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184/235)

은밀한 수

향아가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반가움 반과 걱정 반이 섞인 얼굴이었다.

명한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물쩍거리지 말고 와라."

"죄…… 죄송해요, 도련님."

대뜸 사과부터 하는 향아의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성정을 알기에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도 눈에 훤했다.

"저것들은 언제부터 찾아왔던 거냐?"

"열흘이 조금 넘었어요. 처음에는 뜨내기인가 싶어서 쫓아냈는데, 하나둘 사람이 늘더니 보다시피……"

"그래. 숫자가 저 정도 되면 다루기가 쉽지 않지. 네가 고생이 많다."

"화는…… 안 내세요?"

물기 어린 눈동자에 명한이 다시 한번 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네가 저들을 불렀냐?"

"아, 아뇨……"

"그럼, 내가 없는 동안에 적들하고 내통이라도 했어?"

"그런 적 없어요!"

"근데, 왜 사과를 하고 그래. 넌 잘못한 것이 없어."

"……헤. 헤헤."

그제야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웃었다.

속앓이가 꽤 많았던 터라, 털어내는 웃음은 그만큼 밝았다.

명한이 눈가로 번진 얼룩을 손끝으로 닦아 주며 부은 볼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향아는 손을 피하지 않았다.

"크흠. 큼. 오자마자 아주 분내가 진동하네."

"아, 소소. 구검신녀와 군 장군 사이에서 아주 고생한다며. 이야기는 들었다."

"끄응. 네가 없으니 날 가지고 들들 볶잖아."

"소득이 없는 건 아니잖아?"

"뭐…… 강자와의 싸움은 언제나 좋은 발판이지."

입술을 비죽이며 은소소가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 긴 외유는 아니었지만, 떨어져 본 이력이 없다.

‘뭘 봐?’ 툴툴대는 모습에서 반가움이 뚝뚝 떨어졌다.

"다녀왔어. 그동안 집을 지키느라 수고했다."

"헷…… 헛! 크흠.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널 지키는 검이고자 했으니 거처를 보호하는 것도 내 역할이지."

"그럼 선물은 굳이 안 줘도 되겠네?"

"선물? 어허. 일과 선물은 다른 이야기지. 뭔데? 내놔 봐."

쌍심지 켜고 손짓하는 은소소.

안 주면 검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명한이 짧게 웃으며 챙겨온 선물을 꺼내서 각각 건넸다.

은소소는 검에 다는 수술이었고 향아는 비단신이었다.

"예, 예쁘다. 이걸 제가 받아도 되는 건가요?"

"평소에 신고 다녀. 어울릴 거 같아서 산 거니까. 소소, 너는 어때? 마음에 들어?"

"어? 응. 마음에 들어. 검에 다는 거지?"

"실전에서 사용하기는 힘들겠지만, 장식으로 나쁘지는 않을 거야. 싫은 건 아니지?"

"싫긴! 딱 마음에 들어. 크흠. 나, 난 밖에 일이 있어서 나가볼게. 두 사람 일 봐!"

은소소는 화내듯 답을 하고는 부리나케 도망쳤다.

감출 수 없이 붉어진 목덜미가 싫어하는 반응은 결코 아니었다.

‘쑥스러워하기는.’ 한마디 덧댄 명한에 걸음만 더 빨라졌다.

‘짓궂어요.’ 향아가 가볍게 타박했지만, 그녀도 입은 웃고 있었다.

"자, 그럼 선물도 다 줬고 이제 상황을 좀 정리해 보자."

이젠 향아도 눈물보다는 이성으로 응할 수 있어 보인다.

향아가 선물 받은 비단신을 품에 꼭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말은 정해진 논의였다.

#

여러 가지 정황을 따져봐도 향아가 일월교의 적통 후예인 것은 사실이다.

마냥 사실을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중요한 건 향아의 의지였다.

"어떻게 하고 싶어?"

"네?"

"일월교의 후인으로서 그 자격을 되찾고 싶어?"

"그건……"

향아가 머뭇거렸다.

그녀는 한 번도 명한의 몸종으로서의 현실을 부정한 적이 없다.

다른 누군가는 비천한 신분이라 말하겠지만, 그녀는 그것이 좋았다.

하지만 단 하나.

"부모님에 대한 건 궁금해요."

"그래. 확실히 그 그림은 너와 많이 닮았더라."

"정말로 부모님이 그곳에 살았고, 흔적을 찾을 수 있다면…… 알고 싶어요. 두 분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런가. 하지만 향아야. 네 말의 뜻은 제대로 알고 있는 거겠지?"

"뜻이요?"

"그 승려의 말이 사실이라면 네 부모는 정마대전에 휘말려서 죽었어. 어쩌면 신교가 네 원수일 수도 있다는 거야. 그 핏줄인 나 역시."

"그,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정마대전의 본질을 생각해 보자면 가능성이 높다.

직접적인 원수가 아니더라도 주인과 몸종의 관계가 깨어질 수 있다.

신교가 부모를 죽였다면 그 아래에서 몸종 일을 할 수 있을까.

"안다는 건 그런 거다. 나는 널 가족으로 여기니,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용인해줄 마음이 있다. 다만, 그 결과에 대한 건 나도 책임지지 못할 수가 있어."

"제가 도련님을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건가요?"

"신교를 탓하고 지난 시간을 원망하면…… 사람의 마음은 그만큼 약한 거지."

"아니에요! 절대 안 그래요!"

향아가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도련님의 어머니께서 목숨을 구해주신 이후로…… 계속, 계속 도련님 곁을 지킨걸요. 힘들 때도 괴로울 때도 함께했어요. 앞으로도 계속 도련님하고 함께할 거예요."

"신교가 부모의 원수라고 해도?"

"설사 그렇다고 해도 도련님이 그런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도련님은 지금 신교를 나와서 독립하셨잖아요. 그럼 신교와도 상관없죠."

"후후. 요 녀석이 아주 영리해졌어."

"도련님을 닮는 거죠."

허리춤에 손도 딱 얹고 으쓱거렸다.

자기 나름의 논리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여러 말 안 하마. 어떤 일이 벌어져도 너와 나는 같은 거로."

"네. 도련님하고 저는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거예요."

"그럼 문제는 그 승려겠군. 네 부모님에 대해서 찾고자 한다면 그들을 통해야 할 텐데. 필요한 것만 쏙 빼먹기는 쉽지 않아 보여."

"신녀 자리를 수락하고 부모님에 대한 것만 알아내면 되지 않을까요?"

"그 뒤에는?"

"야반도주?"

"하이고, 이것아. 그 인간들 기세를 못 봤냐? 덜컥 수락하고 난 뒤에 장난처럼 뒤집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야. 눈에 불을 켜고 널 잡아먹으려고 들걸?"

"그, 그런가요?"

옛적에 망해버린 일월교 따위가 무섭지는 않다.

다만, 광신적인 집단과 척을 지면 이래저래 귀찮은 것이 많은 게 현실.

명한으로서도 최대한 마찰은 피하고 싶었다.

"잠깐. 일월교 놈들이 네 족보는 어디에서 구했을까?"

"족보요?"

"신교는 일월교의 정보를 대부분 지웠어. 필요 때문에 여덟 가문 후손은 남겨 두었지만, 당시 교주였던 인물의 후손은 철저하게 제거했지. 기록이 길거리 좌판에 널려있을 리는 없잖아."

"아. 확실히 그렇네요. 최근까지도 족보상의 기록이 남아 있다는 건 누군가 계속해서 추적했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럼 정마대전 시기까지 계속 추적을 하다가 그 뒤로는 끊겼다는 건데."

이걸 단락적으로 추적하려면 배경적인 정보가 많아야 한다.

신교 밖에서 이걸 해내기에는 제약점이 너무 많다.

"신교에 돕는 자가 있다는 얘기네."

누가 됐든 상당히 높은 자리에 있는 인물이다.

"신교의 사람이 왜 절 찾도록 했을까요? 일월교의 혈통은 신교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걸 텐데."

"그러니까. 어쩌면 단순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어."

"그, 그럼 어떻게 하죠? 우린 이미 신교에 댈 선이 없는데……"

"아니. 아직 신교에 써먹을 손은 남아 있어. 편지 한 통 써야겠다. 빚 좀 갚으라고."

그것도 꽤 큰 손이.

#

와락―!

강유가 들고 있던 서신을 손으로 구겼다.

구겨진 서신 만큼의 주름도 얼굴에 새기고 있었다.

‘쯧.’ 혀 차는 소리에 서신을 건넨 수하는 황급히 자리를 피해 물러났다.

심기가 불편할 때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불편한 내용입니까?"

"직접 봐라."

그나마 다가가는 건 측근인 구문자.

강유가 거의 던지듯 서신을 건네고는 상석에 몸을 기댔다.

"호오. 생각보다 대응이 빠르군요."

"재미있다는 얼굴은 집어치우고 상황이나 정리해."

"후후. 크게 복잡할 건 없습니다. 예상대로 숨겨둔 패들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니까요."

짜증 섞인 목소리에도 구문자는 태연했다.

지금까지는 상정된 상황이었다.

"그럼 혼천지계의 일환이라는 거냐?"

"중원을 사분오열 찢어놓고 피와 죽음을 덮기 위한 혼천지계. 그 계책의 실행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건 신교라는 강대한 세력입니다. 안을 후벼 파는 건 당연한 수이지요."

"이미 상당수를 도려내지 않았나?"

"책사는 언제나 2, 3의 수를 남겨 두는 법입니다. 팔반과 무력대에 박아 두었던 첩자들은 도려냈지만, 여전히 깊은 곳에는 혼천의 인물이 숨어 있지요."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천마대전 이후로 정식 후계자 자리는 공석으로 남았다.

즉, 이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공적’이 필요했다.

파운은 파운 나름대로, 강유는 강유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도려낸 첩자의 숫자면 물경 수십이었다.

"하지만 조금 의아한 부분은 있군요. 일월교의 잔재가 남아 있다고는 한들, 지금 와서 그것을 쫓을 세력은 없을 겁니다. 소백 도련님 세력을 전부 일월교 쪽으로 몰아서 신교와 대척시키려는 수일까요?"

"흥. 그 녀석이 그런 얕은수에 넘어갈 것 같냐? 일월교를 집어삼키면 집어삼켰지 당할 놈은 아니야."

"소백 도련님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는군요."

"……어찌 됐든 빚을 진 건 사실이니까."

툴툴대는 얼굴에서는 예전의 그 오만함을 찾기 어려웠다.

사람은 큰일을 겪으며 성장하는 법.

강유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상황은 제가 파악해 두겠습니다. 소백 도련님 쪽에는 그렇게 전하죠."

"서신은 네가 마음대로 적어서 보내라."

"멋들어진 문장으로 꾸며서 보내겠습니다."

"……쓸데없는 말은 빼고."

공조의 시작이었다.

#

며칠 뒤, 신교의 심처.

한 인물이 건물 그림자 사이를 바삐 거닐고 있다.

걸을 때마다 짤랑거리는 장신구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크게 들렸다.

"하아. 하아."

그림자 밖으로 벗어났을 때.

건물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달빛에 얼굴이 드러났다.

짙은 화장과 틀어 올린 머리카락.

내각에서 거주하는 여인 중 하나였다.

쿵쿵쿵.

바삐 걸음을 옮기던 여인은 한 건물 앞에 멈춰 서서는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그 와중에도 주변을 살피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중년 남자가 여성을 맞이했다.

검은색의 관복 중앙에 새겨진 ‘내(內)’ 자는 내각의 인물이라는 증거였다.

"이, 이렇게 찾아오시면 어찌합니까?"

남자는 여인을 황급히 안으로 들이며 물었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지금 온갖 곳을 다 헤집고 있단 말이다! 그 아이 기세가 얼마나 사나운지 남은 팔반의 늙은이들도 돕지를 않아!"

"하지만 우리 둘이 이렇게 있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그럼, 뭐 어쩌자는 거냐!? 네가 날 끌어들였잖아! 시킨 일만 제대로 하면 벗어날 수 있다면서!"

"자, 잠시. 목소리 좀 낮춰 주십시오, 부인. 누가 들을까 두렵습니다."

"하아. 하아. 난 이렇게 끝날 수 없어. 어떻게 살았는데? 무슨 수를 써서든 나를 신교 밖으로 꺼내줘. 아니면 너희 모두를 고발하고 함께 죽어버릴 거야!"

핏대까지 세우며 쏘아붙이는 여성에 남자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부인께서 많이 흥분하신 모양이군요."

그때였다.

방 안에서 두 사람이 아닌 제3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두 사람 앞에 서서는 얼굴을 가리던 천을 걷어냈다.

"……넌? 네가 왜 이곳에?"

그 얼굴을 알아본 여인이 이름을 입에 올리려는 찰나.

무언가 섬뜩한 마찰음과 함께 모든 동작에 멈췄다.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지는 건 붉은색 핏물.

"끄…… 끄르르륵. 감히…… 네가…… 끄으윽."

여인은 피를 쏟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두 번 살필 것도 없는 죽음이었다.

"천마의 아내 되시는 분이 이런 야심한 시각에 내각의 각원과 내통하면 곤란하지. 그건 참 남부끄러운 모습이야."

"……네?"

우드득.

남아 있던 남성 역시 목이 돌아가서 죽었다.

피를 쏟고 죽은 여성의 바로 옆이었다.

"하긴. 어차피 형식뿐인 아내던가."

웃음 섞인 혼잣말을 끝으로 둘을 죽인 인물은 자취를 감추었다.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은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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