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187/235)

해와 달의 마을

덜컹덜컹.

마차가 산길을 힘겹게 올라갔다.

공염이 안내한 장소는 꽤 험한 지형에 위치해 있었다.

지역 지도에서도 표기되지 않은 장소였다.

"대체 왜 이런 곳에 기록이 보관되어 있는 거지?"

"당시 교주께서는 혜안을 가지고 계셨소. 기록을 나누어 여러 곳에 여러 방법으로 봉인하셨지. 훗날 무슨 일이 벌어져도 후대가 역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여러 곳에 여러 방법이라."

명한은 무언가 걸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이내, 덜컹거리던 마차는 산길 중턱에서 멈춰섰다.

사람 손길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내리시오."

공염이 선두로 뛰어내려 중턱의 벽 앞으로 걸어갔다.

무너진 돌들이 쌓여서 만든 흔히 있는 돌계단이었다.

그르르릉.

하지만 그가 그 위로 손을 얹자 상황이 달라졌다.

돌들이 좌우로 밀려나며 커다란 입구를 만든 것이다.

진법이 아닌, 기계적인 장치였다.

"염 노사님!"

"염 노사님이 돌아오셨어!"

"노사님이 돌아오셨다! 다들 나와 봐!"

그리고 그 안에서 수십의 사람들이 밀려 나왔다.

나이 지긋한 노인부터 앳된 소년 소녀까지 나이대가 다양했다.

공염의 주변으로 달라붙어서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의 귀환은 환영했다.

"설마, 너희가 거주하는 곳에 기록이 있는 거냐?"

"역사를 찾기 위해서 터를 잡았소."

"이곳을 이렇게 공개하는 건 무모한 짓일 텐데?"

"그만큼의 각오가 없으면 되찾을 수 없다는 걸 아는 거요. 우리가 신녀에 대해서 알게 된 건 이미 좀 된 일.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고 결정한 일이오."

"……뭐가 됐든 이건 우리끼리의 이야기로만 해 두지."

"고맙소."

짧은 목례로 답을 한 뒤 공염이 다시 앞장섰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은 명한과 일행을 달갑지 않게 바라봤다.

하지만 손을 대거나 어떤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저 옆으로 물러나 들어올 수 있게 길을 내주었을 뿐이다.

"가자."

"네."

가볍지 않은 걸음으로 명한도 그 뒤를 쫓았다.

#

굴 안쪽은 마을이었다.

저택을 포위했던 이들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상당수가 이곳에 살고 있었다.

방도 있고, 연공실도 있고, 약초를 재배하는 곳도 있었다.

나름대로 구색은 제대로 갖춘 모습이었다.

"이곳에서 계속 살아온 건가?"

"꽤 됐소. 신교의 추적을 피해서 몸을 감추기에 급급했던 시절에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 것이 이렇게 커진 것이라오."

"그쪽이 구심점인가?"

"당대부터 살아온 건 이제 나밖에 없소."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군."

"……아무리 무거워도 덜어낼 수 없는 일이 있는 거요."

깊이 파인 주름만큼 깊은 고뇌의 목소리였다.

일월교에서 신교로 바뀐 뒤, 흐른 시간은 세대 단위로 세도 부족하지 않다.

그 시간 동안 남은 이들을 추슬러 한곳에 모은 건 그의 역량.

떠안은 짐만큼이나 무거운 걸음이었을 것이다.

"노사. 오셨군요."

"으음."

그렇게 마을 깊은 곳에 당도했을 때.

조금은 복색이 다른 인물과 일행이 맞닥뜨렸다.

붉은색, 화려함이 깃든 예복 차림의 여성이었다.

"뒤에 계신 분이 신녀…… 맞나요?"

"맞다. 우리가 긴 시간 염원하던 바로 그 일월의 혈통이지."

"아. 아아. 천녀가 일월의 후예를 맞이합니다."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와 향아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왜, 왜 이러세요?"

"이 천한 것은 오로지 신녀를 모시기 위해 살아온 몸이랍니다. 이렇게 신녀를 직접 볼 수 있으니 백 번 천 번 죽어도 여한이 없지요."

"저는…… 신녀가 아니에요. 신녀가 되고 싶지도 않아요."

"네? 염 노사. 지금 이게 무슨 말입니까?"

감복하던 여인이 공염을 돌아봤다.

"신녀께서는 진실을 찾는 것까지 우리를 돕겠다 약속하셨다. 그 뒤는 진실의 힘이 신녀를 우리에게 이끌겠지."

"하지만 노사……"

"믿어라. 일월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거다."

설득이라고 하기 모호한 말을 뒤로.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천녀, 종소라고 하옵니다."

"……유수검, 종소?"

그때, 뒤에 서 있던 은소소가 그 이름을 눈치챘다.

처음 종소를 만났을 때부터 느끼던 기묘한 기시감의 정체였다.

"오랜만이군요, 아가씨."

"하. 은검대의 대주였던 네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냐?"

"은검대는 그저 껍데기. 제 본질은 일월의 종복입니다. 이제야 본래의 것을 찾을 때가 왔으니, 제 역할을 하고 있을 따름이죠."

"종소!"

성난 은소소의 기세가 주변을 쩌렁쩌렁 울렸다.

여차하면 벨 듯, 기세가 날카로웠다.

"소소."

하지만 명한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자, 이 기세는 눈 녹듯 사라졌다.

"지금은 참아. 우린 신교의 일원으로 온 것이 아니야."

"쯧. 진실이 뭐든 저것들이 배신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오늘 일이 끝나고 밖에서 본다면 머리를 베어버리겠어."

"……아가씨 눈에는 띄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네요."

종소는 큰 말 없이 묵묵하게 수긍했다.

한때 은검대라는 무력대의 대주직을 역임했던 그녀이나, 은소소의 힘은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녀만이 아닌 눈앞의 명한도.

‘이건 큰 모험이구나.’

끝이 안 보이는 역량.

"안으로 모시지요."

외줄 타기였다.

#

비고로 가기까지는 준비가 필요했다.

일행은 마을에 짐을 풀고 각자의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으로 합의했다.

불편한 동석이었지만,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동안은 마을을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좋소."

별다른 제약은 없었다.

아니, 되레 마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기색이었다.

현재의 형편으로 동정심을 끌어내면 향아를 설득하기 더 편할 거라는 속셈.

훤히 보였지만, 명한은 굳이 그걸 막지 않았다.

"직접 볼 테냐?"

"……네."

어찌 됐든 이들은 향아와는 같은 고향 출신이다.

일월의 후예라는 면에서는 남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떤 이들이고 어떤 삶을 사는지 볼 권리가 있었다.

명한은 향아와 함께 단둘이 밖으로 나왔다.

"뭔가 평범하네요."

천천히 거니는 마을의 풍경은 그야말로 평범했다.

문 어귀에 걸어놓은 빨래나, 솔솔 풍겨오는 밥 짓는 냄새.

마을 구석구석에 쪼그려 앉아 손장난하는 아이들까지.

평범한 시골의 마을 풍경이었다.

신교를 뒤엎기 위한 비밀 결사 같은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어? 신녀님이다, 신녀님이야."

"어디? 어디?"

그렇게 거닐던 중 마을의 아이들이 향아를 발견했다.

나이 좀 찬 아이들은 대충 사정을 알기에 접근하지 않지만, 어린애들은 아니었다.

어른들의 수군거림으로 향아가 ‘일월신녀’임을 알기에 우르르 몰려왔다.

아이 시선에 신녀라고 하면 얼마나 대단해 보이겠는가.

금세 향아를 둘러쌌다.

"언니, 언니. 언니가 신녀님이에요?"

"와아. 얼굴 되게 곱다! 역시 신녀님!"

"신녀님이면 우리 엄마 병도 낫게 해 주실 수 있어요?"

"우리 집 와서 밥 먹을래요? 엄마가 옥수수 쪄 놨데요!"

와글와글 떠드는 아이들에 향아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자자, 다들 조금만 조용히 하자. 신녀님이 곤란해하시잖아."

중재역을 맡은 건 명한이었다.

무릎을 살짝 굽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아저씨는 누구예요?"

"신녀님하고 친해요?"

"아는 사이에요?"

"……아, 아저씨라니. 형이라고 불러야지. 여기 신녀님의 호위무사 같은 거야."

"와아! 호위무사!"

아이들은 멋진 단에서 금세 넘어갔다.

명한이 손짓으로 바닥의 돌 따위를 멋들어지게 넘기자 두 손 들고 환호하기까지 했다.

시끄러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향아로 쏠린 관심을 떼어내는 것에는 성공했다.

"너희들 말이야. 신녀님 이야기 많이 들었어?"

"네! 많이 많이 들었어요! 신녀님이 오시면…… 뭐지?"

"바보야. 신녀님이 오시면 하늘이 열리고 오색의 뭐더라?"

"히히히. 오색의 복. 복이 와서 우리 모두 무병장수한다고 했어."

"쳇! 혼자서 잘난 척이야."

기억하는 정도는 달라도 모두 비슷한 걸 들은 건 확실하다.

민담에 가까운 성격이나, 그걸 잊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저기, 저기."

"응?"

그때, 아이들 중 하나가 향아의 소매를 당겼다.

와글와글 떠들던 아이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향아가 살짝 당황하다 명한과 비슷하게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무슨 일이니?"

"언니가 신녀님 맞아요?"

"그건…… 아니야. 이 언니는 신녀님이 아니란다."

"그래요? 그렇구나……"

금세 시무룩해지는 아이에 향아가 당황했다.

이런 반응을 다루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무,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

"엄마가 아파요. 신녀님은 기적의 힘을 다뤄서 온갖 병을 다 치유해 줄 수 있다고 들었거든요. 언니가 신녀님이면 엄마를 고쳐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

아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향아는 답을 하기에 앞서서 명한을 한 번 바라봤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허락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

향아가 아이에게로 손을 뻗고 침착하게 말했다.

"언니를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안내해 줄래?"

"언니를요?"

"응. 언니가 신녀는 아니지만, 그보다 훨씬 대단하신 분을 알고 있거든."

"헤에. 신녀님보다 더 대단한 분이요?"

다시 명한을 보는 향아.

그 눈에는 더없이 진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이 눈빛을 어떻게 외면할까.

명한이 가벼운 손짓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끄덕였다.

"응."

답은 짧고 명확했다.

#

낡고 허름한 방에 한 여인이 누워 있다.

창백한 안색에 몸은 깡말라서 뼈가 다 보일 지경이었다.

게다가 코끝을 자극하는 지독한 냄새.

살이 부패하여 고름이 잡힌 냄새였다.

"도련님, 이거……"

"응. 급히 조치가 필요하겠어."

명한은 망설임 없이 여인에게 다가가 천을 걷어냈다.

몇 번 갈다 포기한 듯 한 썩은 천이 환부를 감싸고 있었다.

살점이 뭉개져서 덩어리째 잡힌 고름이 천 밖으로 흘러나오는 상태였다.

"누, 누구세요?"

"의원입니다. 상태가 위중하니 가만히 계세요."

"의, 의원?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서 왔습니까? 마을 사람이 아니지요? 누굽니까?"

여인은 명한의 손을 밀어내며 도망치려 했다.

"공염…… 그러니까 무염의 초대로 온 사람입니다. 그쪽 아이가 상태를 걱정해서 우리를 부른 거니 가만히 계세요."

"염 노사께서? 하지만 당신들은…… 일월의 자식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지금 중요합니까?"

"물러나세요! 일월의 손길이 닿지 않은 부패한 자에게 치료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이대로 두면 다리를 잘라내야 합니다."

"설사 다리를 잘라내더라도 일월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에게 내 몸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매우 강경한 태도였다.

신념이라면 신념이고 광기라면 광기였다.

명한이 곤혹스러움에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 향아가 나섰다.

"전…… 일월신녀예요. 그럼 저한테 치료받는 건 괜찮죠?"

"일월신녀? 신녀! 오오. 그럼 노사께서 밖에서 모셔온다던 신녀께서 바로 당신이십니까?"

"네, 네. 그러니까 일단 치료부터 받으세요."

"암요. 암요. 교의 신녀께서 성스러운 손길을 내미는데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여인의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교인과 그렇지 않은 이에 대한 반응이 천지 차이였다.

‘그래서 우리에게 마을을 공개한 건가.’

공염의 속내가 훤히 보이는 순간이었다.

"먼저 환부를 정리하자."

하지만 그렇다고 치료를 멈출 수는 없었다.

환부를 처리하고 약을 바르고 기운을 불어넣고……

마을에 ‘신녀’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건 빛처럼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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