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마주할 용기
누구나 숨기고 싶은 이야기는 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 말하고 싶지 않은 속내.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것을 터놓는 것이 더욱 어려운 법이다.
명한도 마찬가지였다.
몇 해를 함께 살아오며 죽을 고비를 넘긴 이들이 다수.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그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자기 자신으로 온전하게 받아들여질 자신이 없었기 때문.
"……어디로 가면 향아를 찾을 수 있지?"
그것만큼은 아직 아니다.
아직은 용기가 없다.
어쩌면 평생 그 사실만큼은 드러내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명한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갈라져 있었다.
"이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거울 호수를 통과해야 하네. 자네들이 상대했던 배심경의 마물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존재하는 곳이지."
"길이나 말해."
"500년간 망령들이 만들어 둔 곳이네."
"안내나 하라고!"
높아진 목소리에 주변이 침묵했다.
"……알겠네. 바람이 그렇다면 나도 만류할 수는 없겠지."
그 침묵 끝에 답하는 허공.
두 손을 합장하듯 모았다가 좌우로 넓게 벌렸다.
천장부터 바닥까지가 모래알처럼 바스러지며 큰 통로로 벌어졌다.
건너편이 칠흑과 같은 어둠으로 덮여 있는 무저갱의 입구.
선뜻 나아가기 힘든 그런 모습이었다.
"소백. 이렇게 가는 게 정말로 맞는 거냐?"
"……가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만큼은."
"후우. 그래, 알았어. 네 뜻이 그렇다면 이번에도 뒤를 따라가 주지. 하지만 명심해. 너는 혼자서 가는 게 아니야."
"소소."
"게다가 향아를 찾고 싶은 건 너뿐만이 아니라고."
명한의 옆으로 은소소가 섰다.
무엇에 당황하는지 한 번의 의문도 없이.
그녀가 맹세한 ‘지키는 검’다운 모습이었다.
"……하아. 고맙다."
그제야 명한도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긴 숨으로 속의 불을 토해내며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했다.
여전히 속은 뜨겁지만, 그래도 무엇이 중요한지는 구별할 수 있었다.
"허공.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니겠지?"
"내 역할은 하나라네. 연자에게 일월의 모든 것을 건네는 것. 만약, 향아 저 아이가 그 자격을 지니고 있다면 내 바람은 자네들과 크게 다르지 않네."
"일단은 구하라 이거냐?"
"길을 열고 그림자들을 최대한 걷어내겠네. 그사이에 저 아이를 구해오게나."
"우리도 가겠소!"
투합하는 명한과 허공 사이로 끼어드는 건 공염.
하지만 명한은 그를 곁눈질로만 훑은 뒤 고개를 흔들었다.
"네 실력으로는 도움이 안 된다."
"신녀의 생사가 걸린 일이오!"
"그러니까 더 안 돼. 너희를 저 안으로 끌고 가서 죽게 하는 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지만, 그건 향아가 바라는 일이 아니야. 그러니 너희는 이곳에서 기다려."
"큭."
"속임수 따위는 없어. 적어도 이제는."
많은 뜻을 몇 마디에 함축한 뒤 명한이 한 걸음 나섰다.
무저갱의 입구는 전처럼 어둡지 않았다.
"가자. 우리 식구를 구하러."
"응."
망설임을 지우고 앞으로 걸었다.
#
긴 통로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어둡고 답답한 동굴이 이어질 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도착한 장소는 숲이었다.
수풀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이나 코끝을 자극하는 풀내음 모두 진짜였다.
"이게 전부 진짜일 가능성은 없고…… 환상이라는 건가."
"귀신 놀음이군."
"환상이라도 이 수준이면 진짜와 다를 바 없을 거야. 조심해."
경고를 뒤로한 채 두 사람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바스락거리는 풀잎의 마찰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찰음."
"저 앞이다."
두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금속의 마찰음을 감지했다.
기척을 숨기고 은밀은 발걸음을 유지한 채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이동했다.
"저건……"
뒷모습으로만 보이는 한 소녀와 뒷짐 진 채 검을 늘어뜨린 중년인이었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기도가 범상치 않았다.
일행을 막기 위해 안배한 적인가.
이 정도로 판단한 순간, 그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천마?"
조금은 더 젊어 보이지만, 그건 천마였다.
검을 늘어뜨린 채 표정 없이 기세를 쏟아내는 천하제일인.
"하. 기억났어. 이건 내가 천마검을 전수받을 때의 모습이야."
그리고 뒷모습만 보이던 여인은 다름 아닌 은소소였다.
과거의 한때.
기억 속에만 존재해야 할 것들을 이 공간이 실체로 꺼내왔다.
"거기 누구냐!"
순간, 가짜 은소소가 기척을 감지하고는 달려왔다.
여물지 않은 천마검의 출수였다.
은소소가 가볍게 검을 뽑아 이에 맞서니, 힘의 차이로 가짜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연수로는 얼마 차이가 나지 않지만, 경험과 경지가 달랐다.
"크, 크윽! 누군데 감히 이곳을 침범하는 거냐!?"
"우리를 못 알아보는 거냐? 아니…… 그 전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어?"
"빈틈!"
검극을 비틀어 틈새를 찌르는 가짜 은소소.
매우 기민한 반응이지만, 진짜와 비교하면 역시 모자랐다.
은소소는 면으로 검날을 밀어내며 좌수로 가짜의 옷깃을 잡아서 눌렀다.
콱, 조인 숨통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크, 크윽! 이거 놔!"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실(實)과 허(虛)의 차이는 종이 한 장에 불과하다."
"……!"
어느새 다가와 은소소의 어깨에 손을 올린 천마.
깜짝 놀란 그녀가 탈력으로 힘을 빼고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을 천마는 눈으로만 쫓을 뿐 따라오지는 않았다.
"훌륭하군. 잘해봐야 몇 년일 터인데, 그사이에 그런 성취를 이룬 것인가?"
"……정말로 천마인가?"
"무엇이 진짜인지를 묻는다면 기준이 필요하다. 네가 선 곳에서 바라본 나는 분명 허상이나, 이 허상의 세계에서의 나는 실존한다."
"말을 어렵게 하는 건 여전하군. 스스로가 허상인 걸 인지하는 거냐?"
"이런 어설픈 술(術)로 구현한 존재에게 자각이란 어려운 경지다. 내가 나를 아는 건 내 심상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준이기 때문이다."
"……인지한다는 얘기네."
은소소가 마른 입술을 깨물며 명한의 옆에 섰다.
허상이든 아니든 크게 상관없다.
눈앞의 존재가 천마라면 그 자체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 공간의 술이 내게 강요하는 건 너희 둘에 대한 시험이겠군. 내 인지의 시간을 기준으로 몇 년 후이니 그 향상을 보는 건 나름대로 즐거움이겠어."
"그냥 길을 비켜준다는 선택지는 없는 건가?"
"술에 의해 탄생한 허상이 그 법을 어기면 소멸하기 마련이다. 이왕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얻었으니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아비의 책임이겠지."
"……아비라고? 네가 그런 말을 해?"
"음. 하하. 그렇군. 허상이되 투영된 건 바람이라."
천마가 조용히 웃으며 손을 늘어뜨렸다.
검 한 자루 쥐지 않았지만 무지막지한 압박감이 풍겨 나왔다.
"소백. 허상이라지만 천마야."
"응. 나도 알아. 하지만 이때가 아니라면 언제 또 패륜을 저질러 보겠어."
하지만 이에 맞서는 명한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숨기지 않고 뿜어내는 무아의 기운은 허상의 세계라 해도 거침이 없었다.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를 관통하는 본질의 법이었기 때문이다.
"와라."
부모와 자식 간의 싸움을 시작했다.
#
"……아!"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호수 바닥으로 퍼진 물결 안으로 보이는 명한의 모습이었다.
향아는 눈을 떼지 못했다.
"네 바람대로 보여는 준다만 의미 없는 짓이란다."
"연 언니."
연이 그 옆으로 앉아 호수로 손짓했다.
물결이 번지며 명한의 모습을 조금 더 가까이 비쳤다.
허상으로 만들어진 천마와 극한 수준의 공방을 주고받는 모습이었다.
"나이에 비해서 아득한 경지에 이르렀구나. 확실히 뭇사람의 숭배를 받을만한 실력이야. 하지만 향아야. 너도 알고 있잖니. 저 사람조차 주인께는 미치지 못해."
"그건 연 언니가 하는 말이죠. 도련님은 언제나 자기보다 강한 사람을 이기며 올라왔어요."
"후후. 믿음이 대단하나 보구나?"
"네. 전 도련님을 믿어요."
단단한 답에 연은 되레 미소를 지었다.
가벼운 손짓으로 호수의 물결을 지우며 자리에서 엉덩이를 뗐다.
사라지는 형상에 향아가 ‘아!’라며 짧게 신음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따라오렴."
"하지만 도련님이……"
"허상 속의 죽음은 현실의 죽임이 아니란다. 네가 원하기 전까지는 네 도련님을 해치지 않아. 대신 향아도 약속대로 이 언니의 바람은 들어줘야지?"
"……알았어요."
주인과 만나고 이곳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것.
그게 연이 내건 명한을 죽이지 않는다는 약속이었다.
향아가 호수에 남은 미련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어디로 데려가실 생각이에요?"
"주인께서 만들고 계신 투영의 그림이란다."
"투영의 그림?"
"방금 봤던 천마가 어디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니?"
"그건…… 소소 아가씨의 기억?"
연이 입을 가리며 가볍게 웃었다.
"똑똑하구나, 향아는. 맞아. 주인의 진법은 대상의 기억을 읽어서 그 안의 인물을 허상으로 구현할 수 있단다. 이를 기물에 담은 것이 일월배심경이지."
"그럼 또 다른 기억을 읽어서 허상을 만들겠다는 건가요?"
"으음. 이번에는 조금 성격이 다르단다."
"달라요? 어떻게 말이죠?"
어떻게든 작은 정도라도 알아내려는 향아.
그 속내를 훤히 읽으며 연은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달라붙을수록 효과는 배가되는 법.
그렇기에 아무런 제약도 걸지 않았다.
"향아는 도련님을 언제부터 모셨지?"
"어릴 때부터 곁에서 모셨어요. 도련님의 어머니께서 절 구해주신 이후로는 전속으로 곁에 머물렀죠."
"그래. 어릴 때의 도련님은 귀여웠니?"
"그럼요. 어릴 적 도련님이 얼마나 어여뻤는지 직접 보면 놀랄걸요?"
"그렇구나. 그럼, 그렇게 귀여운 만큼 성격도 좋았겠지?"
"아……"
사십팔궁의 망나니.
이게 소백의 별명이었다.
"왜 답을 못 하니? 아닌가 봐?"
"그, 그렇지 않아요. 도련님은 일찍이 어머님의 여의고 마음고생이 많았어요. 삭막한 천마궁 안에서 삐뚤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어요."
"후후. 나는 네 도련님의 성격을 탓하는 게 아니란다. 다만, 한 가지. 네 도련님의 성격이 언제부터 지금처럼 차분해진 것인지 의아할 뿐이지."
"그건…… 아마도 독을 마시고 난 뒤였을 거에요."
궁곡의 초대를 받고 참석한 자리에서 받은 음식.
소백은 처서로 돌아온 직후부터 크게 앓았다.
성격이 바뀐 건 깨어난 이후.
‘그러고 보니 그때의 도련님은 뭔가 이상했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
향아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앓고 난 뒤에 사람이 바뀌었다 이거지?"
"그게 뭐 이상해요? 사람이 큰일을 당하면 다들 바뀌기 마련이잖아요."
"사십팔궁의 망나니라 불리던 사람이 몇 년 만에 천하를 두고 다투는 기린아가 될 만큼?"
"……그, 그만큼 재능이 있었던 거죠."
"후후. 재능 이야기가 아님을 너도 알고 있잖니."
웃음 섞인 연의 말에 향아의 얼굴이 굳었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크게 뛰고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자, 도착했단다. 이 안에서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거야."
"확인이요?"
"그래. 이 안에서 볼 것은 네 도련님의 기억."
"……!"
"네가 소백이라 부르는 사람의 기억이란다."
주춤.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나는 향아.
어쩌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을지 모를 한 가지 의문에 대한 답.
심장이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