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5화 (185/235)

옛 그림자

하루가 다 지나기도 전에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명한은 잠도 털어내지 못하고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간신히 고개를 내민 햇빛 아래로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이 시간부터 뭐 하는 거래?"

"신녀를 넘겨받겠다고 저러고 있어."

비슷한 표정의 은소소가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잠이 부족하면 힘든 건 무인도 마찬가지였다.

"귀찮은 인간들 같으니. 마음 같아서야 대번에 엉덩이를 걷어차 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건 향아 때문에라도 껄끄럽지."

"쯧. 저들이 정말로 일월교의 후인이라면 어찌 됐든 향아와는 관계가 있는 거니까."

"그럼 향아가 정말로 일월교와 관계가 있는 거야?"

"관계는 있지. 직계인지는 나도 몰랐고."

명한이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무력으로 상대를 쫓아내기에는 걸리는 것이 많고, 허락하기에도 상황이 마뜩잖았다.

‘향아가 가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만……’

그녀의 생각은 전날 확실하게 확인했다.

"황제진경을 찾으러 가기도 바쁜데,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히네."

"사람을 나눌까? 일월신교의 잔당이라고 해도 군 장군이나 구검선녀 정도면 충분할 텐데."

"아니.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혀끝에서 느껴지는 껄끄러움이다.

이곳을 그냥 떠나면 안 된다는 예감.

무아의 깨달음 이후로 미묘하게나마 천기를 느끼고 있었다.

"뭔가 더 있을 거 같단 말이지."

"흐응. 일월교의 후인을 세우는 일에? 딱히 우리에게 곤란한 일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향아만 거부하면 끝 아닌가?"

"일단은 그렇긴 한데……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면 그것대로 골치 아프긴 해."

"어떤 점이?"

"정통성."

명한이 몸을 젖히고 하늘을 바라보며 누웠다.

계속해서 생각하던 부분.

왜 지금 이런 방식으로 접근을 하는지에 대한 추론이었다.

얼기설기 엮인 천기의 그물 아래에서 그저 우연히 시기가 맞았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신교는 일월교를 전복하고 기틀을 세웠어.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많지 않지."

"신교가 기록을 전부 말소했기 때문에."

"그래. 그 부분이야. 왕조에서 다른 왕조로 무력 찬탈이 일어나는 건 흔한 일이야. 근데 왜 신교는 기록을 말소해야만 했을까?"

"……어?"

"초대 천마가 일월교의 거부하고 세력을 모았다는 건 기정사실. 하지만 자세한 내막은 아무도 알지 못해."

"무언가 숨겨야 할 내용이 있었다?"

최초 일월교를 세운 건 황제를 돕던 천기자다.

불로불사를 완성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실험을 자행하던 일종의 연구동.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해와 달을 신봉하는 종교적인 집단으로 강한 세력과 결속을 지니고 있었다.

이걸 단번에 휙, 하고 엎는 건 쉽지 않다.

"만약 그 숨겨진 기록에 신교의 정통성을 흔들만한 내용이 있다면 현 판도 자체를 엎어버릴 수도 있어."

"그래 봐야 옛날 일인데 그렇게까지 될까?"

"조직의 기반은 무엇보다 중요해. 특히 신교가 추구하는 마도는 강함을 숭상하는 패도. 만약 초대 천마가 일월교를 찬탈하는 과정에 패도가 아닌 비열함이 섞였다면?"

"……독이나 암살 같은 거?"

"굳이 예를 들자면 그렇지. 십만 신교의 교도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일까?"

"으음. 쉽지 않네."

신교의 핵심은 마도에 있다.

힘으로 모든 걸 쟁취한다는 단순한 논리가 그들의 믿음이며 신앙이다.

이 근간이 흔들리면 아무리 신교의 천마가 강해도 조직을 유지하기 어렵다.

"잠깐만. 그럼 향아를 굳이 데려가려는 이유가……"

"응. 추측이지만, 그녀에게 어떤 열쇠가 있을 거라고 봐. 일월교의 숨겨둔 기록이나 보물 같은. 반드시 직계 혈통만이 확인할 수 있는 어떤 물건이 있을 거야."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하지만 명한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추측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다.

예감을 뛰어넘는 예언에 가까운 수준.

그렇기에 황제진경이라는 큰 목표를 두고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숨겨둔 자를 제외하고 천하는 삼분되어 있어. 이 균형이 유지되려면 신교는 무너지면 안 돼."

무너지고 난 뒤에 벌어질 상황이라면 뻔하다.

걷잡을 수 없는 번지는 혼란.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일단…… 아침밥부터 먹자."

금강산도 식후경.

명한이 훌쩍 뛰어 일어났다.

#

저택 주변의 소란은 갈수록 심해졌다.

모이는 사람의 숫자도, 이에 관심 가지는 인파도 늘어났다.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훌륭하게 달성한 셈이었다.

"계속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참다 참다 은소소가 강경하게 나섰다.

"조금씩 소문이 퍼지고 있어. 우리가 일월교의 후인을 가두고 있다고."

"헛소리는 그냥 무시하면 돼."

"무시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야. 일월교가 신교의 전신이며, 그들의 몰락에 더러운 비밀이 있다는 소문도 퍼지는 중이야. 즉, 우리가 후인을 내어놓지 않는 건 신교의 입김이 닿은 행동이라는 거지."

"그런 소문이 아무렇게나 퍼질 수는 없어. 누군가 일부러 퍼뜨리는 건가?"

"사람을 풀어서 확인 중입니다, 태사님."

마지막 말은 일월의 것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흑점의 인력을 동원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하지만 들인 인력과 시간에 비해서 소득은 적었다.

잔당의 행동치고는 수준이 높았다.

"흐음.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네."

"시간? 뭔가 기다리는 거라도 있어?"

"신교 쪽에 보내 놓은…… 아. 지금 왔군."

명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일행의 시야 밖, 담장에 걸쳐있던 나뭇가지에서 새 한 마리가 허공을 격해서 날아왔다.

절정의 경지에 이른 허공섭물이었다.

퍼덕거리는 새를 손짓으로 제압한 뒤 발목에 묶인 서신을 끌러냈다.

"뭔데? 신교에서 온 거야?"

"강유를 통해서 그쪽 움직임을 확인하려고 서신을 보냈었어. 일월교의 움직임을 신교에서 방치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거든."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데?"

"좀 기다려 봐. 읽고 있잖아."

명한의 시선이 서신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짧은 문장 몇 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맥락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역시 그랬던 건가."

"뭔데? 뭐라고 적혔어?"

"내 서신이 도착하고 며칠 뒤에 안주인 중 하나가 죽었다. 삼십이궁의 휘홍화라고. 알고 있어?"

"이름은. 다른 궁과 내외도 거의 없는 거로 아는데. 그녀가 죽었다고?"

"시체가 발견된 곳은 내전의 호수였지만, 살인은 다른 곳이라 추측하더군."

"어디?"

"내각의 각원들이 머무르는 곳."

은소소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가라앉았다.

내각은 천마궁의 살림살이 전반을 책임지는 장소.

그 안쪽으로 궁의 안주인이 직접 왕래할 이유는 거의 없다.

"그 여자가 정보를 빼돌린 거야?"

"아마도. 강유는 내각의 누군가와 모의해서 정보를 빼갔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어. 실제로 내각 심처의 몇몇 기밀 정보가 소실된 걸 확인했다고 해."

"그럼 뭐야? 내각이 일월교와 내통한다는 건가?"

"전부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다만……"

"다만?"

"강유가 남긴 마지막 말이 걸려."

명한은 아예 서신을 직접 은소소에게 보여주었다.

"……휘홍화를 죽인 공격은 고수의 것이 아니었다?"

"응. 기밀문서를 빼돌리는 협력자라면 상당한 지위를 가졌음이 분명해. 하지만 손속에서는 고수의 흔적이 없었다고 해."

"그렇게 꾸민 것 아닐까?"

"아니. 강유가 직접 확인했으니 정말로 고수가 아닐 가능성이 커. 즉, 우리가 가정하는 협력자의 형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거지."

명한이 손짓으로 서신을 태워버렸다.

일월교의 배후에 있는 거대 배후의 이미지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

‘어쩌면 정말로……’

우연이 겹쳤을 가능성도 있다.

숨어 있던 일월교 생존자들의 집결.

"향아를 불러와."

어느 쪽이든 담판을 지어야 할 때였다.

#

명한은 일월교 사람들을 저택 안으로 초대했다.

전체 중 들어온 건 전부 셋.

처음에 대치했던 승려를 포함, 2남 1녀였다.

"드디어 문을 열고 대화에 응해 주시는구려."

"그쪽이 어지간히 시끄럽게 굴어야지. 동네 개라면 패서라도 쫓아내겠지만,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어서."

"말씀이 심합니다!"

"그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아직 충분하네."

동행한 남자가 화를 내며 따지려 들었지만, 승려는 침착했다.

그 모습에 명한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차라리 발끈하고 덤벼주면 일이 쉬웠을 테니까.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간단하게 통성명은 하지. 우리 쪽 이름은 다 아는 거 같고…… 그쪽 셋은 이름이 어떻게 되지?"

"하찮은 종복에 이름이 무슨 소용이겠소. 편하게 무염, 무해, 무연이라 부르면 되오."

"더럽게 헷갈리는 이름이네."

승려가 무염. 남자가 무해, 여자가 무연이었다.

얼굴과 이름을 한 번씩 맞춰본 뒤, 명한이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넓은 정원에 음식이 한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그 화려함에 셋의 눈이 가볍게 흔들렸다.

"들어보니 밖에서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떠든다면서. 사람이 몸 망치면서 일하면 쓰나. 이야기는 이야기고 배나 좀 채우자고."

"……우리는 신녀의 거취를 논하기 위해서 왔소."

"누가 모른다고 했나? 이 일이 손바닥 뒤집듯이 정해질 일은 아니잖아. 뒤에는 제자인가 본데, 계속 굶길 생각은 아니지? 일월교가 그렇게 박한 곳이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일월신교요."

"그래. 일월신교."

음식으로 손짓하는 명한에 무염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남은 두 제자도 냉큼 양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저택 밖에서 농성하며 제대로 끼니를 챙기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들자고. 독 같은 건 넣지 않았으니까 안심하고."

"……"

"사부님?"

"먹어라. 독을 써서 우리를 해하려 했다면, 다른 수도 여럿이었겠지."

허락이 떨어지자 무해와 무연은 빠른 속도로 음식을 먹어치웠다.

흑점이 장인을 한 명 한 명 공수해서 준비한 특상급의 음식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손을 놓지 못했다.

"그쪽은 안 먹는 건가?"

"본 승은 괜찮소."

"흐음. 그러고 보니 그쪽은 복장이나 태도 모두가 승려인데…… 일월교에 원래 그런 규정이 있었나?"

"그런 건 아니오. 본 승은 교의 성신승(成神僧)이라는 직책을 맡은 터라, 이런 모습을 취하고 있을 뿐이오."

"성신승이라. 일월교에 아직도 체계가 남아 있다는 건가."

"해와 달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법이오. 하늘의 악마가 천지를 뒤엎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 오랜 핍박에서도 우리는 명맥을 이어왔소."

"그런가. 하긴 그렇겠군. 최근에도 그네들의 후손이라는 자들을 만났으니까."

"최근에? 어디에서 말이오?"

"망야산 인근. 터를 잡고 몸을 숨긴 채 살더군. 하지만 그 모습이 자네 말대로 명맥을 이었다고 하기에는 좀……"

완전히 박살 나서 역사마저 지워진 이들이다.

도망쳐서 몸을 숨겼다면 망야산, 그러니까 우도촌의 사람들이 사실에 가깝다.

명맥을 이을 정도로 세력을 갖춘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의심하는 거요? 우리가 정말로 일월신교의 맥을 잇는지를?"

"안 그럴 수 있겠어? 갑자기 맥이 끊긴 신교의 전신이라고 우기면 우리 입장에서는 웃음만 나온다고."

"……좋소. 원하니 보여주는 수밖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무염.

그는 입고 있던 가사를 풀어헤치며 자신의 상체를 드러냈다.

탄탄하게 단련된 근육질의 육체에는 지울 수 없는 흉터가 셀 수도 없이 많이 박혀 있었다.

대부분은 두서없는 칼질의 흔적이었지만, 일부는 아니었다.

"……천마신공?"

"그렇소. 내 이름은 무염. 과거에는 공염이라 불리던 사람이외다."

"공염? 공염…… 천백도 공염!?"

깜짝 놀란 명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천백도 공염은 한 줄 기록으로 이름만 남은 존재.

일월교에서 신교로 넘어갈 당시 마지막을 장식한 인물이다.

"일월교의 마지막 호법이 바로 본인이오."

살아있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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