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3화 (193/235)

새로운 연으로

모든 것은 순식간에 달라졌다.

기이함으로 가득 차 있던 통로도, 길을 막던 환영도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건 그저 평범한 동굴과 덩그러니 놓인 돌조각 몇 개가 전부.

환상의 주인이 사라지니 남은 것도 모두 없어진 것이다.

"허억. 헉."

명한은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동방연과의 싸움은 한계로의 치달음이었다.

계속된 힘의 확장은 견디기 버거울 수준.

조금만 더 싸움이 지속되었다면 죽는 건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뒤늦게 공염 무리가 명한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이들은 상황의 전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란 일월의 진실은 이곳에 없었다.

"500년 묵은 망령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그뿐이야."

"그럼 기록은? 일월신교와 천마신교에 대한 진실은 어디에 있소?"

"아직도 기록 타령을 하는 건가."

"우린 그 기록을 찾기 위해서 이곳까지 온 것이오! 진실을 알기 위해서!"

"하아. 넌……"

"진실을 볼 각오는 돼 있나요?"

마지막 말은 명한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소소! 향아!"

조금은 지친 기색의 은소소와 향아였다.

명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가까이서 본 둘은 작은 상처만이 있을 뿐, 치명적인 건 없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실? 진실이라고 했소? 안에서 무언가 찾은 것이오?"

"기록이 있더군요. 정신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과거를 더듬었어요. 일월교의 창시자인 천기자를 만난 순간부터 떠나는 그날까지. 그리고 천마가 일월교를 전복하는 순간도 전부 기록되어 있어요."

"천마의 그날까지? 이 안에서 그걸 어떻게 보았다는 말이오?"

"이면을 보는 거울이 있으니까요. 떠났어도 일월교는 그녀의 자식과도 같은 곳. 정신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계속 보고 걱정하며 그리워했어요. 그 하나하나가 전부 글로 기록되어 있더군요."

"어디에 있소?"

훌쩍 다가오는 공염에게 향아는 가벼운 손짓으로 답했다.

동굴 안쪽, 쭉 들어가면 있는 동방연의 처소였다.

‘내 먼저 보리라.’ 공염은 두말하지 않고 동굴의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안에서 무엇을 찾게 될지도 모르는 채.

#

공염 일행이 떠나고 명한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몸이 지쳐서가 아니었다.

앞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향아. 소소. 둘 다 이쪽에 앉아 봐."

둘은 대꾸 없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명한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둘 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잠시의 침묵이 공간을 흐르고, 이내 닫혔던 입이 열렸다.

그 시작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의 이야기.

명한이 소백이기 전의 모습이었다.

"……"

"그런……"

길고 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두서없이,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명한 스스로도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저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자신의 감정과 섞어서 지난날을 이야기했다.

수차례나 표정이 바뀌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많았고, 충격적인 내용도 상당했다.

목소리는 갈라지고 시간은 기묘하게도 길게 느껴졌다.

"이게 다야. 그래서 난 소백의 말대로 이 땅에 남아서 그의 이름으로 살고 있어."

"……솔직히 황당한 이야기네. 안과 밖의 이야기는 어떤 초절한 경지의 구분으로만 생각했을 뿐인데, 설마하니 정말로 밖이 있을 줄이야."

"나도 이치 같은 건 알지 못해. 다만, 과거의 황제가 어떤 식으로든 나와 연결되었고 내 소망을 이루어준다는 명목하에 불러낸 거야."

"죽음을 목전에 둔 소백의 몸으로?"

"응. 그 사실이 모두 내가 쓴 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은소소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상황 자체는 납득하지만, 그게 이해로까지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녀의 개념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럼, 나와 만났던 시기의 너는…… 이미 과거의 소백이 아니었다는 거네?"

"그때는 이미 소백이 독을 마시고 난 뒤니까."

"그런가. 그럼 나는 됐어. 솔직히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한 건 아니지만, 내가 경험한 소백이라는 인간이 전부 너였다는 걸 알았으니까. 내가 검을 맡긴 사람이 다른 자가 아니라면 충분해."

"그래."

은소소는 그리 어렵지 않게 넘어갔다.

충성을 맹세한 대상이 바뀐 건 아니니까.

문제는……

"향아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향아였다.

충성의 대상이 바뀌지 않은 은소소와는 다르게 향아는 과거의 소백과 지금의 명한을 모두 겪었다.

중간에 그 대상이 바뀐 격이다.

"과거의 도련님은 굉장히 뾰족한 분이셨어요."

"……소백?"

"네. 상처 입기 두려워 남에게 거친 말을 하고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기 일쑤였죠. 사십팔궁의 망나니. 이 별명은 어쩌면 가벼운 것일지도 몰라요."

"향아, 넌……"

"하지만 그런 도련님이라고 해도 제게는 소중했어요. 주인 아가씨께서 제게 부탁한 분인걸요. 곁에서 모시고 언제나 보듬겠다고 맹세했어요. 근데…… 전 지키지 못했어요. 도련님이 독을 마시고 돌아온 날.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향아의 두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죄 많은 건 저예요. 전 도련님을 지키지도 못했으면서 갑자기 달라진 도련님의 모습에 안도하기만 했어요. 다정해지셨다고. 부드럽게 변하셨다고. 그저 그 사실이 기뻐서 제가 저지른 일을 기만하고 있었어요……"

"그건 아니야. 너는 몰랐잖아. 네가 모시던 사람이 변했을 거라고만 생각했잖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전 속으로 알고 있었어요. 이 사람이 내가 아는 도련님이 아니라고. 하지만…… 하지만 곁에 선 분이 너무나 눈부셔서 그냥 무시했어요. 잊었어요. 지금의 도련님이 더 좋았으니까. 그렇게 전 다시 한번 약속을 저버린 거예요."

"향아, 넌…… 끝까지 나는 원망하지 않는구나."

억지로 자신을 책잡는 모습에 명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속으로 알긴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저건 그저 밖을 원망하지 못하니 속을 탓하는 행동일 뿐이다.

그 마음 씀씀이가 다 느껴져 가슴이 아릴 수밖에 없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흐느끼는 향아를 당겨서 품에 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너한테는 잘못이 없어. 잘못은 모두 내가 했는걸. 원망해도 차라리 나를 원망해."

"흐윽. 흑. 어떻게 도련님을 원망해요……! 아무리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걸요. 그러는 건 너무 아파서…… 할 수 없어요."

"하아. 내가 미안하다."

"흐윽. 흐으으윽. 흐아아아앙!!"

결국, 울음이 터져버렸다.

아이처럼 목놓아 우는 향아를 명한은 그저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 여려서 원망조차 못 하는 아이.

백 마디 말이 있어도 뱉을 건 없었다.

헝클어진 과거를 어쩌지 못하면, 그저 앞으로 잘하겠다 다짐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흐아아앙!!"

눈물이 메마를 때까지.

향아는 그렇게 울었다.

#

눈물바다가 마를 즈음.

앞서 움직였던 공염 무리가 돌아왔다.

저마다 한 움큼 책을 집고 있었는데, 표정이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이, 이게 모두 사실이오?"

떨리는 목소리의 공염.

쥐고 있던 책을 명한 앞으로 던졌는데, 제목이 ‘일월비사’였다.

파르륵 넘어가는 책장은 천기자가 지시했던 여러 실험에 대해 그림과 주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뭘 기대하고 온 건지 모르겠군. 일월교는 처음부터 황제의 명령을 받은 천기자가 특정 목적을 위해서 설립한 집단이야. 그 목적이라는 건 지금 네가 보는 그 책에 모두 적혀 있지."

"거짓말! 일월의 가르침은 만민의 양생에 대한 것이었소! 이런…… 이런 실험 따위가 아니란 말이오!"

"네 믿음을 폄훼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후대의 일월교가 어떤 식으로 포장되었든, 그들의 본질이 바뀌는 건 아니야. 이곳의 주인이었던 동방연이 시도했던 것과 같이 천마 역시 이를 부당하다 여겨서 전복했을 뿐."

"그, 그럴 수가……"

공염이 비적비적 걷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 모든 것이 위서라 치부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수십, 수백 권의 책에 적힌 수많은 사건의 일람은 그가 아는 역사와도 부합했다.

그리고 의문을 가졌던 공백을 정확하게 채워주었다.

왜 일월교가 그런 식으로 운영되었는지.

주변에서 벌어진 사고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모든 의문이 해결되니 남는 건 공허함뿐이었다.

"하. 하하…… 그럼 우리는 뭐를 위해서 존속했던 것인가.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일월교가 인간으로 실험이나 하던 사교 무리였다면 대체 어떤 가치가 있단 말인가."

"딱히 상관없는 것 아닌가?"

"뭐?"

"너희가 믿는 일월교는 저 책에 적힌 일월교와 같은가?"

"아니오! 그럴 리가 없지 않소!"

"그래. 그 말대로 너희가 믿는 일월교는 천기자의 일월교와는 같지 않다."

과거 수많은 이들이 일월을 숭배했던 건 큰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일월은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치.

먹고 자고 일하고 쉬고.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가치를 설파하여 많은 공감을 얻은 것이 시작이었다.

천기자가 사람들을 속이고 일월을 방패로 둘렀다고는 하나, 믿음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니다.

"천마가 일월의 역사를 지운 것도 같은 이치 아닐까?"

"천마가……?"

"그는 일찍이 일월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반역의 정당성을 얻고자 했다면 일월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키는 것이 훨씬 편했겠지. 그편이 반발도 적고.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남아 있는 일월의 아이들을 위해서?"

"모든 것이 부정당하면 사람은 살 수 없다. 당시 교의 수뇌는 대부분 숙청당했지만, 일반 교도는 그렇지 않았어. 실제로 핵심 가문 중 일부는 신교로 흡수되기도 했고. 천마는 처음부터 일월의 가르침을 전부 부정한 것이 아니야."

공염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게나 부정하던 사람이야말로 자신들을 인정해주던 존재였다.

머리가 복잡해서 터져버릴 것 같았다.

"공염 아저씨."

"시, 신녀?"

그때, 향아가 입을 열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걸 가져가세요. 연 언니가 마지막에 제게 준 물건이에요."

"연 언니라면…… 동방연 말입니까? 초대 교주의 아내분."

"네. 저보다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일 거예요."

향아가 건넨 함 안에는 해와 달이 교차하는 옥패가 담겨 있었다.

풍기는 기운만 봐도 범상한 물건은 결코 아니었다.

공염은 이 옥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언가를 알아챈 듯 크게 놀랐다.

"일월신패! 맙소사! 사라졌던 일월신패가 이곳에 있었다니!"

"일월신패?"

"일월신교의 신물입니다. 이 자체로 일월의 말씀을 대변하고 교의 모든 결정권을 지닐 수 있는 절대적인 물건이지요."

"그럼 더 잘됐네요. 이걸 가지고 일월교를 정비하세요. 과거와는 다른. 진정한 의미로 일월교를 다잡으면 됩니다."

그것이 동방연의 뜻이다.

향아는 그리 생각하고 일월신패를 잡아서 공염에게 건넸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러려고 했다.

그녀가 일월신패에 손을 대는 순간.

화악―!!!

빛과 쏟아져 향아를 휘감았다.

"오. 오오오……! 일월신녀시여!!"

"신녀시여!"

"신녀님이시다!"

성스러운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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