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4화 (194/235)

동상이몽

운무가 발아래로 흐르는 산의 정상.

천기자가 바둑판을 앞에 둔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길어지는 침묵에 시동은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했다.

침묵이 깨어진 건 또 다른 사람이 이곳을 찾은 후였다.

"무엇을 그리 고심 중인가요, 사부님."

"오. 윤아, 돌아왔구나."

"제자 동방윤, 인사 올립니다."

훤칠한 외모의 남자였다.

긴 도포를 펄럭이며 천기자 앞에 고개를 조아려 인사했다.

신기자와 같은 배분의 환상루에서는 가장 어린 제자였다.

천기자가 흐뭇하게 웃으며 손짓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래. 북해도에서의 수련은 성과가 있었느냐?"

"천막도와 북명신공은 명성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겨우 이치에는 발을 들일 수 있었지요. 이게 다 사부님 덕분입니다."

"하하. 다 네놈이 잘난 덕이지, 이 사부가 무에 한 일이 있겠느냐. 좋은 일이야, 좋은 일. 가뜩이나 사람이 줄어드는 이 환상루에 훌륭한 재목이 생겼어."

"과찬입니다."

겸양을 보이는 동방윤의 모습에 천기자가 한껏 흐뭇한 웃음을 보였다.

수많은 제자가 있음에도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극히 드문 일.

곁에서 보좌하던 시동조차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였다.

"그보다 사부님. 무언가를 걱정하는 듯 보였는데, 무례가 아니라면 여쭤도 될까요?"

"흐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오래된 인연이 하나 사라졌음을 느껴서 그랬을 뿐."

"오래된 연이라면…… 과거의 일월교 말인가요?"

"한때 뜻이 맞던 이였지. 후에 뜻이 달라져 갈라지기는 했으나, 편하지는 않구나."

"제가 괜한 이야기를 했군요."

"하하. 아니다, 아니야. 어차피 지난 연. 속세에 두고 온 것에 그리 큰 무게를 두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이렇게 번듯하게 자란 네 모습이 날 흡족하게 하는구나."

천기자가 동방윤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시 한번 웃었다.

사라진 옛 연은 정말로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그제야 동방윤도 정말로 큰일이 아니었다고 깨달으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제자가 북해도의 명물을 가져왔는데, 한번 맛보시겠습니까?"

"오오. 좋지. 역시 이 늙은 사부 생각하는 건 우리 제자밖에 없구나."

"하하. 사부님을 모시는 일이 제 인생의 낙 아니겠습니까."

"이놈이 북해도 바람을 쐬더니 흰소리만 늘었구나."

웃음으로 대체된 옛 인연.

사라짐을 그리워하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

"이건 좀…… 불편해요."

향아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뒤따라온 무리를 바라봤다.

저택 담벼락부터 거리 안쪽까지 길게 이어진 인파였다.

그 숫자가 수백은 훌쩍 넘었다.

"모두 신녀님의 용안을 보러 온 신도들입니다. 부디 내치지만 마시기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도련님 어떻게 안 될까요?"

"쿡쿡. 선택의 결과니까 받아들여야지."

"으으."

농담 섞인 대꾸에 향아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동방연이 건넨 일월신패를 손으로 만진 직후.

쏟아지는 빛에 휘감겨 일월교의 숨겨진 진전을 잇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동방연은 신패에 자격이 있는 자에게 건넬 일월교의 비전을 자신의 힘과 함께 숨겨 두었었다.

이를 향아가 전부 넘겨받게 되니, 공염의 입장에서야 다른 해석이 불가능했다.

조건 없이 향아를 일월신녀를 받들어야 했다.

"저는 확실하게 못 박았어요. 신녀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일월교를 돕긴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전 도련님 곁에 있기로요."

"저희도 그 사실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수긍하고 바고요. 하지만 일반 신도 입장에서는 신녀님 용안을 한번 보는 것이 일생의 축복이니 말리기는 어려울 따름이지요."

"하지만……"

"그래도 걱정은 마시기를. 절대로 신녀님과 존자께 피해는 주지 않겠습니다."

"히잉."

향아가 신녀의 직위를 받아들였으니, 그보다 위인 명한에게도 이름이 필요했다.

해서 공염이 궁여지책으로 만든 것이 일월존자.

촌스럽기 그지없는 이름이지만, 교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이런 식이면 교의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일단 오늘로 교도들의 순례도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그럼 전 신녀께서 적어주신 일월비전을 바탕으로 남은 이들을 수습해서 떠나겠습니다."

"어디로 가실 건가요?"

"본래의 계획대로 천산으로 가는 건 어렵겠죠. 천산 내부의 신도들에게도 상황은 전해 두었습니다. 자리를 잡고 다시금 일월의 빛을 일으켜 봐야죠."

"그런 거라면 자리 정도는 내가 알아봐 줄 수 있다."

대화를 지켜만 보던 명한이 슬쩍 끼어들었다.

"일월교의 치부는 어디까지나 천기자와 상부의 몇몇 놈들의 놀음. 일반 교도들이 하루아침에 신앙을 잃게 된 건 신교의 탓도 있지. 이래 봐도 신교의 소궁주였던 몸이니 책임을 일부 나눠 받아서 너희에게 갚고 싶다."

"으음……"

"사양할 건 없어. 너희를 계속 천산에 잡아두는 건 내 계획에도 좋지 않으니까. 차라리 자리를 제공해 두고 계속 관찰하는 편이 속 편하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그래. 적당한 자리를 물색한 뒤 흑점을 통해서 연락하지. 넌 미리 천산 쪽 사람들을 빼 와. 굳이 신교와 마찰이 일어나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네, 존자."

존자라는 말에 명한이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이름의 유치함은 둘째 치더라도 ‘존자’라는 직위는 이용가치가 있다.

"그럼, 일월의 가호가 두 분께 있기를."

"배웅은 안 한다."

왔을 때의 북적거림과는 반대로.

공염은 소리 없이 자취를 감췄다.

#

"터무니없는 내용입니다."

내각 심처.

그림자 아래에서 한 인물이 서신을 손으로 구겼다.

깊이 가라앉은 눈동자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충돌하고 있었다.

"염 노사께서는 어찌하고 계십니까?"

"흩어져 있던 교의 자식들을 수습해서 이동 중입니다. 듣기로는 흑점의 지원을 받아서 새로운 터를 여신다고……"

"어리석은!"

움켜쥔 손에서 서신이 다시 한번 구겨졌다.

그림자 속의 인물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서 일월교와 호응하던 왕모모란 여성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진행하는 겁니까? 염 노사께서는 일월의 염원을 저버리실 생각인가요?"

"아무래도 노사께서는 신녀의 탄생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입니다. 옛 일월의 터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그게 큰 전환점이 된 것 같습니다."

"전부 어리석은 짓입니다. 천마가 일월의 딸과 아들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전부 잊은 건가요? 그 치욕의 시간을…… 우리의 굴욕을 저버리는 겁니까?"

"아닙니다. 어찌 그런."

맞은 편에서 고개 숙이는 건 노 총관이었다.

신교 내의 일월교도들을 전부 담당하는 위치이기도 했다.

"……안 되겠습니다. 염 노사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주고받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은밀하게 시간과 장소를 물색해 주세요."

"직접 움직이는 건 위험합니다."

"알아요. 하지만 이대로 두면 남은 일월의 아이들이 동요합니다. 우리만큼 그 시절의 원한을 기억하는 이가 적지 않습니까. 이대로 일월의 기개가 사라지는 걸 지켜만 보실 건가요?"

"알겠습니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제가 찾아보도록 하지요."

"노 총관만 믿습니다."

할 말은 많은 눈치였으나 노 총관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이미 벌려놓은 판이 있고, 걸어온 길이 있었다.

묵묵히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뒤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

그리고 그 발취를 눈으로 좇는 왕 모모.

그녀는 한참을 생각하다 탁자 위의 종이 한 장을 더 집어서 앞으로 끌어왔다.

망설임 없이 글을 써 내려간 뒤 잘 접어 천으로 둘둘 말았다.

소매로 감춰지는 크기였다.

"대비는 해야지."

속삭임은 주변의 어둠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

명한이 물끄러미 향아를 바라봤다.

공염 등도 다 떠나고 난 뒤, 텅 빈 저택의 새벽이었다.

가벼운 발놀림으로 정원을 뛰어다니는 향아의 모습은 전과는 사뭇 달랐다.

걸음에 힘이 있되, 가볍기가 공기와 같았다.

발 구름 없이 허공을 몇 각이나 활보하고도 남았다.

"그게 동방연이 남긴 비전이냐?"

"아, 도련님."

명한의 기척에 향아가 땅으로 내려왔다.

살짝 달아오른 호흡에 볼이 붉고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명한이 마른 천을 건네며 가까이 걸음을 붙였다.

"예전 무공과는 느낌이 다르던데."

"네. 이건 연 언니가 창안한 무공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 애초에 일월교의 무공은 연 언니 가문에서 시작점을 두고 있거든요."

"동방연의 가문?"

"동방가문이라고 불렸나 봐요. 일찍이 동방에서 기인이 들어와 기예를 전수하고 무리를 규합하니, 그것이 동방가문의 시작이었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어요."

"동쪽이라. 어쩌면 내 고향과도 연이 닿았을지도 모르겠군."

"도련님의 고향이라면…… 고려 말이죠?"

"소백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둘 다 동쪽에 근본을 두고 있으니까."

안과 밖의 세계이나 많은 부분이 겹친다.

어쩌면 소백과 자신도 그런 관계였던 것이 아닐까.

명한이 스치듯이 그런 생각을 품어 봤다.

"그래서 그 무공은 어때? 몸에는 잘 맞아?"

"네. 처음부터 익혀온 것처럼 몸에 딱 맞아요. 비전은 해와 달을 따로 구별하지 않고 계속해서 순환하는 개념으로 접근했어요. 내공도 양공과 음공이 섞여서 순환하고 있죠."

"음양이기를 한 번에 다루는 건가? 위험하지 않아?"

"비전의 구결에 이를 조화롭게 다루는 방법도 섞여 있어요. 무당의 태극이나 소소 언니의 혼원일기와도 어느 정도 부합하는 부분이 있죠. 하지만 가장 놀라운 건……"

향아가 양손을 교차해서 원을 그렸다.

이 원은 띠와 띠로 묶여서는 끊어지지 않는 고리를 만들었다.

이 순환의 고리를 보며 명한은 가볍게 탄성을 뱉었다.

"인과의 띠."

"네. 익히고 난 뒤에야 이해를 했어요. 연 언니의 무공은 도련님이 사용하신 방법과 정확하게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었어요."

"하긴. 그녀가 천기자와 같은 반열에 이르렀다면 나보다 앞서는 건 당연한 이치. 500년의 시간 동안 그것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는 또 다른 문제겠어."

정신이 무너졌어도 무공 자체가 쇠퇴한 건 아니다.

"그럼 이걸 도련님과 함께 공유할 수 있을까요?"

"음?"

"띠를 다루기 위해 억지로 힘을 쓰기보다는 음양의 순환으로 익숙해지는 편이 나을 거 같아서요."

"음양순환의 수련을 하자?"

"연 언니는 혼자서 짊어지다가 무너지고 말았어요. 도련님의 짐은 제가 반드시 나눠서 지고 싶어요."

바라는 건 곁에서 버팀목이 되는 사람.

향아의 바람에 명한이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무공의 고하를 떠나서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젠 아쉬울 것이 없었다.

말똥말똥 바라보는 향아의 머리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네가 원한다면 해야지."

"……헷. 좋아요. 들어가서 바로 연습해 봐요."

"그래. 그렇…… 아, 잠깐. 연습은 잠시 뒤로 미뤄야겠다."

명한이 웃음을 지우고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어디선가 화살 한 대가 날아와 손아귀로 빨려 들어왔다.

흑점에서 사용하는 특급 전서였다.

"강유다."

천산에서의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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