좋아. 이야기는 주고받는 편이 재미있겠지."

정보란 무엇보다 값진 무기.

명한은 잠시의 기다림을 타박하지 않았다.

#

한쪽이 치유와 휴식으로 바쁠 때.

명한은 일행과 함께 신기자와 자리했다.

달이 가지에 걸리는 풍광 좋은 언덕이었다.

"꽤 좋은 장소를 골랐군."

"이야기가 무거우니 눈이라도 가벼울까 싶어서 골랐습니다."

"파운이 널 왜 아끼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벼운 농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럼, 각설하고 묻지. 천기자의 계획은 무엇이냐?"

"……저도 확실하게는 모릅니다."

"그래도 제법 가까운 관계 아니었나?"

"사부님께서는 제자를 여럿 두시고 환상루를 도학처럼 만드셨습니다. 저와 구문자 사형은 가장 늦게 환상루에 든 터라 예쁨을 받았지만…… 그게 진실과 가까운 건 아니었겠죠."

"진실이라. 네 사부의 이면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던 모양이군."

"네. 이전 명왕도에서의 일을 보며 깨우친 바가 있습니다."

"명왕도라. 하긴, 당시 그곳을 지키던 이들은 네 사형제였지?"

신기자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서 서로 갈라지긴 했지만, 한때 동문수학을 하던 이들이다.

그들의 죽음은 많은 이유를 붙여도 여전히 불합리하기만 했다.

"네 사부가 그들을 죽게 내버려 둔 것이냐?"

"확신은 없습니다만…… 아마 그랬을 겁니다."

"어째서? 옛 황제의 심장은 네 사부에게도 중요한 물건이었을 텐데?"

"그 건에 대해서는 구문자 사형과도 꽤 깊이 이야기해 본 적 있습니다."

"결론은?"

"차력(借力)."

명한이 무릎을 탁 쳤다.

짧은 말임에도 모든 것이 설명되는 단어였다.

"서복이 심장을 쓰도록 네 사부가 유도하고 있다는 말이로군."

"저와 사형은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당시의 광경을 저희 둘이 목도하게 한 것도 입을 닫게 하려는 무언의 지시였겠죠. 언제든지 그럴 수 있다는."

"그럼 네 사부는 직접 움직일 수 없는 건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사부님이 환상루를 떠나지 않은 건 이미 수백 년의 일. 불완전한 불로불사의 법이 환상루 밖에서의 생존을 불허한다는 것이 추측이었죠."

"그건 서복과도 비슷하군."

"애초에 그럴 수밖에요. 서복의 힘은 사부님에게서 훔친 거니까요."

힘을 훔쳤다는 말에 명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언급하는 힘은 외경에 이르러 천기를 비트는 수준의 힘을 의미한다.

그걸 훔칠 수 있다는 건 상식 밖의 말이었다.

"이혼대법. 이걸 창안한 것이 사부님이에요. 옛 황제의 심장을 사용하여 혼을 옮길 수 있는 육체를 만들고자 했죠. 그 과정에서 서복이 사부님을 배신하고 심장을 탈취하려 했으나 실패. 대신 이혼대법을 사용하여 사부님의 혼을 일부 앗아갔죠."

"콩가루 집안이군. 넌 이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냐?"

"한 사람의 도움으로 예전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물론, 그 전체를 믿은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낙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겠네요."

"도움? 누구 말이냐?"

"소백 도련님은 ‘적’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겠네요."

"아."

예전 명왕도에서 만났던 인물이다.

"제게는 사고뻘이죠. 오래전에 환상루를 떠난 분이세요."

"그녀도 본래는 환상루 사람이었군. 얼굴을 가리고 혼천에 잠입해 있는 건 나름의 꿍꿍이인 거냐?"

"글쎄요. 원체 생각을 알기 어려운 분이라.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저보다 훨씬 더 진실에 가까웠던 건 확실해요. 제게 옛 기록을 보여 준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여서겠죠."

"그건 뭐 그렇다고 치고…… 그래서 천기자가 이런 상황을 방치하는 건 어떤 이유냐?"

잠시 돌아갔던 이야기가 본래 궤도로 돌아왔다.

어떤 사람이든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면 행동을 예측하기도 어렵다.

천기자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

신기자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황제를 되살리기 위해서…… 아니, 황제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이해가 되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답이었다.

#

긴 대화와 짧은 이별이 있었다.

날이 불그스레 밝아올 무렵, 파운의 부하들이 당도하여 부상자들을 인도했다.

때를 맞춰 흑점에서도 사람이 당도.

명한도 마음 편하게 이들과 갈라설 수 있었다.

하지만 마차에 올라, 소명회로 오는 길에 명한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신기자의 말이 전부 사실일까?"

"글쎄. 그도 기록으로만 본 거니까 다 믿기는 어렵겠지. 다만, 그의 말이 상황을 뒷받침하고 있는 건 사실이야."

"황제와 하나가 된다."

"역겹다 못 해서 무서울 정도의 집념이지."

명한이 얼굴을 구기며 신기자의 말을 곱씹었다.

길고 긴 말들 중 가장 핵심이 된 건 하나의 단어.

천기자라는 인물의 정체성이었다.

"설마하니 천기자가 거세한 내시였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그걸 말이라고. 내시가 자신의 황제를 마음에 품은 건 또 어떻고? 아무리 황궁의 실체가 문란하다고는 하지만, 남색이 원인이라고? 하."

푸념 섞인 말에 은소소도 맞장구를 쳤다.

세상 뒤편에 선 거인, 천기자.

그런 인물의 시작이 내시라는 건 어딘가 허탈하기까지 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불로불사 같은 일을 믿고 맡기는 건 최측근밖에 없겠지. 황제라면 언제나 얼굴을 맞대는 내관이 해당될 테고."

"그게 천기자."

"아마도 재능이 있던 사람이겠지. 내관이 되어서도 여러 가지를 읽혔을 테고. 아니, 내관이 된 덕에 황제의 은총을 받으면서 비고의 책들을 살폈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능력을 그렇게 쓰는 건……"

단순히 그가 내시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이렇게 역겨워하는 건 아니다.

신기자가 찾은 기록에 따르면, 천기자는 황제를 내심 연모.

이를 품고 불로불사의 법을 이용하여 그를 취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이 황제의 측근들에게 발각되어 방해를 받자, 힘을 터뜨려 황제를 죽음으로 몰았다.

그리고 그 후에도……

"황제를 얻기 위해서 그를 되살리려는 거야. 단순히 육신이 아닌, 정신과 영혼마저 완전하게 지배하기 위해서. 즉, 이혼대법으로 섞여버린 파운과 같은 것이 천기자의 목적이라는 거지."

"지독하네……"

"그래. 지독하지. 죽어서도 편히 쉬지를 못하는 누군가를 생각하면 더더욱."

명한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옛 황제가 자신을 찾은 건 도망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불로불사를 탐한 어리석음의 대가라고 하기에도 너무 크지 않은가."

죽어서도 찾지 못하는 평안에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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