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화 (199/235)

뒤섞임

명한은 참혹한 광경에 두 눈을 찌푸렸다.

사방이 피로 뒤덮여 발 디딜 곳도 마땅치 않았다.

바닥을 구르는 육편은 이미 인간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인세에 지옥을 재현하면 이런 모습일까.

지독한 광경이었다.

"귀찮은 방해꾼들이 왔구나."

그 위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명한이 참혹한 광경에서 눈을 떼고 소리를 따라갔다.

현장의 지독함과 어울리지 않는, 백의를 단정하게 갖춰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서복 사형?"

모습을 알아본 건 신기자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거론한 뒤 두 눈을 깜빡였다.

"오랜만이구나, 사제."

"그 모습. 결국, 한계에 도달한 모양이군요."

"쯧쯧. 버르장머리 없기는. 사형이 인사를 하는데 답은 못 할망정."

서복이 가볍게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신기자의 머리 위.

공간이 그대로 아래로 떨어지며 그의 몸을 찍어 눌렀다.

저절로 무릎이 굽혀지고 고개가 땅에 닿았다.

"이제야 좀 어울리는 모습이구나. 일이 끝날 때까지는 그리하고 있거라."

"크윽! 서복, 사형! 파운 도련님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다 알면서 그리 묻는 거냐?"

"역시 이혼대법을(移魂大法)을 쓰려는 겁니까!?"

"궁하니 과한 수를 쓸 수밖에."

짧게 대꾸한 뒤, 서복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더는 볼일이 없다는 태도.

"어딜 가는 거냐. 파운을 돌려놔."

하지만 이곳에 있는 건 신기자만이 아니었다.

명한이 손아귀로 신기자를 누르는 공간을 잡아 뜯어내며 그 앞을 막아섰다.

힘의 유동에 공간이 비틀린 굉음을 토했다.

"그래. 네놈이 있었구나. 참 질기게도 내 일을 방해하던 벌레."

"뚫린 입이라고 마음대로 지껄이고 있군. 고를 쓰고 사람을 이용하는 건 내가 아닌 네놈 아닌가? 벌레는 네가 더 어울리겠지."

"하찮은 속세의 미물 따위가 조금의 득을 봤다고 기고만장해 있구나. 내가 옛 스승을 우려하지 않았다면 너 같은 미물을 살려 두었을까?"

"속세 운운하지만, 그 속세로 나오는 것도 버거운 상태 아니신가? 신기자의 반응을 보건데 그 몸도 한계인 거 같은데. 젊고 단련된 파운을 탐하려고? 늙은이가 그렇게 탐욕을 부리면 곤란하지."

"하찮은 놈이."

서복이 다시금 손가락을 튕겼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공간의 압축이 일어나며 명한을 강하게 당겼다.

몸이 서복 쪽으로 저절로 딸려갔다.

"흠?"

하지만 두 걸음을 남기고 명한은 멈춰섰다.

몸에 두른 금색의 휘광이 압축된 공간의 인력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인과의 띠로 만든 벽이로군. 어린것이 재주가 늘었어."

"그 나이 먹고 그 수준밖에 안 된 댁이 놀라운데?"

"하찮은 도발만큼의 실력이 있는지 궁금하군."

이번에는 서복이 손을 뒤집었다.

순식간에 위와 아래의 공간이 뒤바뀌고 중력이라는 이름의 법칙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안은 떨어지고 밖은 밀려나는 괴상한 뒤틀림이었다.

마치 금이 간 유리가 압력을 못 이기고 사방으로 뜯겨나가는 모습이었다.

금색의 테두리가 잘게 찢어져서 흩날렸다.

"위험합니다!"

이에 신기자가 자신의 그림자를 늘려서 명한을 휘감은 뒤, 당겼다.

용수철처럼 명한의 몸이 뒤로 튕겨 나오자, 그 위치의 공간이 위와 아래로 단절되었다.

중간 지역의 공백은 마치 세상 밖의 무(無).

상리를 아득하게 벗어난 힘이었다.

"방해하지 마라, 사제. 오늘은 큰마음을 먹고 행차했으니, 귀찮은 벌레를 털어내야겠다."

"어찌 속세의 싸움에 끼려 하는 겁니까! 파운 도련님을 돌려주세요!"

"잘 익은 과일이 눈앞에 있는데, 등을 돌려 돌아가야 할까? 심장의 대부분을 얻었고, 피의 길은 예정되어 있다. 그 위를 거닐 육신만 있으면 되는데, 망설일 이유가 무에 있을까?"

"사부님이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하하. 천기자, 천기자. 세상을 오시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가 네 생각만큼 그렇게 고결한 신선으로 보이더냐? 아서라, 사제여. 그는 널 위해 움직이지 않아."

서복은 웃으며 양손을 마주쳤다.

그러자 일행이 서 있던 좌우 측의 공간이 형체를 잃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앞서 봤던 무(無)의 연장선이었다.

이건 내공으로 막거나 보법으로 피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웃기지 마, 늙은이!"

그 사이로 명한이 뛰어들었다.

다리를 땅에 굳게 박고 양손으로 인과의 끈을 잡아서 커다란 망을 만들었다.

옥죄어오던 무의 압박이 망에 막혀 멈춰섰다.

처음으로 서복의 눈이 흔들렸다.

"인과의 끈을 그만큼이나 당겨서 쓰는데도 괜찮다고?"

"네놈같이 못질하는 사람보다야 나 같은 어부가 나은 것 아니겠어?"

"우스운 소리 하지 마라. 천기는 의지 없는 현상에 불과하다. 그 안에 선호 따위는 없어."

"그렇겠지. 너희는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니까."

양손에 쥔 망을 강하게 당겨서 하나의 축(軸)을 만들었다.

마치 손오공이 여의봉을 쥐듯, 단단하게 구축된 축이 양쪽의 압박을 버텨냈다.

"불합리하다. 천기를 씀에 우리는 언제나 부정당하는 입장이었다."

"너희는 그 상처를 알고 있냐?"

"상처?"

"흥. 그럴 줄 알았다."

명한은 외경의 경지에서 천기에 난 상처를 봤다.

그건 이 땅을 포용하는 어머니의 아픔.

안과 밖의 사이에서 미물을 감싼 결과였다.

서복은 그것을 보고 있지 않다.

"밖의 개념을 알고 그 힘을 깨우쳐 신선이 되었다고, 네가 뭇 사람보다 우월해지는 건 아니다. 하물며 지금껏 딛고 살아왔던 이 세계의 가치를 부정하는 거야말로 오만이지. 너는 네가 부정당한다 생각하지만, 부정하는 건 너다."

"헛소리를. 하찮은 벌레와는 긴 얘기할 시간이 없다."

서복이 입술을 비틀며 손을 움켜쥐었다.

주변 공간이 강하게 압축하며 명한을 짓눌렀다.

단 한 번의 손짓이면 죽일 수 있다.

그런 생각이 깃든 공격이었다.

"아니라고 했을 텐데?"

"……!"

명한의 오른손이었다.

마치 물을 퍼 올리듯 세상에 퍼진 인과의 힘을 끌어다가 서복으로 던졌다.

천의 끝을 공이 밀어내어 긴 나선의 띠를 만드는 것처럼.

공간이 비틀리며 서복의 힘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이 막대한 와류에 서복의 몸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본신이 아니라고 해도…… 내 만상(萬象)의 힘을 깨트렸다고?"

서복의 형태가 나선의 형태를 띠며 천천히 무너져갔다.

그를 이 땅에 구축한 ‘이치를 비튼 힘’ 자체가 휘말린 탓이다.

놀란 듯, 분노한 듯 명한을 보며 서복이 말을 이었다.

"내가 네놈을 조금은 잘못 봤던 모양이군. 우리 외에도 이 정도로 힘을 다루는 자가 태어날 줄이야."

"후회해도 늦었어. 지금은 허상이지만, 곧 본신을 뭉개주마."

"아니.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건 무리다."

"이 마당에 허풍이냐?"

"허풍이라. 그 답은 뒤에 듣는 것으로 하지."

"……?"

의아한 말을 남기고 서복의 몸이 사라졌다.

이렇게 이긴 걸까?

명한이 곧바로 힘을 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그리고 그때.

"파운, 도련님!!"

어둠 속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다가왔다.

반가움에 소리치지만, 그렇지 않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명한은 달려가려는 신기자를 제지하며 힘의 망을 다시금 앞으로 펼쳤다.

"저건 파운이 아니야."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

초점 없던 눈동자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운은 자신의 몸이 낯설기라도 하는 듯 손을 들어서 살피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명한 일행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다가갔다.

"넌…… 파운이냐?"

"이름? 아. 그렇지. 내 이름이라면 파운이 맞다."

"아니. 네 본질이 파운인지를 묻고 있는 거다."

"본질이라."

파운은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했다.

다시 눈을 뜬 건 몇 숨 되지도 않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부드럽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파운이지만 또한 서복이다. 그게 정확한 답변이겠군."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이혼대법이라는 건…… 혼을 옮겨 육체를 탐하는 상고의 수법. 하지만 서복이 쓴 건 다른 방식이다. 그는 자신의 혼을 떼어 이 몸의 혼과 융합시켰다."

"융합이라고? 웃기지 마. 인간의 혼은 그렇게 장난감처럼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건 네 말이 맞다. 다만, 당시의 내 혼을 보자면 불가능은 아니다. 찢기고 부서져서 흐물흐물해져 있었지. 그걸 제멋대로 주무르는 건 서복의 힘으로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널 함정으로 이끌었던 건가."

"계획적이었지. 그리고 나는 당했고."

자신을 손을 다시금 살피는 파운.

어딘가 묘한 기색이었다.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자신을 서복으로 칭하는 거냐?"

"네게 이 감각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나는 파운으로 속았다는 사실에 분개하지만 반대로 서복으로서 기뻐하기도 하지. 파운이면서 동시에 서복……"

"도련님! 도련님은 서복이 아닙니다!"

순간, 신기자가 다급하게 외쳤다.

모시던 주인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고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파운은 그런 신기자를 묘하게 바라보며 답을 했다.

"신기하군. 그렇게나 슬퍼하고 분노하던 주체가 눈앞에 있음에도 큰 동요가 느껴지지 않아. 이게 바로 서복이 발을 들여놓은 외경의 경지라는 건가."

"도련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이대로 서복의 뜻대로 움직이면 허수아비가 되고 말 겁니다!"

"그 말에는 어폐가 있다, 신기자. 그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이다. 나는 서복이기도 하니까."

"도련님!"

"네가 이해하기는 어렵겠군.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나는 네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도 하니까. 다만, 그 자체에 큰 가치를 두지 않을 뿐이다."

파운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 미소에 담겨 있어야 할 기쁨은 먼지처럼 희미하기만 했다.

신기자는 절망한 듯 창백한 안색이 되어 주저앉았다.

자신이 모시던 주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파운. 네가 바라던 천하제일은 고작 그것뿐이냐? 서복이라는 인간에게 몸의 절반을 내어주고 굴복하는 거?"

"바람은 변하지 않았다. 파운의 갈망, 탐욕, 갈증. 하지만 밖을 거닌 서복은 이를 한없이 작게 바라볼 뿐이다."

"그게 정말이냐, 파운? 네 탐욕은 고작 신선 따위에 짓눌릴 만큼 작은 것인가?"

"몇 번을 말해도 나는……"

순간, 멈칫하는 파운.

자신의 양손을 펼쳐서 바라본 뒤, 힘껏 움켜쥐었다.

희미한 떨림이 스치듯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왜 그러지? 고작 인간에 불과한 파운이 아직도 열망하고 있는 거냐?"

"나는 파운이자 서복이라고 말했을 텐데?"

"알아. 영혼이 섞였다면 분명 그 말이 맞겠지. 하지만 서복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파운의 욕망이라니. 난 믿지 않아. 고작 그 정도에 무너질 인간이라고 믿지도 않고."

"허튼 바람이다. 이미 우리는 하나기에 달라질 건 없다."

"그럼 정신이 들 때까지 머리를 흔들어 주면 될 일."

명한이 힘껏 주먹을 움켜쥐고 파운을 겨눴다.

"영혼이 가루가 될까지 맞고 나면 누가 더 절실한지 깨닫겠지."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말이 있다.

매가 약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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