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밖의 괴물
남은 건 혼란뿐이었다.
아무리 도망쳐도 길은 나오지 않고 주변의 동료는 계속 줄어만 갔다.
턱 끝까지 오른 숨은 단내를 풍기고 입가의 피 냄새는 짙기만 했다.
출구가 없는 어둠 속.
그 안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저기다! 저기에 있다!"
"빌어먹을 무림맹의 개……"
이를 악다물고 도를 들어 올렸다.
가닥가닥 끊어진 경맥이 힘겹게 내공을 끌어 올리지만, 고통만큼의 양은 아니었다.
겨우 도신에 기를 두르고 힘겹게 달려드는 적의 공세를 쳐냈다.
몸이 들썩일 때마다 내장에서 피가 역류하고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발버둥일 뿐이었다.
"크으윽! 집어치워! 누가 그걸 모른다고 했나!?"
"이, 이놈이!"
분노로 몸을 태우며 앞의 적을 도륙했다.
시체와 같던 파운의 힘에 앞선이 주춤거렸다.
같은 힘이라도 사선을 겪어본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
파운은 도를 틈으로 밀어 넣으며 주변을 휩쓸었다.
피와 내장이 비처럼 쏟아졌다.
"후우…… 후우."
숨마저 뜨거워 데어버릴 것 같았다.
머리는 아득하고 귀는 이명으로 가득했다.
이제는 진짜 끝이다.
길어봐야 한 번.
그 이상은 무리였다.
"빌어먹을. 나 파운이 고작 이런 곳에서……"
천하제일을 꿈꿨다.
충분히 될 것이라 자신감도 있었다.
곁에는 신기자와 같은 기린들로 가득했었다.
강유라는 큰 적과 소백이라는 경쟁자가 있었지만, 그 언젠가 모두 발 앞에 꿇릴 거라 자신했었다.
헌데, 왜……
"하늘이 날 버렸다는 건가."
천기를 도외시하고 스스로를 믿었던 탓일까.
뒤늦은 후회와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방심하지 말고 공격해."
"여력이 남아 있을 수도 있어. 한 번에 공격한다."
"놈을 잡으면 마교에 제대로 선전포고할 수 있다. 이것이 정도의 힘이라고."
"……"
의기양양 떠들며 무림맹 놈들이 다가왔다.
아직 핏기도 덜 가신 놈도 더러 섞여 있었다.
고작 이런 놈들에게 당한 건가 싶어서 분이 치밀지만, 현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올라가지 않는 손.
점차 닫히는 눈.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파운이 힘을 쥐어짜 도를 쥐었다.
"……와라, 무림맹의 개. 내 도의 먹이가 될 놈은 누구인가?"
"이 마당에 허풍은. 서 있는 것도 고작인 주제에 입만 살았어."
"범은 개와 말을 섞지 않는다. 죽고 싶은 놈만 와라."
"흥. 마교의 주구 따위가 혀는 길군. 네놈 손에 죽어간 우리 형제들의 복수를 하겠다. 네놈의 목을 잘라 저잣거리에 걸어주마."
"감히 네놈 따위가!!"
"허억!"
순간, 벼락같이 외치며 파운이 도를 휘둘렀다.
깜짝 놀란 무인이 넘어질 듯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도가 닿은 건 고작 한 족장 밖의 바닥.
힘이 다한 파운은 적의 머리까지도 도를 휘두르지 못했다.
괜히 겁을 집어먹었다 생각한 무인이 벌게진 얼굴로 검을 들어 앞으로 달려들었다.
"죽어라!"
"……"
고작 이런 놈이 마지막인가.
파운은 참담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너 따위가 손댈 사람이 아니다."
"커억!?"
"컥!"
"뭐, 뭐야!?"
하지만 그 후로 들려온 소리는 예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다급한 비명이 그 위를 덮었다.
그리고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이내 조용해졌다.
기묘한 적막 속에서 파운이 눈꺼풀을 밀어냈다.
"……넌."
힘겹게 뗀 입술이 다시금 닫혔다.
눈앞의 존재는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귀가 닳도록 들은 경험이 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보좌하던 이의 입을 통해서.
아무리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흔들려도 혼동은 하지 않는다.
"서복."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네."
서복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서복의 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옷은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백의.
그의 뒤로 수십 구의 시체가 넝마처럼 널려 있음에도 한 점 더럽혀지지 않았다.
무엇도 그에게 닿지 않는 것처럼.
"고를 내어준 건 맞지만, 설마 이렇게 일을 벌일 줄은 몰랐네. 후일을 위해 준비해둔 내 공간을 이용하면서까지. 무림맹에도 제법 배포 있는 인물이 있는 거 같아."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난 말일세 자네와 같은 포부 있는 젊은이가 좋아. 인세를 사는 필멸자들에서만 볼 수 있는 불꽃 같은 감정 아닌가. 화려하게 타오르고 차게 식어버리는."
"그래서 날 식히러 온 건가?"
"하하. 아니네. 아니야. 내가 왜 자네와 적대하겠나."
서복은 아예 파운의 앞에 주저앉았다.
땅에 옷자락이 끌려도 그의 옷은 전혀 더러워지지 않았다.
"신기자. 사제를 통해 어디까지 전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싸움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영역이네. 자네나 신교의 다툼과는 거리가 멀지. 난 되레 자네를 응원하고 있어."
"헛소리……"
"그런 반응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조금은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나?"
"생각? 뭘 말이냐?"
"기회네."
서복은 손끝으로 바닥에 떨어진 시체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잘린 시체의 단면에서 신경 다발이 솟아 나와 서로를 엮었다.
상처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두 발로 우뚝 섰다.
"다시 삶을 살 기회."
"허, 허어억!!"
숨을 토하며 깨어나는 무림맹의 무인.
파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선 밖에서 노는 신선들의 능력은 익히 들어서 알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했다.
단지 숨이 끊어진 것도 아닌, 사지가 토막 난 사람을 되살렸다.
그야말로 신과 같은 능력이었다.
"이건…… 불가능해."
"불가능은 자네 같은 범인들이나 하는 말이네. 나와 같은 자는 해당이 안 되지. 어떤가? 자네도 같은 길을 걸어볼 생각이 없나?"
"뭐?"
"무림맹은 내가 움직이는 작은 돌이라네. 하지만 그 돌에도 머리는 있어야지. 하나같이 열등한 놈들뿐이라, 내키지 않아. 자네가 그 머리를 해 주었으면 하는데."
"웃기지 마. 무림맹과 맞서는 것이 신교다. 내가 신교를 배신할 것 같은가?"
"굳이 신교여야 하나?"
파운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자네가 이루고 싶은 건 천하제일의 꿈 아닌가? 신교에는 천마라는 산이 버티고 있지. 후계자를 따낸다고 해도 그 길이 가까워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배신하라는 거냐?"
"배신이라. 속세의 개념은 내게 큰 의미가 없네. 배신이라고 부르자면 배신이라고 하지. 하지만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것. 숱한 제왕들이 자신의 터를 박차고 나와 흔히 말하는 배신으로 위업으로 이루었다네."
"……"
"내게 온다면 그 모든 걸 이루도록 도와주지."
달콤한 속삭임이다.
지독한 무력함을 느끼고 난 뒤라서 그런지 더욱 그랬다.
"그것도 부족하다면 자네가 아끼는 동료도 살려주지. 내 사제 말일세."
"……뭐라고?"
"부족하지만 그래도 같은 곳 출신 아닌가. 몸이 부서졌어도 지금이라도 되살릴 수 있네. 어떤가? 그 정도라면 충분히 자네의 마음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파운의 입술이 달싹였다.
다른 무엇보다 신기자에 대한 제안이 크게 다가왔다.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 죄책감.
"난……"
닫혀 있던 입술이 열렸다.
#
명한은 무언가 크게 출렁거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건 인과로 짜인 천기의 요동이었다.
본래 있던 세상의 흐름을 비틀어서 다른 결과를 내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작아도……
끝에서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파운!!"
소리를 높이며 발에 힘을 더 주었다.
벽이 밀리며 주변 경관이 선으로 일그러졌다.
중간중간 뛰어들어 방해하는 놈들은 속력을 무기로 그대로 짓이겼다.
피와 살이 우산에 막힌 빗방울처럼 튀었다.
쾅―!!
하지만 이 질주도 어느 시점에서 막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고개를 늘어뜨린 채 쌍검을 손에 쥔 남자에 의해서.
풍기는 기도가 앞선 적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쌍고검, 염백. 전대 화산파 고수야."
"쯧."
화산파를 떠나서 방랑하던 전대 고수.
무림맹에 투신할 때만 해도 그가 바라던 모습이 이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명한이 혀를 차며 주먹에 기운을 응집시켰다.
공간이 벌떼처럼 울고 형태가 일그러졌다.
"악감정은 없다."
그대로 뻗는 압도적인 위력의 일권.
벽의 일부가 형태를 남기지 못하고 으스러졌다.
"버텨?"
하지만 염백은 쌍검을 앞으로 내민 채 주저앉았을 뿐, 이를 견뎠다.
"턱 아래. 균열과 겹쳐서 진원을 숨겨 두었습니다."
신기자는 손으로 염백의 턱 부근을 가리켰다.
형태가 깨져서 살가죽 밖으로 뼈가 드러난 부분이었다.
뭔가 단면이 어긋난 광석처럼 그 부분만 도드라졌다.
‘못이구나.’ 명한이 단번에 이해하고 몸을 날렸다.
삶과 죽음에서 삶으로 고정한 쐐기의 역할을 하는 부분이었다.
"조심하세요! 단순히 이치를 비틀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사형의 진원이 담겨 있어요."
"네 사형이라면 구문자?"
"아뇨. 서복입니다."
명한이 놀람을 감추지 않고 주먹을 날렸다.
염백의 쌍수와 비스듬히 충돌하여 주변을 박살 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염백의 몸은 부서지지 않고 버텼다.
단순한 강함 이상의 질김이었다.
"서복 같은 존재는 자신의 터를 못 벗어나는 것 아니냐?"
"무리하면 단기간 가능합니다. 처음부터 그걸 위해서 함정을 판 거였어요."
"그걸 위해서라면…… 파운?"
"네. 서복 사형이 노리는 건 파운 도련님입니다."
이 말이 목숨이 아니라는 건 명한도 알고 신기자도 알았다.
"썩 좋은 상황은 아니라는 거네."
"서둘러 주세요."
"그래. 그래야겠어."
힘 배분은 포기했다.
명한이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중심으로 무아의 공간을 열었다.
가장 완벽한 천의무봉의 상태에서 공간에 대한 점유를 시도했다.
그 자신과 염백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길.
‘진원이라면 서복의 것.’
염백의 턱에 숨겨진 기운이었다.
그를 그 상태로 유지하게끔 모든 기운을 고정하고 있었다.
"길을 연다. 소소, 향아 뒤로 물러나."
경고에 기척이 멀어지는 걸 감지한 뒤.
명한은 그대로 꿰뚫는 주먹을 날렸다.
관(貫)의 요령은 비틀어진 진원의 힘을 뚫고 그 너머의 염백에게까지 닿았다.
퍽 소리와 함께 후두부가 뚫리고 회백색의 연기가 흘러나왔다.
서복이 남겨둔 진원이었다.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게 둘 수는 없다."
명한은 이것마저 관의 요령으로 꿰뚫었다.
회백색의 안개는 비명이라도 지르는 듯 한 차례 요동치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곧바로 주변의 영기가 짙어지며, 내성이 약한 은소소는 호흡마저 힘들어했다.
명한이 곧바로 그 앞을 막아 영기의 농도를 조절했다.
"내 뒤에 있어."
"후읍. 흡. 뭐야, 이거."
"응축된 영기. 서복이 잘라낸 저 작은 진원에 셀 수도 없는 양의 영기가 서려 있어."
"본래의 몸은 이것보다 훨씬 많다는 거야?"
"천기를 비틀어 수백 년이 넘도록 기운을 빨아먹던 인간이야. 이미 인간의 한계는 아득하게 초월했겠지."
그것이 앞으로 상대해야 할 괴물.
세상의 모든 이치 밖에서 운명마저 꺾으려 하는 존재다.
과거에는 신선으로. 어쩌면 신처럼 받들어졌을지도 모르는 존재.
앞으로 내딛는 걸음이 주저되는 건 당연했다.
― 으아아아아아!!!
"도련님!"
"파운!"
하지만 망설임은 사치.
비명을 향해 일제히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