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183/235)

일월신교

은휘가 코끝을 찡그렸다.

속세에 대한 미련이 희미한 그이지만, 이런 감정은 여전했다.

어쩌면 그것이 그를 여전히 이 땅에 존재하게 하는 원인일지도 몰랐다.

슬픔. 아쉬움. 안타까움.

떠나는 오랜 친구에 대한 감정이었다.

"꼭 그렇게 무리를 해야 했던 거냐?"

"후후. 알면서 그런 말을 하네. 너도 무언가를 느꼈으니까 청청, 저 아이를 데리고 왔던 거 아니냐?"

"바란 건 아니야."

"알아. 그래도 미련은 없어. 땅에 묶인 채 인간의 탐욕이 피로 젖어가는 걸 계속 보고 싶지는 않았거든. 이즈음에서 물러날 수 있으니 되레 속은 편해."

붉은색 희미한 연기 형태의 미요였다.

그녀는 모든 생명을 금홍에게 건네고 신수로서의 존재를 포기했다.

그녀가 지키던 영굴의 존재 역시도 마찬가지.

쐐기로 인한 상처로 그 영력은 다른 영맥으로 흘러 들어갔고, 남은 기운은 금홍에게 깃들었다.

지킬 곳이 없으니 문지기는 떠날 때였다.

"뺘아아……"

"울지 마렴, 작은 아이야. 아직 어린 네게 큰 짐을 떠넘겨서 미안할 따름이란다."

"뺘!"

"후후. 그래. 홀로 지키던 나와는 다르게 네게는 가족이 있으니까. 그 불꽃을 피울 때가 온다면 창공을 다 덮어 아홉 꼬리의 여우가 이곳에 있었음을 알려다오."

글썽거리는 금홍을 품에 안고 다독였다.

그녀의 신수로서의 모든 격은 이제 금홍의 것이 되었다.

아직 어리고 여물지 않아 펼쳐내지 못할 뿐.

때가 되면 금홍 역시 미요가 했던 것처럼, 영웅과 난세를 알리는 천기의 시효가 될 것이다.

"청청. 금홍을 잘 부탁한다. 부모 없이 자란 신수는 시대의 역린이 되기도 하고, 천하만민의 복이 되기도 한다. 잘 이끌어 세상의 복이 되게끔 이끌어다오."

"……꼭 그럴게요."

"후후. 울음이 많은 아이구나."

청청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제 막 만난 사이지만, 가슴이 많이 아팠다.

혼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만큼 미요가 입은 상처와 아픔이 크게 다가왔다.

오랜 세월 영굴을 지키며 경험한 죽음과 탐욕.

깊이 새겨진 상처는 죽음의 순간에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났다.

"소백, 너는…… 긴말이 필요 없겠지."

미요는 그런 청청을 부드러운 눈으로 훑으며 명한으로 시선을 돌렸다.

헤어짐의 순간이 청청과 금홍을 만나기 위함이었다면, 그 너머는 명한을 위함이다.

그녀는 세상의 흐름, 중심에 서 있던 만큼 이를 뚜렷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너머에서 봤어요. 제가 이곳에 온 이유도 이제는 알 것 같아요."

"그래. 인간의 실수를 되돌리는 것도 결국은 인간. 부름을 받은 네가 그 역할을 잊지 않는다면 하늘은 반드시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것이 천기라는 건가요?"

"후후. 아니, 이건 내 바람이다."

부드러운 답에 명한이 웃음으로 대꾸했다.

그녀가 어떤 의미로 천기보다 바람이라는 말을 썼는지 알 것 같았다.

인과의 바닷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인간.

하지만 그 안에서도 인간은 선택이라는 노를 저을 수 있다.

바다가 싫다고 모든 걸 엎으려는 누군가와는 다르게.

"할 말은 모두 전했다. 은휘, 뒤는 네게 맡길게."

"무책임한 여우 같으니."

"하하. 언젠가 윤회의 고리가 맞물릴 때가 온다면 다시 한번 너와 세상을 주유하고 싶다. 그래 주겠어?"

"네 말벗이라면 언제든지."

"아아. 영생과 비교하면 찰나일 텐데. 어찌도 그리 찬란한지."

미요의 몸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봄 하늘 따스함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조금씩 조금씩 세상에서 지워졌다.

"편히 쉬어라, 벗이여."

새겨지는 은휘의 말에 기대어 그렇게.

아홉 꼬리의 여우는 세상을 등졌다.

#

마차에 몸을 기댄 채 명한이 밖을 바라봤다.

산 중턱을 깎아서 만든 밭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땀을 송골송골 흘리며 밭일에 매진인 농부도 여럿이었다.

"뭘 그리 보고 있어?"

그 옆으로 청청이 슬며시 다가왔다.

"사람. 밖은 땡볕인데 저 사람들은 불평도 없이 일하고 있어."

"지금이 한창 바쁠 시기지. 지금 수확한 곡식이 한 해 동안 입에 풀칠할 수익이 되는걸."

"먹고살기 위해서 일한다 이건가."

"책임지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가족을 위해서 일하는."

"그래. 그렇지."

고된 일이라도 가족을 위해서라면 견딜 수 있다.

누가 시키는 일이 아니더라도 그걸 동력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저런 삶이 수없이 맞물려서 엮인 것이 천기. 그걸 찢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도 인간. 참 모순이네."

"순응하지 않는 건 인간의 특징이지. 용과 봉황. 구미호 같은 신수는 그야말로 하늘과 같은 힘을 지녔지만, 천기를 어그러뜨리는 짓은 하지 않아. 하는 건 오직 인간뿐이지."

"인간만의 죄악이라 이건가."

"끝없는 탐욕이라는 편이 맞겠지. 한계 없는 탐욕은 인간을 강하게 하지만, 그만큼 정도를 벗어나게도 하지."

"한계 너머의 탐욕."

명한은 ‘밖’에서 보았던 상처를 떠올렸다.

그물을 찢기 위한 탐욕의 결과.

만약 그것이 완벽히 성공하여 그물을 찢었더라면 어떤 결과가 찾아왔을까?

‘불로불사의 업을 이룬다 해도 세상은 난장판이 되겠지.’

하나의 탐욕을 위한 남은 모두의 희생.

"황제도 그랬던 걸까?"

"황제? 옛 황제? 그가 최초로 불로불사를 탐했던 인간이잖아. 가장 탐욕이 강했던 인간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긴 한데……"

그 목소리가 정말로 탐욕을 추구하던 인간의 것일까?

안과 밖의 경계에서 외로움에 허덕여 자신에게 집착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소름 끼치지만, 인간 자체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이 없다.

그렇게 빌어먹을 인간이었다면 지겨운 글의 독자가 되어줬을 것 같지도 않고.

"하아. 모르겠네."

"흐응. 무슨 고민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그렇게 골머리 썩지 마. 인간이 담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 넓다고. 그냥 눈앞의 것에 만족하고 그에 맞춰서 대응하면 돼."

"갑자기 점이라도 볼 셈이야?"

"후후. 우리 금홍이가 어엿한 신수가 됐으니 나도 의젓해져야지."

"뺘아!"

씩 웃는 청청과 그 위에서 퍼덕이는 금홍.

만담 콤비 같은 모습에 명한이 물끄러미 보다 그냥 웃고 말았다.

너무 많은 것은 모자람만 못하니, 청청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애들 선물이나 좀 살까?"

"오오. 흑점 주인이 돈을 푸는 건가?"

"마음껏 골라봐."

조금은 편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

소명회 본거지로 돌아오는 데는 며칠이 소요됐다.

사이사이 흑점을 통해서 주변 소식을 접하며 급한 일은 그때그때 처리했다.

무림맹의 준동이 심상치 않다는 것과 국소적인 마찰 상황 등이 최우선 정보였다.

시국이 매우 민감하게 돌아가고 있음이 실감 됐다.

"이게 무슨 일이야?"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도착하고 난 뒤에야 알게 됐다.

"돌아오셨군요, 태사님."

다급한 얼굴로 반기는 일월과 이월.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수백의 인파.

척 봐도 범상치 않은 이들이 저택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다.

"신교에서 나왔다고? 천마신교?"

"아뇨. 끝은 같지만, 앞이 다릅니다. 저들은 전부 일월신교에서 나왔다고 해요."

"일월신교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출신이었다.

일월교는 초대 천마의 출범 이후로 사실상 사라진 이름이었다.

부분적으로 그 명맥을 이어가는 이들은 있어도, 이렇게 단체로는 아니었다.

명한이 운집한 이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대가 이 장원의 주인이오?"

도드라진 인물이 있었다.

흑백의 도포를 몸에 두르고 키보다 큰 석장으로 땅을 지지하고 있는 승려였다.

풍기는 기세부터 행색까지 모든 것이 기묘했다.

"내가 이곳의 주인, 소백이다. 너희는 누구인데 이 앞에서 행패를 부리는 거지?"

"긴말은 하지 않겠소. 일월신교의 빛을 이어가실 주인께서 장원 안에 있소. 우리는 그분을 모셔가려고 이렇게 온 것이오."

"그분? 누구를 말하는 거지?"

"그대들이 칭하기를 향아. 신교의 명칭으로는 일월신녀라 하오."

"향아라고?"

살짝 놀라서 돌아본 명한은 문가에서 기웃거리는 향아를 발견했다.

평소 같으면 버선발로 달려올 그녀이나, 지금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들에게 꽤나 시달렸다는 증거였다.

"우린 오랫동안 일월신교의 적통을 찾아서 헤맸소. 그러다가 얼마 전, 고문을 통해서 당시 교주의 혈통을 발견했으니, 그게 바로 일월신녀요."

"하. 갑자기 향아가 일월신교의 적통이라고? 너희는 이미 한 번 맥이 끊긴 집단이다. 이런 식으로 우기는 건 곤란해."

"우기는 것이 아니오. 우리에게는 증거가 있소."

승려는 품에서 양피지 꾸러미를 꺼냈다.

사람 이름이 차례대로 적힌 일종의 가계도였다.

"가계도에 따르자면 마지막으로 확인된 적통은 노유군이라는 분이셨소. 성도 버린 채 성도 인근에서 농사를 짓고 계셨지요."

"그럼 그 사람이나 찾아가지 여기는 왜 왔어?"

"그분께서 정마대전에 휘말려서 돌아가셨기 때문이오. 우리는 그분의 자식이 살아있기를 바라며 탐문할 수밖에 없었소. 그리고 몇 가지 증거를 찾아냈다오."

"……"

그들이 내민 건 초상화였다.

얼핏 봐도 향아와 매우 닮아 있었다.

"이게 바로 신녀의 어머니 되시는 분이라오. 전쟁에 휘말려서 피난 중에 노유군 님을 만나서 잠시 가정을 이루었었지. 이는 당시 이웃에 살던 몇 사람을 통하여 확인한 바요."

"그렇다고 치고. 그 뒤에는 어떻게 알았다는 거지?"

"당시 전쟁이 벌어진 지역은 회연지방. 화마에 휩싸여 지역이 완전히 초토화되었소. 그때, 두 분 내외 역시 돌아가신 것으로 확인됐다오. 하지만 신녀께서는 아니었지."

"아니었다고?"

"천마신교의 내부 장부에서 확인했소. 당시, 회전이 끝나고 난 뒤 천마는 살아남은 아이를 거두었다. 이들을 교의 일꾼으로 삼으니 과거는 묻지 않는다."

"그게 향아라고 확신하는 거냐?"

"기록에 남기기를…… 당시 외지에서 온 한 부부가 여아를 품에 안고 죽었다. 발목에 해와 달을 문신으로 새기니 이들은 일월교의 전신이라 판단한다. 이렇게 적혀 있었소."

명한의 입술이 가볍게 비틀렸다.

‘정말로 일월교의 후인이라는 건가?’

향아의 발목에 새겨진 해와 달 문양이라면 이미 알고 있다.

애초에 그녀가 일월교의 후인인을 알고 일월교의 무공을 가르쳤던 것이다.

하지만 일월교의 후인들이 이런 식으로 단체로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 묻지. 향아가 일월교의 후예라면 뭘 어쩌겠다는 거냐?"

"응당 일월신교의 주인으로 추대할 따름이오."

"일월교의 주인으로 추대한다고? 너희가 무슨 세력이 있다고? 이미 한 번 맥이 끊긴 집단에서 무슨 주인 운운하는 거냐."

"해와 달의 자식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소."

승려가 손을 들어 올리자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쏟아졌다.

그 숫자가 물경 수백은 넘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전부 촌부인가 묻는다면 아니다.

대부분이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다.

게다가.

‘월보의 흔적이 있어.’

바탕이 일월교의 무공이었다.

적어도 이들이 일월교와 관계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일단 물러나라. 이 문제는 향아와 이야기해본 뒤 다시 다루도록 하지."

"그럴 수는 없소. 우리는 신녀를 찾아 먼 곳을 달려왔소."

"내가 한 말을 못 들었나? 물러나라고 했을 텐데?"

"……!"

명한의 기세에 승려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감히 맞설 수 없는 그런 기세였다.

"너희를 도륙하지 않은 건 내 도의다. 물러나서 기다려라."

"으음. 그리 말한다면…… 알겠소."

합장하며 물러나는 승려.

이내, 수백의 인파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하아."

기껏 돌아왔더니 무슨 일일까.

명한의 한숨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