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화 (192/235)

지는 연

명한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쥐었다.

가녀린 손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너무 선명했다.

백 마디 천 마디의 말로도 마음을 다 전달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

"미안하다."

"……도련님."

품에 안긴 작은 새를 보며 입술을 물었다.

수많은 단어가 머리 안을 맴돌았지만, 어떤 것도 쉽게 뱉을 수 없었다.

어떻게 쉬울 수 있을까.

자신은 ‘도련님’ 자리를 빼앗은 찬탈자인데.

"너한테만큼은 말했어야 한다. 그게 옳았어. 하지만 난…… 무서웠다. 네가 날 떠날까 봐. 나라는 인간을 더 이상 바라봐주지 않을까 봐. 그저 용기를 내지 못한 겁쟁이였을 뿐이다."

"……그분은 어떻게 되신 거예요?"

"독을 마신 그날 죽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신에 의해서 이곳으로 왔지."

"신…… 이요?"

"우리가 칭하기를 옛 황제. 그 존재에 의해서."

길고 긴 이야기.

하지만 이 모든 걸 이곳에서 다 정리할 수는 없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다.

"모든 건 이곳을 나가는 즉시 전부 이야기해 주마. 네 도련님이었던 남자의 바람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정착했는지. 그때까지만 나를 믿고 기다려다오."

"……네, 도련님."

"날 아직도 그렇게 불러주는 거냐?"

"도련님은 도련님이니까요."

짧은 답이지만, 명한은 깊이 안도했다.

향아는 이 땅에서 자신을 처음으로 인정해준 사람.

그녀가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지녔다.

"나중에 털어놓을 이야기. 나도 들을 수 있는 거지?"

옆으로 다가와 검을 움켜쥐는 은소소.

"물론이지. 이제야 겨우 내가 누구인지를 거짓 없이 말할 수 있게 됐어."

"그래. 그거면 됐어. 그럼 저 징그러운 것부터 처리하고 떠나자고."

부스스 가라앉는 모래 먼지의 저편.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동방연을 향해서 투기를 집중시켰다.

‘모두가 행복했습니다.’라는 결말을 위해서는 아직 한 단계가 남았다.

#

동방연은 주인을 불렀다.

진법을 만들고 불합리를 깨뜨리려 노력하는 주인이라면 이 상황도 반전시킬 수 있었다.

명한 등을 제압하고 향아를 설득하면 되니까.

이 저주받은 족쇄를 깨뜨릴 수 있는 건 주인이 유일했다.

"주인. 주인. 주인…… 어째서 답이 없나이까?"

하지만 무릎을 꿇고 그 존재를 불러도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목 놓아 소리쳐도 얼굴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아. 아.

버림받은 거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동방연의 정신이 조금씩 무너졌다.

"조심해라. 이제 곧이다."

"……허공!?"

그 순간.

어디선가 허공이 나타나 명한의 앞에 섰다.

"미안하지만 모든 걸 실토했던 건 아니네. 이 땅이 500년간 저주에 묶여있던 건 사실이나, 그게 반란이나 배신에 의한 건 아니었지."

"뭐? 그럼 설마……?"

"그래. 모든 건 천기자의 아내였던 동방연의 폭주에 의한 것."

허공이 손을 뻗어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육체가 부서지고 붉은빛의 금속이 칼날처럼 바닥에 박혔다.

그리고 이내, 파편 하나하나가 빛나고 서로를 연결해 하나의 진을 구축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동방연은 언젠가 있을 연을 감지했네. 훗날 자신을 찾아와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벗어나게 해 줄 인연. 그걸 위해 자신의 혼을 뜯어서 허상을 만들어 두었네. 이름짓기를……"

"허공."

"그래. 속여서 미안하네. 하지만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나를 눈치챘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명한은 그제야 이 공간 전역에 깔린 힘의 기척을 이해했다.

여럿이 반란을 일으켜 한 사람을 무너뜨린다고 보기에는 너무 획일된 기운이었다.

결국,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건 동방연 한 사람의 것.

스스로 만든 힘에 스스로가 묶여서 지금껏 괴로워한 것이다.

"기회는 한 번뿐이네. 그녀의 정신을 금쇄로 묶어둘 터이니, 본질을 부숴주게나."

"본질을 부순다면 당신은……"

"나는 그녀에게서 태어난 존재라네. 그녀가 나이고 내가 그녀이지. 삶을 논하기에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고통받았어. 이젠 그만 쉬고 싶을 뿐이라네."

"……제가 도울게요."

"향아?"

"연 언니와 함께 있을 때 느꼈어요. 연 언니는 끝없이 괴로워하고 있어요. 고통과 외로움. 배신과 갈망 사이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해요. 이걸 끊어주는 것이……제가 일월의 피를 잇는 이유겠죠."

향아는 자신이 왜 이곳에 서 있는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인과라는 매듭으로 이어진 천기였다.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다면……

"나를 연 언니에게 안내해줘요."

한다.

망설임은 없었다.

#

신호 같은 건 없었다.

선두에 명한이 뛰고 은소소가 그 뒤에.

향아는 가장 마지막으로 대열에 합류했다.

그 사이로 허공이 동방연의 힘을 제압.

순간적으로 싸울 수 있는 공간과 뚫어야 하는 영역이 제공됐다.

"뒤는 맡길게. 이번만큼은 모든 걸 쏟아야겠어."

"걱정하지 마. 네 뒤에는 항상 내가 있으니까."

명한이 전력을 끌어 올렸다.

무아의 경지에서 받아들인 세상의 모든 기운이 그의 의지에 따라서 응축.

천기라는 관념적인 띠로 묶여서 전신을 휘감았다.

이것이야말로 천의무봉(天衣無縫).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극치의 경지였다.

"아…… 아아아아! 향 동생을 내놔!"

기운에 반응하여 동방연이 움직였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천지의 기운이 요동치더니 실타래처럼 뭉쳐서 공간을 짓이겼다.

명한이 세상의 기운으로 옷을 지어 입은 거라면 동방연은 그 실타래를 갈퀴로 삼은 셈이다.

그야말로 극치와 극치의 싸움.

명한의 주먹과 동방연의 실타래가 맞닿는 순간 아득한 충격에 공간이 비틀렸다.

소리도 없이 반경 십여 장이 통째로 붕괴.

땅도 벽도 천장도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소소!"

"알고 있어!"

이건 아무리 검성의 검이라도 막을 수 없다.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은소소는 일찌감치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충격파를 돌아서 향아와 함께 경계면으로 뛰었다.

세상 끝처럼 땅이 무너지고 아찔한 칼바람이 불어왔지만, 둘의 접점보다는 나았다.

"도망칠 수 없다!! 향 동생을 훔쳐가지 마!"

이에 동방연이 손을 오므리며 강하게 당겼다.

그러자 공간에 손을 수십 배 이상 부풀린 듯한 그림자가 나타나서는 공간을 할퀴었다.

바닥과 벽이 수 장 범위로 갈라지고 움직일 공간마저 앗아갔다.

"헛소리하지 마! 대체 누가 네 동생이냐! 향아는 네 것이 아니야!"

디딜 곳이 없다면 만들면 그만.

은소소의 검이 착(着)의 요령으로 주변 공간의 잔재를 끌어왔다.

마치 태극을 그리듯 원형으로 기워 붙더니, 어느새 디딜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은소소는 그대로 향아의 손을 잡고 그 위를 가로질렀다.

땅은 아슬아슬했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더는 갈 수 없어!!"

"네 상대는 나다, 동방연!"

동방연이 계속 은소소와 향아를 쫓게 할 수는 없다.

명한이 힘의 띠를 강하게 말아서 바닥을 후려쳤다.

땅이 움푹 파이며 수십 장 단위로 갈라지며 요동쳤다.

제아무리 동방연이라도 땅 없이 설 수는 없는 법.

휘청거리다 파편을 밟고 자세를 다잡았다.

돌아보는 얼굴은 악귀 그 자체였다.

"어째서 날 막는 거냐! 왜! 무엇 때문에! 나는 그저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방법이 틀렸어. 이미 망가진 네게 이런 말이 의미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연은 억지로 끊는 것이 아니야."

"헛소리. 헛소리야! 인연 따위는 전부 헛소리야! 그이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는걸! 내 바람을 외면하고 날 내쳐버렸어! 천년을 함께하자고 했으면서!"

"동방연!"

주변 공간이 거친 소리를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건 벽이 깨지고 땅이 부서지는 수준의 개념이 아니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안’과 ‘밖’을 나누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다.

혼천의 서복이 쐐기를 박아서 이루려던 바로 그 현상.

‘……위험해.’

그녀의 힘이 정말로 경계를 허물 수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만약 이라도 그 일이 가능해진다면 적어도 지금 이 공간의 모든 생명체는 살아남을 수 없다.

붕괴의 시발점은 반드시 허무에서부터니까.

"서둘러 은소소!"

각오를 던지고 모든 의식을 주먹으로 집중시켰다.

길을 열기로 약속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뿐.

두 번 다시 어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천의무봉(天衣無縫)] [섬(殲)]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이렇게.

일권을 내질렀다.

#

무너진 공간을 밟으며 은소소와 향아가 통로를 가로질렀다.

폭음과 충격에 땅이 흔들리고 공간이 제멋대로 요동쳤지만, 두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이 공간의 핵심은 지금 명한이 맞서는 동방연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짜 동방연이 핵심이었다.

모든 건 동방연이 이 공간 안에서 붕괴를 겪으며 일어난 일.

그녀의 정신은 여러 갈래로 분열되고 진실된 조각을 깊은 곳으로 숨겼다.

은소소와 향아가 달려가는 곳은 바로 그 진실이었다.

"이 너머에요! 느껴져요!"

헝클어진 공간 안에서 향아가 소리쳤다.

육안으로는 구별되지 않는 특별한 느낌이 너머에 있었다.

은소소는 이를 확인할 수 없었으나 의심하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향아가 소중한 건 명한만의 일이 아니었다.

그녀도 긴 시간 함께 여행하면서 쌓은 정이 있었다.

"믿고 기다릴게."

"네. 꼭!"

전력으로 검을 휘둘러서 앞의 공간을 잘랐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반으로 갈라지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이 안으로 뛰어드는 건 검을 쥔 은소소가 아닌 향아였다.

엄청난 압력이 몸을 휘감는다 싶더니 일순간 다른 장소에 도착했다.

오래된 형태의……

"집이군요, 연 언니."

잔잔한 목소리에 구석에 쪼그려 앉은 한 여인이 몸을 떨었다.

등은 굽고 몸을 움츠려서 더욱 작아 보였다.

"여기에서 시작했던 건가요?"

"……"

"추억의 냄새가 나요. 아주 행복했던 시절의 냄새. 아마 그때는 무엇도 의심하지 않고 무엇도 걱정하지 않았겠죠."

향아는 천천히 걸어서 동방연의 뒤에 섰다.

"슬펐을 거예요. 이런 추억이 있으면 더더욱. 자신이 모든 믿음을 주었던 사람이 배신한다는 건 정말로 슬픈 일이니까요."

"……넌 왜 괜찮은 거야?"

처음으로 나온 반응.

향아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동방연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희미한 떨림과 두려운 기척에 말조차 느리게 했다.

"글쎄요. 저도 가슴이 아픈 건 사실이에요. 그렇게나 믿었던 사람이 진실을 속이고 있던 거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에게서 받은 것들이 모두 거짓인 건 아니잖아요. 기뻤고, 즐거웠고, 다정했고. 그래서 원망만 할 수 없었어요."

"배신했잖아. 언젠가 또 그럴 거라고."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어요. 믿는 걸 포기하고 마음 주기를 거부하면 결국 슬퍼지는 건 자기 자신이니까요."

"넌…… 나보다 훨씬 강한 아이구나."

"아니에요. 경우 흉내만 내고 있는 걸요."

희게 웃는 향아의 모습에 동방연은 눈을 크게 떴다.

그 웃음은 언제고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기억조차 흐릿한 오래전에.

그때는 아마 모든 것에 의심이 없었을 것이다.

믿고 사랑하고 마음 주는 것에 순수하게 기뻐하던 시절.

‘그래. 그랬지. 난 배신에 원망하고 상처 입은 마음에 슬퍼한 게 아니야. 더 이상 그러지 못하는 내 나약함에 절규했던 거야.’

나아가지 못하고 맴돌기만 하는 마음은 썩기 마련.

이렇게 깊은 곳에 웅크리기만 한 자신은 이미 원망할 용기조차 잃은 겁쟁이에 불과했다.

"너라면. 너와 그라면 어쩌면 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땅에 손을 뻗어 오래된 함을 하나 꺼내 들었다.

세월만큼 묵은 먼지가 그 위를 덮고 있었다.

"가지고 가렴. 나는 끝까지 하지 못했지만, 너와 그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구나. 그저 미련만 남은 어리석은 사람을 막아다오."

"연 언니……?"

"아아. 하늘 끝에서 님 그리워 연을 띄워 보냄에 왜 답하는 것은 노을만이오……"

"연 언니!"

동방연.

천기자의 아내이자 500년 전, 기인의 마지막은 그렇게 초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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