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형제니까
말이 거침없이 가도를 달렸다.
흙먼지가 일어나고 돌조각이 사방으로 날렸다.
땅을 울리는 굉음이 쉼 없이 이어지며 속도에 날개를 달았다.
"서둘러야 해……"
선두에서 고삐를 잡은 건 명한.
초조함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연신 박차를 찼다.
턱 끝까지 찬 말의 호흡이 선명하게 들려왔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멍청한 놈. 왜 그런 선택을!’
노 총관에게서 확인한 파운의 행선지.
본래라면 이야기의 마지막에 주인공 ‘소백’이 힘을 얻기 위해서 가는 장소다.
고대부터 전해지는 엄청난 무공을 얻기 위해서.
하지만 명한은 알고 있다.
"그건 전부 함정이라고, 멍청아."
습작에서는 구무림을 부활시키기 위한 집단의 수작으로.
지금은 혼천 혹은 천기자의 수작으로.
그 안에서 도사리는 위험은 파운이 아무리 강해도 감당하기 어렵다.
습작에서도 주인공 보정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당했을 것이다.
"소백……!"
순간.
거친 울음소리와 함께 말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깜짝 놀란 명한이 고삐를 놓고 몸을 비틀어서 땅에 발을 디뎠다.
쓰러진 말 주변으로 모래 먼지가 퍼지는 것이 꽤나 큰 충격이었다.
"이런…… 너무 달렸군."
거품을 물고 쓰러진 말.
기습을 당하거나 어디에 걸린 것이 아니었다.
너무 달린 나머지 기력이 다해서 쓰러져 버린 것이다.
명한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품에서 단약을 꺼내, 말에게 먹였다.
이내 숨이 돌아오고 눈도 깜빡이며 정신을 차렸다.
"괜찮은 거냐?"
"난 괜찮아. 다친 건 여기 이놈이지."
"후우. 이 이상은 무리야. 말도 체력이 있는 법이라고."
"알아. 알고는 있지만……"
"침착해. 파운이 그리 쉽게 당할 인간은 아니잖아?"
명한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은소소의 말에 수긍한 건 둘째 치고 당장은 수단이 없었다.
경공으로 그 먼 거리를 달려가는 건 무리였다.
"일단 여기에서 야숙을 하고 날 밝는 대로 움직이자."
"그래야겠네. 마차에서 챙긴 물건이 있던가?"
"제가 챙겨왔어요, 도련님."
향아가 보자기로 둘러맨 짐을 자랑스럽게 들어 보였다.
"자리 잡고 짐도 좀 분배해서 지자. 내가 너무 급했어."
"그래. 너무 급했어. 파운하고 좀 친해진 건 이해하지만, 이렇게까지 움직여야 할 일이야?"
"그건……"
명한이 답을 입에 머금었다가 다물었다.
이건 논리와 이해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파운이 제법 마음에 든 인간인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달리는 건 다른 이유였다.
심장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고동.
"내가 전에 이 세상의 일을 글로 써낸 적이 있다고 했지?"
"응. 대부분이 비슷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유는 모른다고 했잖아."
"여전히 이유는 몰라. 다만, 어떤 인과라고 해야 할까. 내 글의 핵심은 여전히 이 세상의 핵심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어. 그 점에서 파운이 걸려."
"파운이?"
"파운이 향한 곳은 내 글의 종막 부근. 주인공이 힘을 얻으러 갔다가 함정에 빠지는 곳이야."
"위험하다는 거지?"
"아니. 단순히 그런 이유가 아니야."
습작에서의 적은 구무림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상징이 필요했다.
천마의 자식인 ‘소백’은 아주 적절한 위치.
함정에서 소백의 정신을 붕괴시켜서 자신의 꼭두각시로 삼으려 했다.
주인공 보정으로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반드시 그렇게 됐을 터.
습작의 흐름을 지금과 비교해보면 상황이 그려진다.
"내 글과 현실은 많은 부분이 어긋났어. 하지만 여전히 특정한 부분에서 인과의 선이 교차하고 있음이 느껴져. 어떤 필연적인 흐름."
"그 흐름에 파운이 휩쓸리고 있다는 거야?"
"파운의 곁에 신기자가 있지만, 그는 서복이나 천기자와 비교하면 한참 아래야. 이 흐름을 읽을 수도 막을 수도 없어. 아니…… 어쩌면 그가 바라는 걸지도 몰라."
"신기자가?"
"서복은 자신의 스승 천기자를 배신하고 스스로의 왕국을 만들었지. 그리고 또 다른 제자인 신기자와 구문자도 울타리를 벗어나 자신의 것을 만들었어. 너무나 당연하게 탐하고 있지."
"소백?"
"……이건 우연이 아니야. 흐름을 관조하여 그 위의 물방울을 쫓는……삼라만상의 이치와……영겁으로 이어진 인과의 고리를……"
"소백!"
"……헉!"
어깨를 팍 치는 은소소의 손길에 명한이 깨어났다.
눈앞에서 무언가 얼룩처럼 번지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괜찮은 거야? 갑자기 횡설수설해서 놀랐잖아."
"……어. 괜찮아. 아무래도 깊은 곳을 들여다보다가 휩쓸렸던 모양이야."
"위험한 짓은 하지 마. 파운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중요한 건 너야."
"그래. 네 말대로야."
명한이 깊은 숨을 내쉬며 남은 기운도 털어냈다.
천기를 더듬어서 읽는 건 거대한 폭포수를 손으로 잡는 것과 다름없다.
잘못하면 그 물줄기에 쓸려가기 십상.
더 먼 곳을 내다보는 건 포기했다.
"도련님, 차 준비됐어요."
아직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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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을 달려서 일행은 오래된 사당 앞에 도착했다.
주변은 이미 일전을 치른 듯 흔적이 너저분했다.
마른 피와 찢어진 옷자락.
채 수거하지 못한 병기의 파편이 여럿이었다.
명한은 곧바로 말에서 내려 주변을 탐색했다.
"황제의 피."
코끝을 자극하는 건 옛 황제의 피.
즉, 혼천이 움직이는 괴물들이 이곳에 있었다는 뜻이다.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명한은 흔적을 눈으로 더듬으며 머리를 회전시켰다.
"……소백."
"아아. 나도 느꼈어."
하지만 오래 유지할 여유는 없었다.
어느새 주변으로 낯선 기척 다수가 집결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화경급의 무거운 기운을 내뿜었다.
‘이질적이네. 벌레를 사용한 고수들인가.’
혼천이 쓰는 무기 중 하나.
이 정도의 숫자를 움직였다는 건 이 장소에서의 일이 범상치 않다는 걸 의미했다.
"이곳은 무림맹의 영역이다. 외부인은 물러나라."
"……무림맹?"
하지만 나타난 것은 무림맹을 상징하는 맹(盟) 자를 달고 있는 무인들.
문파 소속표식이나 다른 식별 기호 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두 번의 경고는 없다. 이곳은 무림맹의 영역. 침범하려는 자는 척살한다."
"대체 언제부터 무림맹이 길을 점거하고 사람을 공격했지?"
"문답무용(問答無用)."
무림맹의 무인이 갑자기 도를 뽑고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도기는 공간을 자르고 명한을 압박했다.
‘팽가의 도법? 아니, 조금 달라.’
익숙하지만 어딘가 이질적인 도법.
명한은 한 발 크게 물러나 손으로 도기를 뒤집었다.
남자가 팽이처럼 허공을 돌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수다! 모두 조심해라!"
"대책 없이 덤비기는."
뽑은 칼에는 눈이 없다.
시작한 이상 결착은 봐야 하는 것이 무림.
명한도 내기를 움직여 몸 위로 천의무봉의 기운을 둘렀다.
천하만물과 소통하는 가장 완벽한 상태였다.
퉁―!
달려들던 무인 하나가 주먹에 맞고 삼십여 장을 날아가서 처박혔다.
장검에 두르고 있던 것은 분명 강기.
하지만 명한의 일 권은 강기를 부수고 외문기공의 보호마저 찢었다.
놀란 얼굴의 무인들이 주춤할 때,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파(破).
단순하게 힘으로 공간의 흐름을 깨트리는 일격이었다.
명한의 전벽 백여 장의 공간이 파도처럼 출렁이다가 한 면으로 무너졌다.
서 있던 모두가 내공의 뒤틀림을 느끼고 주저앉았다.
피를 토하는 이들도 여럿이었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사술이다! 저놈이 사술로 우리를 농락하고 있다!"
"단장님을 불러와라! 우리끼리 맞서기는 힘들다!"
놈들은 크게 당황하며 숫자를 나눴다.
남은 몇은 명한을 막고 나머지는 단장을 부르기 위해서 뛰었다.
하지만 굳이 상황을 확대할 이유가 없는 명한이었다.
달려드는 이들은 힘으로 찍어 누르고 도망치던 자들에게는 기의 환(環)을 날리려 했다.
"혼자서 그렇게 용빼지 마."
"맞아요, 도련님."
하지만 그보다 앞서 은소소와 향아가 움직였다.
둘은 물러난 이들의 행동을 읽기라도 한 듯, 공간을 점유.
검과 퇴법으로 나머지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화경에 이른 기운을 내뿜던, 수십의 무리를 제압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반각이었다.
"느껴지는 기운보다 훨씬 약하군. 제대로 무리를 소화하지 못하고 있어."
"역시 그렇지? 강기를 다루는 것도 어색하고 무공도 서툴러. 몸에 안 맞는 힘을 쑤셔 넣은 거 같아."
"쑤셔 넣었다라. 어쩌면 그 표현이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명한이 손끝으로 제압한 무인의 머리를 두드렸다.
혈관이 크게 부풀더니 후두부 쪽으로 도망쳤다.
그 징그러운 모습에 향아와 은소소가 기겁했다.
"뭐, 뭐야 그거!?"
"고의 일종. 혼천 놈들이 고를 개량해서 무림맹 놈들에게 사용한 모양이야."
"으윽. 갑자기 왜? 저 사람들을 몰래 이용해서 우리를 막으려고?"
"누가 몰래 이용한다는 거냐! 우리는 우리 의지로 고를 몸에 심었다!"
제압당한 남자가 발악하듯 외쳤다.
"의지로 고를 몸에 심었다고? 고가 뭔지는 제대로 알고 있는 거냐?"
"알고말고. 얼마나 위험한지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저 마교 무리가 중원을 침범하는데, 작은 손이라도 거들고자 했다. 그게 우리 중원 무인의 의기다!"
"……"
어떤 상황인지 한 번에 그림이 그려졌다.
혼천이 원하는 건 무림맹과 신교의 전면전.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와 혼란이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전력상 무림맹은 신교의 상대가 결코 아니다.
첩자도 색출되었고 각지에서 벌이던 계획도 대부분 무산되었다.
남은 방법이라고는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
"네 목숨을 걸어서까지 신교를 막겠다는 건가? 슬퍼할 가족은? 남겨진 이들은 생각하지 않는 거냐?"
"정도무림의 의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마교의 간악함을 막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각오가 돼 있다! 우리 모두가 중원의 등불이니까!"
"하아. 너 같은 놈들이 많은 거냐?"
"천. 만. 십만! 너희가 아무리 많은 마귀를 끌고 와도 중원의 무인은 끝없이 나설 것이다!"
"누구보고 마귀라는 건지. 몸에 벌레를 심는 것 자체가 사도라는 생각은 안 드냐? 대체 어디서부터 망가진 거야?"
"마교를 막기 위해서라면 상관없다!"
"짜증 나는 놈들."
명한이 손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눈앞의 무인들을 때려죽이는 건 쉽지만, 그래서야 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다.
말단의 무지몽매한 이들보다 핵심이 필요했다.
"떠나라. 떠나서 네가 모시는 이들에게 전해. 이곳은 오늘부터 우리 소명회가 차지한다고."
"……소명회?"
"그래. 난 신교를 떠나 천마에게 반기를 남자. 나와 맞서고자 한다면 너희 전부를 데리고 와야 할 것이다."
"……"
남자는 한동안 망설이다, 뒤도 안 보고 도망쳤다.
남은 무리도 비슷하게 부상당한 이들을 챙겨서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싸워봤으니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떻게 해서든 상부에 알릴 생각뿐이었다.
적어도 그의 생각에서는.
"어떻게 한 거야?"
"칠채향. 고를 중독시켜서 환상을 보게 했어. 며칠 정도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상하겠지."
"그거 편리하네."
"파운 그 멍청이를 구하기까지는 버텨주겠지."
바닥에서 바동거리는 남자들을 모아 한곳으로 치워버렸다.
일시적이지만, 시간은 생겼다.
"가자."
남은 건 파운.
명한이 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