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189/235)

마주하는 자신

명한은 향아가 사라졌음을 오래지 않아 알아차렸다.

단순히 감각을 혼동시킨다고 나올 수 있는 결과가 아니었다.

그의 경지에 그런 속임수는 불가능했다.

"네놈들 수작이냐?"

안과 밖의 동조라 판단했다.

공염 무리를 향해서 주먹을 내밀었다.

"우리는 아니오! 우리 역시 이 안쪽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 무슨 일이 벌어졌든 우리와 관계된 건 절대로 아니오."

"헛소리하지 마! 이 안으로 유도한 건 너희잖아! 향아를 빼돌리기 위해서 수작 부린 거 아니야!?"

은소소도 검을 꺼내 기운을 둘렀다.

삽시간에 주변이 살벌하게 변해갔다.

까딱 잘못하면 칼부림이 날 그런 분위기였다.

"이게 무슨 소란들인가."

그때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제3자의 목소리가 사이로 끼어들었다.

통로의 어두운 부분에서 훌쩍 뛰어 내려서는 백발의 노인이었다.

양쪽의 기운, 정확하게 한가운데였다.

"노인장…… 대체 뭐 하는 인간이지?"

명한은 노인을 단순히 노인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눈앞의 존재는 마치 뭉개진 점토와 같았다.

그 경지도 힘도 정확한 재단이 어려웠다.

"호오. 이렇게 젊은 아이가 이런 경지에 올랐다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뭐 하는 인간인지 물었을 텐데?"

"하하. 경계하는 건 이해하나만, 그러고 있을 시간이 있나? 사라진 일행이 있을 텐데?"

"……!"

향아를 거론하는 말에 명한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손이 박자와 박자 사이를 찢고 노인의 옷자락을 쥐었다.

살짝 그러쥐는 손끝에 중심이 어긋나고 노인의 몸이 저절로 딸려왔다.

다 됐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노인은 자신의 옷자락을 팽팽하게 당겨 손가락을 튕겨내고 힘의 축을 본래의 것으로 돌렸다.

박자와 박자 사이의 짧은 호흡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둘을 제외한 밖의 모든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후우. 대단하군, 대단해. 내가 그 나이 또래에는 초식 하나 익히기도 버거웠는데. 요즘 밖의 아이들은 전부 그 수준인가?"

"헛소리는 그만하고 답해. 사라진 일행. 향아는 어디에 있지?"

"그 아이 이름이 향아인가? 어울리는 이름이군."

"더 이상은 없다."

명한이 모든 힘을 끌어와 전신에 축적시켰다.

여차하면 무아의 경지로 안과 밖의 경계를 지우고 단번에 노인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허허. 진정하라고, 젊은이. 늙은 내 몸으로는 그런 거친 공격은 받을 수 없어. 자네가 말하는 향아라는 젊은 처자를 찾게 도와줄 테니, 힘은 좀 풀지."

"……"

"이 나이 먹고 농담이나 하려 했다면 굳이 나올 필요도 없었겠지. 그 아이를 찾고자 하는 것 아닌가?"

그제야 명한도 힘을 풀고 손을 내려놓았다.

기묘하게 옥죄여 있던 주변 기세가 탁 풀려, 공염 등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로서는 견딜 수 없는 수준의 힘이었다.

"자자, 갈 길이 바쁘니 나를 따라오게나."

"여기에서 털어놓는 편이 좋을 텐데?"

"그러고 싶다만…… 이렇게 지지부진 머물러 있으면 다시금 그림자에 잡히고 말 거네. 자네도 시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겠지?"

"쯧. 안내해."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 짜증이 난다.

명한이 혀를 차며 노인의 옆에 섰다.

"참. 내 이름은 허공이라네."

노인은 웃음 비슷한 것을 그리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회색의 돌로 주변이 막힌 공터에 도착했다.

이런저런 잡기들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었다.

나름대로 살림살이라 부를만한 그런 물건들.

노인의 걸음이 멎자마자 명한이 입을 열었다.

"향아는 어디에 있지?"

"꽤 성미가 급한 아이로군. 그리 서두를 필요는 없네. 그 아이라면 무사하니까."

"내가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어."

"참 번거롭기도 하군."

노인이 손으로 허공을 두드렸다.

그러자 잔잔한 호수에 돌이 떨어지듯 파문이 번지며 어떤 장면을 투영했다.

오래된 오두막과 그 앞에 앉아 있는 여인.

"향아!"

바로 향아였다.

명한이 소리 높여 이름을 불러봤지만, 그녀는 듣지 못했다.

"그렇게 바락바락 외쳐봐야 의미 없네. 상의 저편에 우리의 목소리는 닿지 않으니까."

"상의 저편? 저곳으로는 어떻게 가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네만. 이젠 좀 진정하고 앉지 그러나."

"……지금 저 모습에 거짓은 없겠지?"

"깨우친 자라면 알고 있을 텐데?"

명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과 감각은 상 너머의 향아가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믿고 안심할 수 있지만, 되레 불안함이 깊은 것도 사실이다.

한참을 그렇게 망설이다 노인의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급하니까 둘러 말하지 마."

"이거 원, 돕고도 욕을 먹는 상황이구만."

노인이 끌끌거리며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머지는 대화에 끼어들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다.

따로 행동하기에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했다.

"일단 내 소개부터 먼저 하지. 이름은 앞서 말했듯이 허공이라네. 일월교의 17대 음주(陰主)를 맡고 있다네."

"음주? 일월신교에 그런 직책이 있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소."

익숙한 명칭에 반응한 건 공염이었다.

"호오. 자네는 일월교의 아이인가?"

"신교의 마지막 호법이었던 공염이라 하오."

"마지막? 흐음. 역시 그렇게 된 거였군."

"역시? 신교에 대해서 알고 있소?"

"뭐, 어느 정도는. 흐름대로 갔다면 일월교는 다음 세대의 인물에게 모든 걸 빼앗기고 사라졌겠지?"

공염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멈칫했다.

노인, 허공의 말투는 이 현실을 경험한 자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과거의 누군가가 예측했던 상황에 대한 전달.

"휘무제 이후로 밖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휘무제라면…… 족히 500년은 넘었소. 설마 그때의 사람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쉽지만, 생각대로네. 500년이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긴 시간이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요? 정말로 당신이 500년 전 사람이라고?"

"놀라기는. 이미 그보다 더한 사람도 여럿이거늘."

허공은 가볍게 웃으며 바닥으로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먼지가 부르르 떨며 하나의 형태로 모여들었다.

그건 해와 달이 겹치는 일월교의 문양이었다.

"이곳까지 왔다면 자네들은 이미 천기자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군."

"옛 황제의 뒤에서 불로불사를 찾던 도인. 일월교를 세우고 후에는 환상루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땅을 만든 인물. 대충은 알고 있는데."

공염 대신 명한이 말을 받았다.

"환상루라. 퍽이나 어울리는군."

"500년 전이라면 일월교를 천기자가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을 때 아닌가? 그때의 사람이 왜 이곳에 이러고 있는 거지?"

"그건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네. 우린 천기자에게 반기를 들었고, 패배하여 쫓겨났지."

"반기? 그런 기록은 본 적이 없는데?"

"진실을 담아 줄 사람은 이미 그때 대부분 죽었기 때문이라네. 진실은 숨기고 거짓으로 일월의 뜻을 호도했지. 그게 천기자라는 인간의 수법이라네."

"거짓말!"

공염이 크게 화를 내며 땅을 주먹으로 쳤다.

굉음과 함께 공동 전체가 흔들림에도 허공은 그저 덤덤히 바라만 봤다.

"일월교는 본디 해와 달을 본떠서 그 의미를 만들었네. 해가 달을 지키고 달이 해를 지키는 것으로 서로가 상생하는 뜻을 담고 있지. 그렇다면 자네는 알고 있나? 일월교의 핵심인 천기자가 어긋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지켜볼 사람이 누구인지를."

"그건……"

"모르겠지. 지워졌으니까."

허공의 웃음에는 꽤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천기자는 불로불사를 위해 점차 위험한 방법에 손을 대기 시작했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생명을 생명으로 대하지 않았네. 이에 반감을 가진 사람이 나오는 건 당연한 결과였지."

"그게 너희였다는 건가?"

"맞네. 당시에는 주인의 명령으로 음면(陰面)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지."

"주인?"

"해가 있으면 달이 있고, 달이 있으면 해가 있는 법."

"……일월교에 천기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또 있다고?"

명한조차 상상해 본 적 없는 가정이었다.

옛 황제의 명령으로 불로불사를 추구한 건 천기자.

당연히 그가 일월교의 유일한 지도자로 생각했었다.

"음과 양의 조화. 당시 천기자에게는 아내가 있었네. 옛 황제의 무리한 명령에 걱정하는 아내로서, 실마리를 잡아가는 남편을 돕는 조력자로서, 엇나가기 시작한 자를 만류하는 견제자로서. 그렇게 한 명의 주인이 더 존재했었네."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군. 천기자에게 아내라. 그걸 왜 아무도 몰랐지?"

"지웠으니까. 한 번의 반란 이후로 천기자는 철저하게 자신의 주변을 정리했네. 일선에서 물러나 피가 이어진 사람에게 교주의 직위를 넘겼지. 그때부터 역사의 일면에서 사라져서, 암약하기 시작한 거네."

"그런 일월교는 신교에게 당해서 역사에서 지워졌으니, 이런 모순도 또 없군."

"세상은 언제나 균형을 맞추는 법이라네."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말이었다.

"그럼, 이 땅과 기록들은 모두 너희가 말하는 주인의 작품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네. 당시의 반란이 실패하고 주인은 앞날을 예견했지. 일월교의 역사가 다른 방식으로 정립되리라는 것을. 해서, 필요한 정보와 기록을 탈취해서 세상 속으로 숨었네. 언젠가 이를 이어받을 정당한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언젠가…… 네 주인이라는 사람도 읽던 거냐?"

"천기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렇기에 우리는 그림자 속에 숨어서 긴 시간을 견뎌올 수 있었던 거네."

"이 공간 자체도 그 힘의 일부겠군."

"세상의 틈을 비틀어 만든 공간. 이 공간 안에서 우리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 삶을 영유할 수 있었네. 연자가 오기를 기다리며."

이건 이미 비슷한 경험이 있다.

천기자의 환상루도 그렇고 명왕도의 환경도 비슷했다.

어쩌면 그 본류가 지금 이 땅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잠깐. 그럼 향아를 데리고 간 것이 너희의 주인이라는 말이냐?"

"……아쉽게도 그건 아니네."

허공의 답에 명한의 얼굴이 굳었다.

애초에 이상했다.

주인이라는 인물이 허공과 같은 계열이면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굳이 그의 입을 통해서 전할 이유가 없다.

만나서 한 번에 토로하면 되니까.

"우린 너무 긴 시간을 이곳에 갇혀 있었네. 사명을 잊은 이들이 속출하고 이곳을 벗어나 속세의 죽음을 기리는 자들이 늘어났지. 그 과정에서 비틀린 술과 법을 깨우치는 이들도 존재했네. 하지만 주인의 힘이 있기에 언제나 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지."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너무 긴 시간이었네. 주인은 이곳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힘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지. 향아, 저 아이를 데리고 간 건 이 땅의 이면. 그림자 안의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라네."

"……그럼 어째서 향아를 데리고 간 거지?"

"주인의 예언을 깨기 위함이네. 주인은 훗날 정당한 승계자가 이곳을 찾아 일월교의 어둠을 씻고 바른길을 인도할 거라 장담했네. 만약 이 예언이 깨진다면 주인은 더 이상 이 공간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지."

"그게 향아와 관계가 있다는 거냐?"

허공이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시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 감추는 가장 깊은 비밀. 그것을 알았을 때, 정당한 승계자는 선택의 기로에 설 것이라 했네. 저 아이, 향아가."

"……"

명한이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그런 말.

어쩌면 영영 피하고 싶었던 그런 상황.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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