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1화 (191/235)

연의 장

주먹과 주먹이 맞닿았다.

천마신공 권장편의 흑뇌(黑雷).

비틀림 사이로 뇌기가 쏟아져 바닥을 훑고 공기를 태웠다.

매캐한 향이 폐부로 스며들어 호흡을 교란하고 흔들린 틈에 이격이 날아왔다.

명한의 몸이 붕 떠서 몇 장이나 밀려났다.

"……큭."

가볍게 떨리는 다리.

충격이 아래까지 닿아서 다음 동작을 지연시켰다.

고수 간의 싸움에서 이 잠깐은 치명적인 시간.

천마는 달아오른 유성처럼 거리를 좁히며 다시 주먹을 뻗었다.

채엥―!!

순간, 뛰어들어 권격을 쳐올리는 은소소.

어마어마한 경력에 전신이 파르르 떨렸지만, 궤적을 비트는 것에는 성공했다.

그녀가 익힌 검성의 묘리는 모든 검술의 정점이자 시작점.

베고, 찌르고, 흘리고……

기본에서 가장 강했다.

"아직 할 수 있겠지?"

"걱정하지 마. 이제 슬슬 눈에 익숙해지고 있으니까."

그사이 명한이 마비를 풀고 일어났다.

손끝을 툭툭 털어 몸을 정비하고 호흡을 길게 가져갔다.

‘천마는 과연 명실상부 천하제일인. 하지만 진짜는 아니야.’

명한은 몇몇 이음새에서 그걸 느꼈다.

이 공간에 존재하는 천마는 어디까지나 명한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든 존재.

즉, 모든 건 상상의 산물이었다.

"설정의 모든 것이 녹아든 천마는 분명 대단하지만…… 실제만큼은 아니야."

상상 속의 천마는 그저 강할 뿐이다.

강하고 강해서 무엇도 대적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검.

하지만 그렇게 강하기만 한 것은 오히려 상대하기가 쉽다.

"계속 떠들기만 할 건가?"

"설마. 슬슬 널 꺾어볼까 해서."

"반가운 말이로군. 하지만 뱉은 말은 책임져야 할 거다."

"물론!"

명한이 땅을 차며 뛰어나갔다.

거의 동시에 천마의 권격이 허공을 찢고 전방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땅이 뒤집히고 하늘이 시커먼 뇌우로 뒤덮였다.

그야말로 천마다운 절망적인 광경.

‘약해!’ 하지만 명한은 그 뇌우를 정면에서 돌파했다.

아무리 강해도 순수한 기운의 충돌은 무아를 통해서 흘릴 수 있었다.

땅을 찍고 주먹으로 뇌성벽력을 터뜨렸다.

쿠르르르릉.

천마와 명한의 한 치 앞에서 충돌하는 힘.

공간이 뒤틀리며 여러 선의 균열이 퍼져나갔다.

선에 닿은 지면은 녹고 대기는 견디지 못하고 증발했다.

"꽉 잡고 있어!"

그 틈으로 은소소가 뛰어들었다.

오직 ‘찌른다’라는 한 가지의 의식으로만 채워진 일격이었다.

두 사람의 충돌로 만들어진 파괴적인 힘의 파동을 가르고 그대로 찔렀다.

점에서 빛이 명멸하고 힘이 파도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명한도 은소소도.

심지어 천마도 이를 견디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갔다.

"훌륭하다!"

하지만 그 ‘튕겨 나갔다.’라는 의식의 빈틈 사이로 천마가 나타났다.

사고와 사고의 흐름을 끊고 자신의 행동을 욱여넣는 천고의 기예.

날아가는 명한의 위로 검은 벼락을 떨어뜨렸다.

하늘이 반으로 갈라지고 세상이 흑색과 백색으로 나뉘었다.

소리보다 먼저 땅과 그 주변 공간이 소멸하고 이어서 엄청난 뇌성이 뒤를 이었다.

파편조차 남지 않는 국소적인 소멸 공능이었다.

"아…… 쉽지 않네."

그곳에 존재하는 유일한 생존자는 명한.

손아귀로 천마의 흑뇌를 움켜쥐고 부들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개입하는 가장 순수한 파괴로 설정 지은 천마의 ‘흑뇌’를 막기 위해서는 명한 역시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놀랍군. 인과의 띠로 내 흑뇌를 막은 건가?"

"밖의 힘을 그만큼이나 받아낸 것도 결국은 천기니까.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이 있다면 바로 천기일 거야. 엮어서 쓴다면 흑뇌도 받아낼 거라고 자신했지."

"훌륭하다, 훌륭해. 외경에 취한 어리석은 것들과는 다르구나!"

"……아, 그래. 사람은 언제나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에 소홀한 법이니까."

"하하하. 넌 자격이 있다. 가라, 이 너머로."

양손을 활짝 편 천마를 향해서 명한이 잡아둔 흑뇌를 던졌다.

이 흑뇌는 인과의 띠.

즉, 천기로 응축한 흑뇌의 정수였다.

천마의 몸은 찰나의 순간에 그대로 분해되어 무의 존재가 되었다.

"음?"

"기척이 달라졌어."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명한과 은소소는 주변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허상을 구축하던 힘이 깨어지며 모든 것이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향아!!"

그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명한이 열린 길로 뛰어들어갔다.

#

명한이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첫눈에 들어온 건 주저앉아 있는 향아의 모습이었다.

그 뒤로 서 있는 건 어딘가 묘한 표정의 여인.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설마하니 주인의 진법을 통과할 줄이야. 놀랍네요."

"넌 누구냐? 향아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무슨 짓이라니요. 전 향 동생을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웃으며 물러나는 여인.

그녀의 손끝에 향아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어딘가 텅 빈듯한 눈동자가 명한의 눈에 들어왔다.

콰르르릉.

불같은 감정에 거력이 피어나 땅을 흔들었다.

"이런. 조심하셔야죠. 그러다가 향 동생이 다치면 어쩌시려고 그러나요."

"……너. 사지 멀쩡하게 돌아가고 싶다면 당장 향아를 풀어 줘."

"후후. 계속 같은 말을 하게 하네요. 전 향 동생을 건드린 적이 없습니다. 지금 향 동생은 일찍이 봤어야 할 진실과 마주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

"아하하. 그 얼굴은 재미있네요. 진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겁쟁이. 당신 눈동자에 서린 두려움이 이 인연의 진실입니다."

비웃음이 칼날이 되어 명한의 심장에 박혔다.

너무 아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말라 비틀어진 늙은이가 어디에서 헛수작이야?"

"……하?"

그때, 앞서 나선 건 은소소.

명한의 앞을 막고 여인을 향해서 독설을 뱉었다.

"이곳은 이미 500년 전에 갇힌 세상이라며. 그럼 그쪽도 다 말라 비틀어진 늙은이 아니야? 속은 썩을 만큼 썩었으면서 남 마음 가지고 장난질 치지 마."

"이 어린 계집아이가 혓바닥은 살아 있구나."

"당연하지. 난 살아 있으니까. 그쪽처럼 죽지 못한 망령 따위와는 다르다고."

"네년이 정말로 목숨을 거는구나. 어리석은 일이야. 진실도 토로하지 못하는 위선자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시끄러워 늙은이. 난 이미 소백의 검이 되기로 맹세했어. 무언가 말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그건 그만큼 무거운 이야기라는 거겠지. 그렇다면 검은 그저 기다릴 뿐이야. 그 짐이 가벼워지기를 기다리면서. 너 같은 늙은이 혓바닥에 휘둘릴 만큼 내 맹세는 가볍지 않아."

은소소가 검을 뽑아 바닥에 꽂았다.

그녀의 기세는 마치 대장군과 같아 주변의 음험함을 밀어냈다.

그리고 이 기운은 명한에게도 닿았다.

"……너한테는 항상 빚만 지는 거 같다."

짧은 숨으로 생각을 다잡고 은소소 옆으로 나섰다.

"알면 갚아. 죽다 만 망령 따위는 서둘러 치워버리고 향아와 함께 돌아가자. 가는 길에 좋은 객잔이 있다면 술이나 한잔 사고."

"한잔이 문제겠어? 널 위해서라면 객잔을 통째로 빌려주지."

"하하. 통이 커서 좋네."

웃으며 검을 뽑아 여인을 겨눴다.

망설임을 지운 명한도 주먹으로 의지를 드러냈다.

"……마음에 안 드네. 어째서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거야? 배신당한 거라고. 의리 같은 걸 지킨다고 알아주는 사람 따위는 없어. 너희가 찾는 이 아이도 마찬가지야. 진실을 마주하고 나면 결국 너희에게서 등을 돌릴걸?"

"네가 뭘 원하는지는 알아. 향아로 하여금 제대로 된 승계를 받지 못하게 해서 주박을 깨려는 거지. 진실을 목도한 향아라면 배신감에 날 원망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 그거야. 우린 진실을 알고 정의를 위해 노력했지만, 긴 시간 동안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어. 기억에서는 지워지고 망령이 되어 이곳에 갇혔지. 마찬가지인 거야. 인간은 다 그런 존재인걸. 그걸 이제 와서 올바른 연자라고 이어받게 두라고? 웃기지 마. 그런 건 인정 못 해."

여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앞서 맞닥뜨렸던 환상의 힘이 아니었다.

"다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자."

500년의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인 저주의 힘.

"나, 동방연이 길잡이가 되어 줄게."

비할 바 없는 절대의 기운이었다.

#

향아는 길게 뻗은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맑은 호수가 길을 감싸고 지금껏 본 적 없는 기억을 투영하고 있었다.

어딘가 어수룩해 보이는 남자.

혼자 방안에 박혀 글만 끄적이는 실패자의 인생.

실패, 실패, 실패로 이어지는 수많은 슬픔.

"……"

이건 빛나지 않았다.

호수로 투영되는 기억 속에는 그녀가 아는 ‘도련님’의 모습이 없었다.

계속된 실패에 좌절하고 평범하게 슬퍼하며 마지막에는 포기에 손을 뻗는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평생을 모셔왔던 사람도 아니고, 곁에서 성공을 지켜봤던 사람도 아니었다.

이건 그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왜……"

한 마디를 머금었다, 입을 닫았다.

처음에는 아마 기뻐서였을 것이다.

과거의 ‘소백’은 상처투성이의 고슴도치 같은 사람.

자신의 상처 때문에 남을 밀어내고 상처 입히곤 했다.

향아 자신도 마찬가지.

그의 날카로운 말이, 험한 행동이 가슴과 몸을 종종 할퀴고 지나갔었다.

그래서 다른 ‘소백’이 반가웠다.

변했구나. 다른 사람이 됐구나.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는구나.

다른 점은 모두 무시하고 기뻐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건 아니었잖아."

부탁받은 건 어디까지나 ‘소백’에 대한 것.

곁에서 지키고 보살피고자 마음먹은 건 진짜 ‘소백’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상황이 되어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이 향아를 아프게 했다.

"흐윽. 흑. 죄송해요…… 죄송해요, 도련님."

자신을 속인 누군가에 대한 분노보다 안타까움과 죄책감이 강했다.

왜 알아봐 주지 못했을까.

왜 아무런 것도 묻지 않았을까.

곁에 선 지금의 ‘소백’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 얄팍함이 너무 죄스럽고 미안했다.

― 일어나. 진실을 알았으면 그만 일어나.

"도…… 도련님?"

― 일어나서 저 검을 쥐어. 쥐고 내 몸을 앗아간 배신자를 죽여!

"하, 하지만……"

― 죽여! 죽이라고! 날 외면한 채 혼자서 편하고 즐거웠으면 됐잖아? 넌 누굴 지키기 위해서 존재했던 거냐? 나야 아니면 그놈이야!?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향아가 주저앉았다.

눈물이 쏟아져 앞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머리로는 자신을 속인 ‘누군가’를 원망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가슴이 그러지를 못했다.

언젠가부터 곁에 있던 그 ‘누군가’가 너무 다정해서.

머리를 다독이던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서.

걱정하듯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달콤해서.

아무리 쥐어짜도 그를 원망할 수 없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도련님, 죄송해요. 저는 이것밖에 안 되는 계집인가 봐요. 도련님께 받은 은혜도 주인마님께 받은 은혜도 모두 갚지 못한…… 이 어리석은 계집은 이렇게밖에 할 수 없나 봐요."

향아는 언제부턴가 눈앞에 있던 검을 양손으로 뽑았다.

그리고 날을 자신의 가슴으로 향해 강하게 당겼다.

은혜를 갚을 수 없다면……

그렇다고 이 마음도 배신할 수 없다면……

죽음만이 답이었다.

[향아―!!!]

하지만 그 순간.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호수가 요동치고 길이 사정없이 갈라졌다.

그리고 검을 쥔 손의 반대편에서 익숙한……

그리운 손이 나타나 포개졌다.

조금은 헝클어진 모습에 이곳저곳 상처 입은 얼굴이지만, 몰라볼 수는 없다.

"도련님!"

누군가가 아닌 도련님.

외침과 함께 주변 공간이 허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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