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235)

일월의 뿌리

천백도 공염이라면 나이가 백은 훌쩍 넘었다.

지긋한 인상이나 그 정도 나이로는 안 보이는 것이 사실.

명한이 당황을 잠재우며 하나씩 묻기 시작했다.

"그쪽이 공염이라면 어떻게 아직껏 살아있는 거지?"

"그리 대단한 비밀이 있는 건 아니오. 신교의 양생공 중 하나인 연기공을 익혀서 남들보다 수명이 긴 것뿐."

"양생공이라. 그거로 초대 천마와 맞선 건 아닐 텐데?"

"본디 익힌 무공은 월아(月牙)와 일수(日手)요. 일전에서 패하며 단전이 망가지며 전부 잃었을 뿐이라오. 다행히 양생공은 일반 무공과 궤를 달리하기에 지금껏 연명이 가능했을 뿐이지."

"일전에서 무공을 잃었다. 그럼 천마를 만나고도 살았다는 건가?"

이 질문에 공염은 차로 목을 씻었다.

꽤 많은 괴로움이 섞인 표정.

잠시의 침묵 뒤로 입을 열었다.

"그가 내 몸에 새긴 천마신공의 흔적은 경고였소. 당시의 그는 신교의 명운이 바람 앞의 촛불임을 꿰뚫고 있었지. 모두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소. 하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오. 우리를 풀어주며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려고 했소."

"증명이라.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초대 천마의 무공은 증명의 단계를 아득하게 벗어났어. 그가 당신을 살려 주었다면 이유는 단순했을 거야."

"무슨 의미요?"

"약한 자를 밟지 않는 것."

공염의 미간이 크게 씰룩거렸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무인의 본성이라는 것은 감출 수 없다.

적어도 그가 과거에 힘을 추구했던 인물임은 분명했다.

"발끈하지 마. 천마신교의 기치는 예나 지금이나 마도. 힘을 숭상하고 강자와의 겨룸을 목적으로 두고 있어. 우린 힘으로 가치를 증명하나 약자를 짓밟지는 않아. 초대라면 일월교를 전복하는 순간부터 이미 목적을 달성한 거였겠지. 굳이 무공을 잃은 그쪽을 죽일 이유까지는 없었을 거야."

"궤변이오. 그리 떳떳했다면 우리 일월신교의 기록을 지웠을 리가 없지."

"그래. 그 부분은 나도 의문이야. 그럼, 어디 나를 설득해 보라고. 왜 천마신교는 일월교의 기록을 전부 지운 거지?"

턱을 괸 채 명한이 공염을 직시했다.

공백의 기록이 가진 의미야말로 이번 대화의 핵심이었다.

공염도 그 무거움을 알았을까, 다시 한번 차를 홀짝였다.

다시 입이 열린 건 찻잔이 탁자에 닿는 순간부터였다.

"당시 일월신교의 교주는 호백이라는 분이오. 당대의 모든 무공을 섭렵하고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인하신 분이었소. 중원의 강자들 역시 교주의 손아래에서 모두 무릎을 꿇었었지. 세외를 멸시하는 풍토만 아니었어도 이미 천하제일인 자리에 교주의 이름이 올라갔을 것이오."

"그런데?"

"그런 분이 당시 여물지도 않은 천마에게 당했을 것 같소?"

"정상적인 싸움이 아니었다는 거냐?"

"맞소. 당신들이 말한 마도라는 가치와는 전혀 상반된 일이었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짙은 확신.

공염 스스로는 자신의 말에 한 점 의혹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 초대가 비겁한 짓을 했다는 건가?’

하지만 명한은 동의하기 어려웠다.

한 번뿐이었지만, 초대의 느낌은 그런 비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이야기를 뒷받침할 증거는 있나?"

"당시 교주께서는 연공을 위해 비밀 연공실에서 수련 중이었다고 알려져 있소. 이를 아는 건 극소수. 그중 하나가 바로 나요."

"다른 사람은?"

"배신자 강백. 교주를 측근에서 모시던 호법 중 하나요. 그는 오래전부터 당신네들의 천마와 내통하고 있었지."

"내가 알기로 초대는 일월교의 일반 무인으로 알고 있는데."

"흥. 일반 무인이 그렇게 강할 수 있겠소? 당시 교주께서 비밀리에 양성하던 젊은 고수들 중 하나가 바로 천마였다오."

"비밀 고수가 호법과 동조해서 연공 중인 교수를 기습했다 이건가?"

이 질문에 공염은 답이 아닌 물건으로 대신했다.

오래된 양피지의 일부였다.

"당시 연공실 출입을 기록한 양피지의 일부요. 대부분은 교주 혼자였으나, 일부에서 천마의 이름이 섞여 있소. 교주께서 상해를 입은 바로 그날도."

"……"

날짜별로 적힌 출입 지에는 천마의 이름이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물론, 이 기록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공염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도.

"이를 뒷받침해 줄 기록이 교주의 비밀 서고에 있소. 그걸 위해 신녀의 도움이 필요하오."

예상대로……

열쇠였다.

#

선택지는 여럿이었다.

공염의 주장이 무엇이든 그걸 증명할 기회는 그가 아닌 사람 이에게 있었다.

과거의 기록 따위는 무시하고 갈 길을 그만 그만이었다.

하지만 쉬이 그러지 못하는 건 역시 과거는 과거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 때문.

명한이 신교를 떠나 스스로 신명회를 자처하나, 관계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를 신교의 부속으로 바라본다.

진실을 덮는 듯한 선택은 그 사실을 더욱 부각시킬 수밖에 없다.

"일월교의 제안을 받아들일 건가요?"

"네가 괜찮다면."

명한은 향아와 독대했다.

"굳이 그럴 필요 있나요? 괜히 다른 이야기가 발견되고 그러면 도련님만 곤란해지잖아요.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내 곤란함을 걱정하지 마. 어떤 이야기나 나온다 해도 나는 나야. 내가 생각하는 건 너밖에 없다, 향아야."

"……기뻐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하지만 전 어릴 때부터 도련님만 모셔왔어요. 이제와서 일월교니 뭐니 해도 아무런 생각이 안 나는 걸요. 도련님께 피해가 생길까 봐 그게 두려워요."

"너와 내 대화는 언제나 쳇바퀴구나."

명한이 향아를 가볍게 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로를 생각하여 선택이 어려운 건 어쩌면 다정한 모순일지도 모른다.

목으로 넘기는 마른 침에 생각을 정리하고 쓰다듬던 손을 떼었다.

살짝 올려다보는 향아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답을 했다.

"가자. 과거를 알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법이야. 신교에 잘못이 있었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피를 잇는 내 역할이겠지. 난 두렵지 않아."

"도련님 생각이 그렇다면 따를게요."

"나보다는 네 바람을 말해주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후일로 미뤄둘게."

"제 바람은 언제나 하나인걸요."

"그래, 그래."

이 어여쁜 아이를 위해서라도 어중간한 건 안 된다.

명한이 속을 단단하게 두드렸다.

#

의견은 수렴해서 명한이 전달했다.

다만, 전체 내용에 대한 수긍은 아니었다.

"으음. 일월신녀에 대한 건 받아들일 수 없으나, 기록 열람은 돕겠다. 이것이오?"

"당사자인 향아가 거부하고 있어. 그녀가 싫다면 누가 와도 보내지 않는다. 다만, 기록에 대한 건 나도 궁금하니 널 돕겠다는 거야."

"그 기록이 당신네에게 불리할 수 있음에도 말이오?"

"내가 원하는 건 진실이야. 유리함이 아니라."

"……좋소. 일단은 그것으로 만족하리다."

공염도 한 걸음 물러났다.

억지로 향아를 뺏을 노릇도 아니고, 기록을 확인한 뒤는 자신이 있었다.

그가 믿는 신교의 악행이라면 마음을 돌리기에 충분했다.

"목적지를 말해라. 어디로 가면 되지?"

"그걸 미리 말하면 당신들이 덮을 우려가 있소. 기록을 확보하기까지 우리가 동행할 예정이오."

"어딘지도 모를 곳까지 따라오라 이건가?"

"우리도 당신들이라는 위험을 안고 가는 거요."

"피차일반이라 이건가. 좋아. 하지만 명심해 둬. 쓸데없는 수작은 부리지 않는 편이 좋아. 난 뒤끝이 매우 더러운 성격이라고."

"명심하겠소."

그렇게 방법과 일행이 결정됐다.

소명회 저택을 유지하고 흑점의 정보 수급을 담당할 인력을 제외.

만약의 경우까지 상정해서 인원을 분배했다.

"나도 남는 거냐?"

"사부님께서 잠드셨으니까. 네가 곁에 있어 줘야지."

"끄응."

미요 건으로 잠든 은휘는 청청이 맡았다.

영적인 간섭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걸맞은 힘과 지식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일행 중에서는 은영영과 청청 정도가 전부였다.

구미호의 힘까지 거둔 청청이 남는 것이 합당했다.

"너흰 이 편지를 강유에게 전달해. 절대로 중간에 뺏기면 안 된다."

"네, 태사님."

나머지 일월이나 이월 등은 연락책으로 남았다.

공염 무리와는 별개로 신교 내부의 첩자는 색출할 필요가 있었다.

공조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정말로 이 선택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떠나기 전 군율휘의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뒤를 정리해야 옳습니다. 신교라는 이름을 떼고 생각할 수 없다면, 덮고 가는 건 선택이 아니겠죠. 이를 지켜보는 눈이 많고 여러 속셈이 맞물려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만…… 언제나 선택은 신념을 따라가는 법이죠."

"신념이라. 그건 신교의 신념인가?"

"아뇨. 제 신념입니다."

상황이 어지럽고 위급할수록 더욱 단순명료한 것이 필요하다.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가짐.

"그래. 너는 이미 종사(宗師)구나."

무리의 수장이라면 응당 품어야 할 자세였다.

#

야심한 밤.

야행의 차림의 강유가 담벼락을 넘나다녔다.

밤이슬을 몸에 적시며 두 발로 뛰어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건물과 건물. 벽과 벽을 쉼 없이 넘어 건물 앞에 당도했다.

겉치장만 해도 대단한 장소였다.

"……이염궁."

신교의 사람이면 쉬이 걸음 하지 않는 장소.

다른 소궁이나 내각 심처와는 다른 의미로 위험한 곳이었다.

이염궁은 죽은 천마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서 마련한 거처.

천마에게 몇 없는 역린과 같은 장소였다.

"어째서냐. 어째서 이곳으로 흔적이 이어져 있지?"

강유는 명한의 부탁대로 내각의 움직임을 쫓았고 그 흔적을 찾았다.

암암리에 활동하는 국소적인 조직이었다.

이를 섣불리 잡아 큰 고기를 놓치기보다는 인내를 택했다.

그 결과가 나타난 것이 이른 저녁.

흔적을 쫓아 이곳에 당도한 것이 조금 전이었다.

"……조만간 움직임이 있을 겁니다."

"!!"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강유가 흠칫 놀라며 몸을 날려 나무 위로 숨었다.

기척이 장막 너머에서 불쑥 나타나서 건물 입구로 이어져 있었다.

이내, 문이 열리고 1남 1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염 노사께서 비고를 찾았다고 하니, 조만간 성과가 나올 겁니다."

"그렇습니까. 염 노사께서 고생하고 계시군요."

"이제 머지않았습니다. 때가 되어 진실이 드러나면 잠들어 있던 짐승들도 저마다의 이빨을 드러내겠죠. 천마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전부와 맞설 수는 없습니다."

"하아. 드디어 그분의 바람을 이룰 수 있게 됐네요."

두 사람은 한 걸음씩 걸어 나왔다.

달빛이 얼굴 위로 드리워지고 그 면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무 위의 강유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두 사람 모두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왕 모모와 노총관이라고?’

한 명은 일선에서 물러난 내각의 전대 총관.

그리고 남은 하나는 천마의 모친을 바로 곁에서 모시던 시종이다.

지금은 천마궁의 모든 시종을 담당하는 시종장 위치에 있는 인물.

"아가씨를 도구로 이용하려던 죄. 쓰고 버린 죄. 그 책임마저 잊은 죄. 모두 받을 때가 왔습니다. 죄악으로 둘러싸인 신교의 마지막을 위해서……"

"모든 것은 일월의 뜻대로."

생각보다 깊은 곳까지 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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