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단서
며칠 뒤 명한은 흑점을 통해서 공염과 접촉했다.
천산과 소명회의 중간 언저리에서의 회동.
천산에 머물고 있는 남은 일월교의 처우와 행동 방침을 위한 만남이었다.
먼 거리가 부담되기는 했으나,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명한을 포함, 회담에 참여할 인원이 정해졌다.
"강유의 편지에 적힌 대로네."
"어차피 선택지는 많지 않았으니까. 신교 내부의 교도들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일 거야. 확실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빼 오든가 해야지."
"신교와 마찰이 생기지는 않을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버릴 수는 없지."
만약의 경우 강유를 통한 중재도 가능하다.
게다가 천마가 대업을 앞둔 상태에서 이런 사소한 일로 마찰을 일으킬 사람도 아니다.
애초에 일월교의 잔재와 활동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문제라면 역시 잔당의 생각인가.’
강유의 편지에도 적힌 우려였다.
"역시, 반응이 걱정되는 거구나."
"응. 우리를 찾았던 이들은 대부분 공염의 지도를 따르던 무리야. 대표가 향아를 신녀로 인정하고 새로운 일월교를 천명했어. 분말이 있어도 적고, 따르는 것에 큰 부담이 없지. 하지만 신교에 남은 이들은……"
"보다 선명하게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
후대로 이어질수록 복수에 대한 감각은 무뎌지는 법.
하지만 적진에 남아 이를 갈던 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일 수도 있다.
‘게다가 왕모모는……’
천마의 모친을 곁에서 모시던 시종.
일월교도라고는 하지만 상황에 대한 동기가 조금은 다른 사람이다.
그런 인물이 수뇌에 있다면 일을 재단하기 어렵다.
"도련님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도련님을 지킬게요."
"향아야."
"뭐야, 뭐야. 지키는 검 역할은 내 거라고. 향아, 너 새치기하지 마."
"헤헤. 아가씨가 검이면 저는 부엌칼 정도로 할게요."
"하. 요 앙큼한 계집애가?"
헛웃음 짓는 은소소의 옆에서 향아도 가볍게 웃었다.
한 번의 큰 떨쳐냄 이후로 조금 더 가까워진 모습이었다.
"도련님은 어느 쪽이 더 좋으세요?"
"검이야 칼이야? 똑바로 대답해."
"……"
먼 산을 바라보며.
마차가 목적지로 가까워져 갔다.
#
며칠 뒤 명한 일행은 오래된 산장에 도착했다.
인적이 드문 장소라 일견 을씨년스러웠다.
마차를 밖에 대고 안으로 접근하자, 미리 도착해 있던 일월교도들이 마중을 나왔다.
이들은 일행을 한 번 확인하고 향아를 향해서 무릎을 굽혔다.
계속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신녀님’이라는 호칭이었다.
"저희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저기 다른 분들은 아직 도착 안 했나요?"
"곧 도착할 겁니다. 그보다 저희 같은 아랫것들에게 존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 편하게 하시기를."
"그, 그건 제가 어색해요."
"아……! 아랫사람도 배려하는 신녀님의 마음. 감읍했습니다."
혼자 감동해서 안으로 안내하는 일월교도.
남은 이들도 ‘오오!’ 하며 감탄하자 괜히 향아의 얼굴만 붉어졌다.
익숙해지면 시간 좀 필요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흐음."
안쪽은 탁자 하나 덩그러니 놓인 채 횅했다.
흔한 장식이나 가구조차 없었다.
명한은 탁자 앞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역시 그런 건가.’
기감으로 주변을 읽는 것도 잊지 않았다.
"노사님 일행분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공염을 포함한 무리도 도착했다.
열린 문을 통해서 줄줄이 들어오는데, 척 봐도 누가 책임자인지는 눈에 훤했다.
자줏빛 장포로 몸을 덮고 있는 여성.
"신녀님을 배알합니다. 미천하지만 일월교의 현직 제사장을 맡고 있는, 왕이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왕이라 소개하며 향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남은 이들도 같은 자세를 취하며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를 확실하게 나타냈다.
갑자기 나타난 ‘신녀’라는 직책을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모, 모두 일어나세요.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요."
"그럴 수야 없지요. 오랜 인고 끝에 나타난 일월신녀신데, 저희가 소홀히 대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모두 자리에 앉아 주세요."
"신녀님의 명이시라면."
그제야 모두 일어나 자리에 착석했다.
앉은 건 공염, 왕이. 그리고 깊은 주름의 노인이었다.
명한은 그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슬며시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네, 노 총관."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소백 도련님."
"나야말로 놀랐어. 한때 내각을 총괄하던 노 총관이 일월교도였을 줄이야."
"신교를 떠나서 자립하신 도련님을 이렇게 만난 것보다 놀랄 일은 아니지요. 예전 모습을 생각하면 상전벽해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게. 그럼, 그 감상을 계속 유지해 줬으면 해. 또 옛날처럼 생각하고 날 대하면 곤란하니까."
"물론입니다, 도련님."
오가는 말속에 여러 뜻이 숨어 있다.
명한이 가벼운 코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시선을 옮겼다.
왕이. 다른 이름으로는 왕 모모.
그도 신교를 오가며 한두 번 정도는 마주친 적이 있다.
"제사장이라고?"
"일월의 자식은 세대를 이어가며 천산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지요. 이번 제사장을 제가 맡았을 뿐, 특별한 건 아닙니다."
"그래도 한때 대모님 곁을 모시던 사람인데. 이런 측근에 일월의 뿌리가 남아 있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안 그래?"
"일월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저흰 그저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지요."
"때라. 일월이 본래의 자리를 되찾는 시기 말인가?"
"그들은 우리의 모든 걸 앗아갔습니다. 되찾는 것이 정당한 권리 아닙니까?"
"네 눈에서 읽히는 건 정당함만이 아닌 거 같은데."
"……"
왕이가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생각이 꽤 거칠게 요동치는 눈치였다.
"도련님께서는 어느 쪽에 서 계신 겁니까? 신녀님의 곁에서 존자라는 위치로 계실 건가요, 아니면 한때 신교의 소궁주였던 사람으로 계실 건가요."
"그걸 내가 선택해야 하는 건가?"
"꿈같은 이야기는 안 합니다. 신녀께서는 도련님의 선택을 따라가겠죠. 그럼 저희가 설득해야 하는 건 도련님 아닐까요?"
"현명하긴 한데…… 틀렸어."
"틀리다니요?"
"선택은 내가 아닌 향아가 한다."
향아를 무조건 따라오게 할 거였으면 만남은 필요 없다.
대업을 위해서 이들은 불필요한 존재.
차라리 잔당은 싹 치우고 새싹만 남기는 편이 낫다.
굳이 이런 귀찮음을 감수하면서까지 만남을 성사시킨 건 향아 때문이다.
"전 여러분이 묵은 복수심을 버리고 새로운 일월교로 오셨으면 해요."
이것이 선택.
"신교가 일월교의 터전을 빼앗은 건 맞지만, 그 바탕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어요. 과거의 일월교는 해와 달을 바라봄에 있어서 부끄러운 면이 존재했죠. 그러니 이젠 과거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일월교로 거듭날 필요가 있어요."
"과거의 은원을 모두 잊으란 말씀이신가요?"
"이미 묵은 원한이에요. 이를 따져 묻기 시작하면 누구도 굴레를 벗어날 수 없어요. 새로운 길이 있는데 굳이 그런 진창을 택할 이유가 있을까요?"
"진창이 아닙니다……"
"네?"
"진창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째서 정당하게 받아야 할 피의 대가가 진창이 되는 겁니까? 그들은 우리의 모든 걸 앗아갔습니다! 천마신교는! 천마는! 그를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탁자를 내리치며 쏟아내는 울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왕이의 목소리에는 깊고 깊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이것이 단순한 일월교의 권리와는 동떨어져 있음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복수로군."
"……"
"천마인가. 하긴, 곁에서 모신 대모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는 입장에서 천마가 고까워 보일 수는 없겠지."
"도련님이 뭘 안다고 떠드는 겁니까?"
"화무천은 정략이 아닌 자신의 연인을 그리워했어. 그걸 버림받았다 생각한 대모는…… 아니, 할머님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셨지. 그걸 곁에서 본 너라면 천마의 행동을 용서하기 힘들었을 거야."
"하. 하하. 맞습니다. 맞아요. 화무천, 그자의 선택으로 대모께서 어찌 돌아가셨는데…… 천마는 처첩을 수십이나 두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 더러운 선택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나요?"
명한이 쓰게 입꼬리를 말았다.
천마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는 어떤 면으로는 화무천보다 비상하고 비정한 인물이었으니까.
내부에 암약한 혼천과 훗날의 큰 싸움을 위해서는 강한 혈통이 필요함을 인지하고 선택한 것이다.
그 결과가 소백, 강유, 파운……
잔인해도 확실한 선택이었다.
"내가 이해한다면?"
"그 더러운 핏줄을 여기에서 끊어버리겠어!"
순간, 주변이 요동치며 기척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그 숫자가 물경 오십.
"안일하군."
기대 이하의 숫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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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난 이들은 혼천 무리였다.
천마가 이들을 솎아낸 이후에도 남아 있던 잔당이었다.
개중에는 팔반 휘하에서 움직이던 대장급 인물도 있었다.
무기를 휘두르며 일행을 포위했다.
"하하하! 잘해 주었소, 왕 모모. 이제부터는 우리가 맡지."
"신녀는 건드리지 마시오."
"알고 있소.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소백. 남은 이들은 마음대로 하시구려."
문제의 이들의 정보 누락이었다.
이들은 명한과 그 일행의 능력을 신교를 떠날 당시로 고정해 두었다.
그사이의 시간을 생각하면 큰 변화가 없는 것이 정상이지만, 아쉽게도 현실은 아니었다.
"뭐, 뭐냐!? 당황하지 말고 공격해!"
"대, 대장! 상대가 안 됩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 정도로 강하단 말이냐!"
달려드는 순서대로 하나씩 고꾸라졌다.
명한은 물론이거니와 향아나 은소소조차 이길 수 없었다.
신교에 숨어서 기회만 노리던 이들이 생사를 넘나들며 단련한 일행을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순식간에 제압당해 고꾸라졌다.
"이이익! 대체 무슨 사술을 쓴 거냐!? 설마 왕 모모 네가 배신한 건가!?"
"엄한 거로 핑계 대지 마. 그냥 너희가 우리보다 약했을 뿐이야."
"웃기지 마! 궁의 망나니 따위가……"
"그 망나니가 너희보다 낫다는 거다."
"강유!?"
말을 받은 건 명한이 아닌 강유였다.
어디선가 훌쩍 뛰어 장내의 중심에 섰다.
그 뒤를 따라서 그림자처럼 내려서는 무리의 숫자가 족히 수백은 넘었다.
작정하고 병력을 끌고 나온 모습이었다.
"어, 어떻게 네가!?"
"시끄럽다, 배신자. 네놈들의 처우는 천산으로 돌아가면 처리할 테니 그리 알아라."
"젠장!!"
처음부터 회담을 믿지 않은 건 명한이나 강유나 같았다.
이런 면에서는 확실히 형제 같은 면모가 있는 둘이었다.
"이들은 우리가 처리하지. 남은 건……"
"일월교도는 우리에게 맡겨라."
"저들은 신교 내부에서 암약하던 독 같은 존재다."
"그 독을 우리가 빼가겠다는 말이야. 칼로 돌려내면 상처만 깊어져."
"……흥. 탈이 나면 네가 책임져라."
"물론이지."
공염을 비롯한 남은 일월교도에게는 손을 대지 않고 물러났다.
일사불란하게 사라지는 모습이 잘 훈련된 부대임을 나타냈다.
‘일부러 끌고 나온 거군.’
일종의 경고였다.
"이건…… 이건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어떻게 저런 배신자에게……"
"앓는 소리 하지 마라, 왕 모모. 네 사적인 복수 때문에 일월교를 이용하려 한 건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우, 웃기지 마! 나는 교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위험한 역할을 자처했다고! 내 충성심은 변함이 없어!"
"하지만 넌 일월교의 최선보다 네 최선을 택했지."
"그건…… 그건…… 으아아아!!"
왕이가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만. 거기까지만 하시오."
하지만 그 손은 휘두르기도 전에 잡혔다.
"염 노사! 당신이 어떻게!?"
"우린 교의 이면을 봤소. 그 어둠은 세상 무엇보다 탁했지. 정말로 우리가 일월의 아이들이라면 그 어둠을 인정하고 넘어가야 하오."
"그런 궤변이……"
"궤변을 하는 건 당신이오. 복수를 위해서 교를 이용하려 한 건 당신이니까."
"……"
"슬픔은 이해하나 방식이 잘못되었소."
왕이가 단검을 떨어뜨리고는 풀썩 주저앉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공염도 노총관도.
"왕 모모의 처우는 교에서 처리하고 싶습니다. 신녀와 존자께서는 부디 이를 윤허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세요."
"향아가 저리 말한다면. 알아서 처리해라."
"감사합니다."
껄끄러운 건 공염이 떠안았다.
"노 총관. 그대도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나?"
"아닙니다, 도련님. 뜻대로 신교의 모든 교도들은 안전한 시기를 정해서 밖으로 내보내겠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신교가 아니겠군요."
"판단이 빨라서 좋네. 구원에 연연하며 사는 것보다 이편이 너희에게도 좋을 거야."
"글쎄요. 그건 시간이 답을 해 주겠죠."
남은 짐도 노 총관을 통해서 처리했다.
더없이 깔끔한 결말이었다.
"아. 그리고 도련님. 혹시나 교섭의 기회가 있을까 해서 가져온 물건인데…… 이제는 필요가 없겠군요. 받아주시기를."
"음? 이게 뭔데?"
"파운 도련님께서 향하신 장소입니다. 자취를 감추신 지 꽤 된 터라, 혹시나 해 추적해 두었습니다."
"파운이라고?"
명한이 노 총관이 건넨 양피지를 열어 봤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양피지를 양손으로 구겼다.
"도련님?"
"돌아가자."
아직 결말까지는 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