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아의 길
하루를 머물며 수십을 치유했다.
그만큼 마을에 병들고 약해진 이들이 많았다.
흔히 있는 작은 병부터 손대기 힘들 정도의 큰 병까지.
마을의 규모를 고려하면 지나칠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이게 일월신교의 현실이오."
이에 공염은 담담하게 토로했다.
"우리는 오랜 세월 천마신교를 피해서 몸을 숨겨왔다오. 정상적인 활동은 어려웠소. 그나마 무예를 익힌 이들이 밖의 일을 처리하고 안의 살림을 도왔으나…… 한계는 명확했지. 도망치는 자들의 삶은 이런 것이오."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굳이 숨지 않아도 될 텐데?"
"어리석은 이야기.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숨기지 않기의 일월의 후예임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오. 굴 밖으로 나가서 일월의 기치를 걸면 천마신교가 그걸 그대로 두고 볼 것 같소?"
그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신교는 일월에 대한 흔적을 지우고 그들을 역사에서 없앴다.
이제 와서 생존한 이들이 마을을 이루고 신앙을 기르고 있는 것이 발각된다면 내버려 둘 가능성은 현저하게 낮다.
"그래서 신교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길을 열겠다 이건가?"
"본디 우리가 누렸어야 할 자유요. 천마가 이를 앗아가고 우리의 길을 짓밟은 것이오. 숨겨진 역사에 그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을 터. 그대는 정말로 이를 맞닥뜨릴 용기가 있는 것이오?"
"흥. 날 가벼이 여기지 마라. 난 곳은 신교이나 걷는 곳은 나만의 길이다. 죄악이 있다면 드러내고 다잡으면 그만. 부끄러움 따위로 내 곁의 이들을 창피 줄 생각 따위는 없어."
"……좋소. 적어도 그대는 허언을 일삼는 인간은 아닐 터."
공염이 숙소의 창문을 가리던 발을 손으로 걷어냈다.
건물 밖, 마을의 전부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인파가 모여 있었다.
그들 모두가 외치는 이름은 신녀.
밖에서 온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보다 신녀라는 피부에 와 닿는 신앙에 대한 환호였다.
이것이 공염의 수작임은 알지만, 명한은 그 열기를 무시할 수 없었다.
사람이 이만큼 열광한다는 건 그만큼의 사연 또한 있다는 의미.
"진실을 보고 난 뒤에도 신녀께서 여전히 그대의 곁에 남을 것 같소?"
"향아는 마음이 따듯한 아이다. 곤궁한 자를 보면 돕고 싶어 하고, 슬퍼하는 자를 보면 눈물을 흘리지. 허나, 그것이 의미 없는 신앙의 희생양이 되라는 말과 같지는 않아."
"우리의 신앙을 모욕하지 마시오."
"착각하지 마. 내가 말하는 건 신앙이 아닌, 신앙을 가지고 노는 인간이니까."
명한은 공염을 직시했다.
그의 의도의 순수함과 진실의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셈은 다를 것이 없다.
불로불사를 미끼로 사람을 쓰는 혼천의 서복이나 피와 제물을 다루는 혈교의 양생이나.
숱하게 존재해 왔던 우두머리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다.
"내가 존중하는 건 향아의 의지. 무엇을 원하든 무슨 수작을 부르든 오로지 그녀의 선택만을 존중한다. 이를 막아선다면 내가 이 땅의 악마가 되는 한이 있어도 모조리 쓸어버릴 각오도 있어."
"……"
마른침을 삼키는 공염.
눈앞의 남자를 보자면 과거에 맞닥뜨렸던 거인을 떠올리게 한다.
하늘에서 태어난 악마, 천마.
겹쳐 보임은 거짓된 환상은 아닐 터.
"안내해라. 너희가 말하는 진실로."
과연 이것은 옳았을까.
공염 스스로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
해와 달이 음각으로 새겨진 벽이 좌우로 둘.
어지간한 저택 수준의 바위가 중앙에 하나.
공염이 안내한 마을 뒤편의 장소는 생각보다 거대한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여기가 일월교의 비고인가?"
"당시 천마에 의해서 일월신교가 몰락하는 순간에도 열사들은 기록을 품에 안고 불길을 해쳐서 도망쳤소. 우리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
"쓸데없는 미사여구는 그만 붙이고 안내나 해."
"……이쪽이오."
조금은 머쓱하게 공염이 앞장섰다.
안으로 들어가는 인원은 전부 일곱.
공염과 종소를 포함한 일월교의 넷과 명한, 은소소, 향아 셋으로 이루어진 무리였다.
남은 이들은 마을에 남아 뒤를 대비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 너머는 일월신교의 비전 술법으로 잠겨 있소. 이를 열기 위해서는 술법을 사용할 수 있는 제사장급의 인물과 가동을 위한 직계의 피가 필요하오."
"그래서 향아가 필요했다는 거군."
"신녀께 피해가 갈 일은 없소. 문을 열기 위해 약간의 피가 필요할 뿐이니."
명한이 슬쩍 향아 쪽을 돌아봤다.
그녀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다 한 걸음 나아가 공염의 옆에 섰다.
슥, 가볍게 베는 손짓에 팔뚝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바위 앞 작은 그릇에 피가 차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오."
공염의 손짓에 향아가 다시 걸음을 물렸다.
약간의 어지러움은 있었지만, 다른 문제는 없었다.
명한이 성큼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공염의 다른 행동을 경계했다.
"해와 달의 아들로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옵니다."
짤랑하는 방울 소리와 함께 잘게 물결치는 피.
좌우의 거대한 돌들이 이에 공명하에 희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물결치던 피는 이내, 하나의 문양을 완성.
공염의 손짓에 따라 바위의 안쪽으로 스며 들어갔다.
그그그그긍.
그리고 좌우로 열리는 문.
"이 너머가 바로 일월신교의 비고요. 진실을 목도할 각오는 돼 있소?"
"그만 떠들고 앞장서기나 하라니까."
"……따라오시오."
시커먼 입구로 성큼 걸어가는 공염.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
바람이 바뀌었다.
명한은 통로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느꼈다.
밖과 이 안쪽은 바람의 성질부터 모든 것이 달랐다.
아주 오랫동안 열지 않은 서랍처럼.
이 안의 모든 건 지금이 아닌 과거에 묶여 있었다.
"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오. 기록이 보관되어 있는 건 확실하나,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터. 무엇을 맞닥뜨릴지는 예상할 수 없소."
"함정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그대가 일월신교의 마지막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겠소?"
"꼭꼭 숨겨 놓겠지."
피와 주술은 그저 첫 번째 증표였을 뿐.
이 너머에 다른 방해물이 있으리란 건 당연한 추측이었다.
"도련님, 앞에 뭔가 있어요."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머지않아 나왔다.
향아가 어둠 속의 기묘한 형체를 꿰뚫어 봤다.
키는 칠 척 반.
바닥을 끄는 듯한 소리와 함께 조금씩 가까워졌다.
안을 지키는 인형이라도 되는 것일까.
명한이 내공을 눈에 집중하여 어둠 안쪽을 바라봤다.
"……피해!"
아차 하는 순간에 다가온 인형.
명한은 향아의 옷자락을 아래로 당기며 몸을 급하게 눕혔다.
날카로운 검 한 자루가 얼굴 앞을 스치고 벽을 긁었다.
카드드득.
부서지는 파편이 요란하게도 튀었다.
"은소소!?"
"나 아니야!"
놀랍게도 검을 날린 건 은소소였다.
자연스럽게 나온 이름에 진짜 은소소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기 자신과 이런 식으로 맞서는 건 쉬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월배심경과 유사한 효과로군."
명한은 바로 이치를 간파했다.
일월교의 신물이었던 일월배심경은 상상 속의 적을 재현할 수 있었다.
과거의 권왕도 동료인 은소소도 마찬가지였다.
진짜의 힘을 가진 가짜.
지금 눈앞의 은소소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
"젠장, 다 비켜! 저 가짜는 내가 상대할 테니까!"
추가로 날아온 참격은 진짜 은소소가 뛰어들어서 방어했다.
검과 검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충격파가 주변을 찢었다.
일행은 서둘러 물러나며 피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단순히 가짜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힘이었다.
"너. 무슨 잔재주를 부리는 줄은 모르겠지만, 내 검은 검성의 진전을 잇고 있다."
검을 고쳐잡는 은소소.
들불처럼 날뛰던 기운이 천천히 가라앉으며 검으로 스며들었다.
이미 그녀 주변으로는 무엇도 끼어들 수 없는 권역이 형성되어 있었다.
오로지 베는 것 하나로 이루어진 심상.
"……"
이에 반응하듯 달려드는 가짜.
순식간에 달려들어 공간을 박살 내는 혼원일기의 힘을 담고 있었다.
전면의 공간이 무너지며 두 사람 사이를 비틀었다.
하지만 은소소가 깨우친 검성의 이치는 이 너머에 존재했다.
그녀의 검은 혼원일기의 비틀림을 끊고, 그 사이로 심상을 욱여넣었다.
마치 고무줄이 튕겨 나가듯 혼원일기의 기운이 밀려나며 그녀와 가짜 사이의 공간이 잘렸다.
쩍, 소리와 함께 벌어지는 가짜의 가슴.
피 대신 검은 연기가 허공으로 치솟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흥. 별것도 아닌 게."
비웃음을 머금으며 검을 집어넣으려는 은소소.
"아직 더 있어요!"
하지만 향아의 외침이 그 검을 제지했다.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다가오는 다수의 인형 때문이었다.
형태와 무기는 저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전부 우리 일행이잖아."
끝나지 않는 자신과의 싸움.
일월교의 안배는 생각보다 더 지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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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싸움이 이어졌다.
인형 하나하나는 분명 진짜에 비할 바 없는 실력.
하지만 숫자가 많다면 이건 실력 너머의 문제였다.
공염, 은소소, 향아. 심지어 명한마저 조금씩 지쳐갔다.
결국, 이대로 싸움을 이어갈 수는 없다는 판단하에 일행은 강행돌파를 택했다.
선두를 베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주변은 어둠.
후각, 촉각 등 감각이 마비되어 길을 찾기 어려웠지만, 일단은 멀어지는 것이 답이었다.
향아도 그렇게 뛰었다.
"도련님? 도련님!?"
언제부터일까.
명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걸음, 목소리, 냄새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았음에도 사라졌다.
당황스럽고 무서운 상황이었다.
곁에서 그를 돕지 않는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에 계신 거지?"
주변을 쉼 없이 돌면서 흔적을 찾았다.
여러 갈래로 나뉜 길에 표시를 새기고 바닥과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땅에 엎드려 지면을 울리는 소리를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명한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어째서?
초조함이 무겁게 다가왔다.
"아이야, 왜 여기서 헤매고 있니?"
"……!"
낯선 목소리 낯선 냄새.
갑자기 다가온 기척에 향아가 몸을 낮추고 거리를 벌렸다.
달 없는 밤하늘처럼 어둡던 통로의 한쪽이 등불을 받은 듯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보이는 한 여성.
명암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예복을 차려입은 채 향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 놀라지 마렴. 이곳은 나처럼 갈 길 없는 이들이 부유하는 공간. 탁한 어둠이 불편할 것 같아 네게 어울리는 빛을 켰을 뿐이란다."
"……누구세요?"
"글쎄. 내 이름이 뭐였는지는 아주 오래전에 이미 잊었구나. 그저 이 땅에 매인 채 떠도는 바람을 새는 존재라면 맞을까?"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지만, 적의는 없어 보인다.
향아가 손을 내리고 눈앞의 여성을 다시 한번 천천히 살폈다.
생기가 보이지 않는 창백한 피부에 가녀린 손가락.
유곽의 기생처럼 보이기도 하고, 병든 아가씨처럼 보이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아이야, 너는 이름이 뭐니?"
"……향아. 향아예요."
"향아라. 예쁜 이름이구나. 이 언니는 연(蓮)이라고 한단다. 연 언니라고 부르면 돼."
"연 언니."
"그래, 그래. 듣기 좋구나."
연은 입을 가리며 다소곳하게 웃었다.
"자, 오렴. 널 오랫동안 기다리신 분이 있단다."
"오랫동안 기다리신 분?"
"그래. 네 아버지. 일월의 주인 되시는 분이란다."
하지만 향아는 따라서 웃을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