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화 (197/235)

뒤틀린 공간

썩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시체에서 나오는 냄새와 독기가 뒤섞여서 아주 고약한 향을 만들고 있었다.

명한은 칠채향으로 이를 해석해서 중화의 향을 몸에서 뿜어냈다.

이내, 냄새가 가라앉자 얼굴이 펴졌다.

"후우. 고마워, 소백. 이제야 살만하네."

"저도요. 감사합니다, 도련님."

"별거 아니야. 안으로 갈수록 냄새는 짙어질 테니, 미리 준비해야지."

명한은 아예 물주머니를 꺼내서 칠채향을 그 안에 녹였다.

잔여물을 씻어내기에는 향보다는 물이 나았다.

"이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바탕 싸움을 벌인 건 맞아 보이는데."

"무림맹 사람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던 거로 봐서는 혼천이 슬쩍 정보를 흘렸을 거야. 신교의 소궁주 중 하나가 직접 행차한다면 놓치기 힘든 기회니까."

"그렇게 단순한 수법에 넘어간다고?"

"생각외로 사람은 단순해. 내가 신교를 부추긴 건 혼천을 밖으로 드러내기 위함이었지만, 그 자체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도 여럿이었겠지. 스스로 고를 몸에 심을 만큼."

"뭔가 미안해지는 상황이네."

"언제나 이용하는 놈들이 나쁜 거야."

죄책감은 일찍이 끊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시체의 숫자와 독기는 짙어져 갔다.

그리고 그 걸음이 반각 이상 이어질 무렵.

"도의 흔적이다."

"응. 파운이야."

벽에 새겨진 파운의 도기를 발견했다.

동굴 벽 전역을 난도질하고 수십의 인간을 도륙한 상태였다.

잘린 시체가 장식품처럼 여기저기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곳에 쏟은 무림맹의 전력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피해가 상당했다.

"이 정도의 숫자를 동원했다면 무림맹 쪽에서 힘 있는 인간이 왔겠네."

"이제 막 결성한 무림맹에 그 정도의 응집력이 있을까?"

"보통이라면 없겠지만…… 혼천이 작정하고 밀어준다면 모르지."

"무당과 화산. 소림도 아닐 테고. 이끌만한 문파가 보이지 않는데."

"두고 보면 알겠지. 일단은 우리 일이나 집중하자."

시체를 건너서 흔적을 쫓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마다 벽에 새겨진 도의 흔적은 선명해져 갔다.

싸움의 치열함이 더욱 격화되는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소리."

"병장기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병장기의 충돌음이 들려왔다.

명한 등은 망설이지 않고 소리를 따라서 통로를 가로질렀다.

좁게 이어지던 길이 몇 배로 확 넓어지고 반쯤 무너진 벽과 질펀하게 늘어진 피.

양쪽으로 갈려 싸우는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은 지나갈 수 없다! 쿨럭!! 쿨럭!"

그 안에서 도드라지는 건 피 칠갑을 한 무인.

"벽력도 광황."

그 얼굴을 은소소가 알아봤다.

"아는 사람이야?"

"파운이 부리는 사람 중 하나야. 실세 중 실세지. 그가 이런 곳에 저런 모습으로……"

"꽤나 궁지로 몰린 모양이네. 일단 돕자."

"응."

명한 일행은 말없이 서로의 방향을 잡아서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난입.

광황과 대치하던 무인들이 당황하며 허둥댔다.

무리를 갈라서 공격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누구냐!? 누군데 감히 무림맹의 행사를 방해는 거냐!"

"이쪽도 저기 저 사람하고 볼일이 있어서. 양보해 줘야겠어."

"웃기지 마! 사악한 마교 놈들을 이제야 겨우 구석으로 몰았다! 네놈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방해한다면 용서하지 않는다!"

"용서 같은 건 바라지 않아."

광황과 한 무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 명한.

주먹으로 바닥을 쳐 주변 모두의 균형을 앗아간 뒤, 공간을 때려서 청각마저 마비시켰다.

분분히 무기를 휘두르지만, 균형도 잡지 못하는 몸으로는 애들 장난감에 불과했다.

하나하나 주먹으로 후려쳐서 기절시켰다.

"너, 너는 소백……?"

"통성명은 넣어 둬. 파운은 어디에 있지?"

"도련님은…… 위험하다!"

아직은 대화가 힘든 상황.

명한이 짧게 혀를 차며 좌수와 우수를 교차해서 주변 모든 공격을 빨아들였다.

검, 도, 창, 편.

모든 무기가 벗어날 수 없는 인력에 끌어 당겨져 한 점에서 뭉개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당긴 힘의 반대가 되는 미는 힘.

굉음과 함께 전원이 밖으로 날아가서 처박혔다.

균형을 잡고 견디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허…… 대체 그건 무슨 무공이지?"

"간단한 요령. 그보다 답이나 해. 파운은 어디에 있어?"

"도련님은……! 잠깐. 네가 왜 도련님을 찾는 거냐?"

"이 마당에도 의심은. 파운의 행적을 의도치 않게 다른 곳에서 접했다. 이 장소가 함정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미워도 구하러는 와야지."

"도련님을 구하러 왔다는 건가?"

"아니면 이 마당에 뒤통수라도 칠까? 내가 손 보태지 않아도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아, 아니다. 미안하다. 파운 도련님은 안쪽 석실에 계신다. 부디 네가 도련님을 설득해다오."

"설득?"

구하는 것도 아니고 설득.

명한의 얼굴이 살짝 아리송해졌다.

"……신기자가 죽었다."

"뭐?"

"함정에서 빠져 허덕이는 우리를 대신해서 목숨을 바쳤다. 그 분노에 도련님께서 눈이 뒤집히고 상황은 보다시피……"

"하. 신기자가 죽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확실해, 그거?"

"내 눈으로 봤다. 거대한 철침에 몸이 관통당했으니 신선이 와도 살리지는 못해."

"쯧. 상황이 내 생각보다 이상하게 돌아가네. 알았다. 파운은 내가 어떻게든 설득해 볼 테니까, 넌 상처나 추스르고 있어."

명한이 품에서 단약 하나를 꺼내서 던지고는 뒤를 돌아봤다.

마침 은소소와 향아가 남은 적을 모두 제압한 참이었다.

"멍청한 형제를 구하러 가자."

안으로 뛰었다.

#

정신없이 도를 휘둘렀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이런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도련님! 도련님 위험합니다!"

"뒤로 물러나세요!"

파운이라는 인간에게 신기자라는 인간이 그렇게 중요했나?

같은 뜻을 품고 같은 길을 걷기로 약속한 것은 맞지만……

이렇게까지 괴롭고 분할 만큼 중요한 사람이었나?

모르겠다.

그걸 몰라서 더욱 속이 답답하다.

대체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건가.

"도련님!!"

"……!"

몸이 뒤로 확 당겨지고 눈앞에서 피가 튀었다.

휘하에서 검을 다루던 당철이라는 놈이다.

어깨부터 복부까지가 통째로 잘려서 그대로 죽었다.

바로 눈앞에서.

"감히 네놈들이!!!"

분노한 도에서 어마어마한 강기 덩어리가 쏟아져 나갔다.

검을 휘두르던 무림맹의 무인이 반으로 잘려서 쓸려나가고, 뒤이어 따라오던 이들도 충격에 널브러졌다.

"허억! 허억! 쿨럭!!"

하지만 힘을 과하게 끌어쓴 대가는 명백했다.

입가로 흐르는 죽은 피에 파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뭐냐.’

무엇 때문에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신기자의 선택지를 잡았을 뿐이다.

위험하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목숨 걸 각오도 충분했고, 이겨낼 자신감도 충분했다.

하지만 결과는……

"물러나야 합니다, 도련님!"

"물러나? 또 물러나란 말이냐? 대체 언제까지 나 파운이 물러나야 한단 거냐!"

"어떻게든 도련님만큼은 사셔야 합니다! 저희가 앞을 막을 테니 뒤로 도망치세요!"

"나는 도망자가 아니다! 크, 크윽!"

파운이 불같이 성을 내며 앞으로 나서다가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초절한 경지에 오른 그이지만, 지금껏 상대했던 이들도 만만치 않았다.

숫자면 숫자, 힘이면 힘.

그렇지 않았다면 가장 곁에 두었어야 할 신기자를 두고 여기까지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도련님, 신기자의 각오를 헛되이 하면 안 됩니다!"

"……빌어먹을!!"

끓는 마음을 짓누르며 파운이 몸을 돌렸다.

사지가 찢어질 것 같은 굴욕이지만, 감내해야 했다.

죽음의 무게는 그것보다 훨씬 무거웠으니까.

등 뒤로 병장기의 부딪침이 점차 멀어져 갔다.

#

엉망이었다.

명한이 안쪽 깊은 곳까지 당도했을 때, 주변은 피바다였다.

사방 천지가 시체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지독한 살육전.

서로가 서로를 형체가 남지 않을 때까지 난도질한 흔적이 여럿이었다.

이런 싸움은 흔하지 않다.

아무리 사람이 광기에 휩싸여도 정도를 벗어나면 자신도 모르게 주춤하기 마련.

이런 광경은 과거의 혈사에서도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지독하네. 양쪽 다 목숨을 도외시하고 싸운 모양인데?"

"으으. 이런 싸움은 뭔가 정상적이지 않아요."

"……"

명한은 두 사람의 말을 한쪽에 담으며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시체가 쌓이다 보면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도 있으니까.

"한 명도 안 남기고 전부 죽었다는 건가."

하지만 없었다.

입구부터 안쪽으로 이어지는 통로까지.

수백 구의 시체가 줄지어 늘어져 있음에도 숨이 붙은 사람이 하나 없었다.

하나하나 확인사살 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도 아니었을 테니, 모두 즉사했다는 의미.

‘아니. 그건 좀 이상하지.’

이만큼의 사람이다.

고수라도 칼이 엇나갈 만큼의 숫자가 있었다.

"역시 이 상황은 뭔가 이상해."

"싸움 자체가?"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든…… 조심해!"

순간, 무언가 감각권 안쪽에서 살아났다.

명한은 은소소를 안으로 당기며 손끝으로 공세를 밀어냈다.

바닥부터 그려지는 힘의 파동에 모든 것이 선 밖으로 튕겨 나갔다.

명한이 느낀 감각은 숨이 끊긴 채 검을 쥐고 있는 무림맹의 무인이었다.

그래. 정확하게 설명한 것이다.

상대는 숨을 쉬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뭐야, 저건? 고의 힘인가?"

"아니. 아무리 고라도 죽은 건 되살리지 못해."

"그럼 뭔데? 아무런 생기도 안 느껴지는데 움직이잖아. 설마 망자라는 거야?"

"차라리 망자라면 편하겠어."

죽은 자의 혼이 들러붙은 거라면 명한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눈앞의 무인은 텅 빈 껍데기.

혼은커녕 아무것도 남지 않은 육체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이건, 상리에 맞지 않는다.

"……쿨럭! 쿨럭! 역천지법(逆天之法)의 힘입니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기자?"

죽었다고 알려진 신기자였다.

얼굴은 창백하고 입가는 피로 얼룩져 있지만, 확실히 그였다.

벽을 짚고 힘겨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예의 갖출 때가 아니군요. 후우. 역천지법을 깨기 위해서는 몸 안에 있는 왜곡을 부숴야 합니다."

"왜곡?"

"쐐기의 다른 사용법입니다. 일시적으로 한정 공간에 한해서 천기를 비틀어 이치를 어긋나게 하는 방법이죠."

"비틀거나 꿰어서 다른 현상을 이어붙이고 있군."

"후우.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아니. 나도 네가 말한 뒤에야 눈치챘을 뿐이다. 이 공간 안에서 느껴지는 불쾌함이 그것이었군."

명한이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시체와 뒤섞인 독이나 지독한 냄새.

어딘가 괴상한 감각은 모두 비틀림의 증거였다.

"후우. 후우. 갑자기 이런 부탁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파운 도련님을 구해주십시오."

"안 좋은 거냐?"

"환각과 환상. 상식과 의지의 뒤틀림까지 겪고 계십니다. 강한 분이지만, 이 상태가 오래간다면 견디지 못할 겁니다."

"쯧. 손이 많이 가는 놈이야."

명한이 짧게 혀를 차며 신기자를 부축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을 더했다.

"안내해. 여기에는 형제로 왔다."

그제야 신기자의 안색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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