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1/235)

업보

오래된 석굴 아래.

먼지를 소매로 털어내던 파운이 어딘가를 바라봤다.

시선이 닿지 않는 아주 먼 곳에서 희미한 기척이 느껴진 탓이다.

하지만 이내 그건 흔적을 감췄다.

마치 착각인 것처럼.

"왜 그러십니까, 도련님."

"뭔가 있었다. 날 봤고, 나는 그걸 느꼈지. 하지만 순식간에 사라졌어."

"……이곳의 진법을 고려하면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무리입니다. 밖을 통해서 왜곡하지 않는 이상."

"그렇다면 그대의 사부 정도가 가능하겠군."

신기자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세상에 둘도 없는 기인. 오롯이 선계의 중심에 앉아 후학을 돌보는 도사.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겠지?"

"제가 사부님께 품은 정과 그간의 기억과는 별개로 간극은 존재합니다. 수십, 수백 년에 걸친 역사의 흐름을 관조하면 보이는 작은 먼지와 같은 차이죠."

"대단한 인간이군. 필시, 가진 바 능력으로는 중원을 차지하고도 남을 거야. 안 그래?"

"가능했다면 이미 그리하셨겠죠."

파운이 코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중원의 수많은 군벌과 무인들이 힘과 위치를 바라며 아등바등 싸울 때.

절대의 존재는 선계에서 그저 묵묵히 내려다봤을 뿐이다.

그 사실이 불쾌했다.

"이미 천기를 벗어난 수명을 산 존재들이라, 자신의 영역을 떠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리인을 움직인다. 마치 우리가 싸구려 장기말이 된 기분이야."

"허나, 판 위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말입니다."

"주인의 손짓에 따라 움직이는데도?"

"거역하는 건 마지막 한 번이면 충분하니까요."

발버둥일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파운도 신기자도 마찬가지였다.

높은 곳의 신선에게 꽃을 비수를 끝없이 찾아 헤맸다.

"이게 그 답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지금껏 루의 어르신께 인간의 무학으로 닿았던 존재는 손에 꼽습니다. 대표적으로 신교의 초대 천마. 귀문의 은휘. 그리고 이곳의 주인이 바로 그렇죠."

"귀신의 힘이라. 큭큭. 마음에 드는군."

"자칫 잘못하면 먹히고 맙니다. 아무리 도련님이라 해도 그렇게 된다면 구제할 방법이 없겠죠. 그래도 계속 나아가실 생각이신가요?"

오래된 석실, 반쯤 부서진 관을 보며 파운이 미소 지었다.

그 웃음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흥분, 두려움, 초조함.

그리고 무언가에 대한 기쁨이었다.

"난 아직 갚아줄 빚이 남아 있다. 이런 곳에서 어물쩍거리다가는 그 빌어먹을 놈이 끝도 없이 추월해서 넘어가겠지. 머리 꼭대기의 신선도 짜증 나지만, 내 옆의 호적수가 멀어지는 건 더더욱 싫다."

"그건 애정이네요."

"큭큭큭. 신기자, 네놈이 아니었다면 머리통을 베었을 거다. 하지만…… 삐뚤어진 것도 애정이라면 애정이겠지. 나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도련님이라면 성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당연하지."

파운이 입고 있던 옷을 집어 던졌다.

그의 걸음이 향하는 곳은 음습한 기운이 새어 나오는 관 속.

삶과 죽음 사이의 어딘가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난 파운이다."

웃음이 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

"거절한다."

천기자의 제안에 대한 명한의 답이었다.

"왜지? 네게는 괜찮은 제안 아닌가?"

의아한 듯 되묻는 천기자에게 명한은 담백하게 답했다.

고민하고 말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황제진경을 찾는 건 어디까지나 내 일이다. 그 둘이 천마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 두 사람의 역량에 따른 거지, 내가 돕고 말 것이 아니야. 돕는다고 설치면 되레 도를 들고 덤벼들걸?"

"의아하군. 너는 두 사람과 경쟁하는 관계 아니었나?"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의미 없이 말랑한 인간이라면 상대도 안 한다. 그들을 인정하는 만큼 나 역시 허튼 수는 쓰지 않는 것뿐이야."

파운이나 강유에게 ‘천마가 되게 해 준다.’라며 손을 잡는다?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편한 길을 굳이 돌아가려고 하는군."

"세상사가 다 그런 법이야. 편한 길만 골라서 가면 돌아섰을 때 잡고 일어날 난간조차 없겠지. 네 제안은 그만큼 무가치한 거다."

"……인간이란."

천기자의 기세가 조금 달라졌다.

"좋다. 네가 바란 것이니 뜻대로 해 보거라. 인간답게 탐하고 발버둥 치고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결국 인간답게 죽는 거다."

"하. 그러는 그쪽 신선 양반은 인간이 싫어서 산 위에 처박혀 있는 건가?"

"얄팍한 도발일 뿐이다. 나는 이미 인간을 벗어나 속세의 뜻은 저버린 지 오래. 그저 미물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으로 소소한 여생을 즐길 뿐이다."

"그런 사람치고는 활발하던데? 저 막군천은 그쪽이 보낸 거잖아. 바람을 들어준다고는 하지만, 귀에 속삭임 한마디 안 한 건 아니겠지?"

"그저 그뿐인 인간인 게다."

"쓰다가 버리면서 포장은 열심이네. 막군천이 그뿐인 인간이라면 너도 그뿐인 존재일 뿐이야. 전혀 나은 것이 없어. 그 잘난 곳에서 지금처럼 계속 거드름이나 피우고 있어. 인간답게 아등바등 올라가서 댁을 끌어내려 줄 테니까."

"……"

사늘해진 시선에 명한은 되레 웃었다.

완전히 탈각한 존재라면 이런 반응조차 없어야 정상.

신선의 흉내를 내고 있지만, 천기자 역시 한 인간에 불과했다.

"지켜봐. 이게 인간의 싸움이니까."

명한의 오른손이 다시 한번 공간을 찢었다.

#

막군천은 이질감을 느꼈다.

분명,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인데 무언가 달라졌다.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도 알아낼 수 없는 어떤 변화가 있었다.

이건 감각 너머의 또 다른 직감이었다.

"너. 뭘 한 거냐?"

"학부모 상담."

"뭐?"

긴말은 필요 없다.

명한은 그대로 막군천과 부딪쳤다.

어깨와 어깨.

힘이 불꽃처럼 충돌하며 주변으로 충격파를 쏟아냈다.

‘소용없다!’ 충격파를 손으로 잡아서 부숴버리는 막군천.

말마따나 소용없는 짓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대로 상황은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큭!?"

욱신거리는 어깨.

부서진 영혼의 파편이 고름처럼 몸에 달라붙었다.

살점을 녹이고 뼈와 신경을 갉아 먹었다.

지독한 고통에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이제 남은 건 너뿐이다, 막군천. 네가 정말로 천하를 잡을 사내라면 스스로 이 자리에서 증명해봐라."

"무슨 개소리냐, 소백!!"

"감당하란 말이다! 네가 죽인 이들의 원한을!"

명한이 양손을 교차하며 간격으로 뛰어들어갔다.

불의 기운을 머금은 힘이 나선의 형태로 뻗어 나가 막군천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땅이 키 높이로 치솟고 벽면의 금속이 녹아내렸다.

진노한 불의 거인이 손으로 대지를 후려친 격이었다.

열풍이 한 점으로 뭉쳤다가 사방으로 폭발했다.

주변 모든 것이 일제히 쓸려나갔다.

"네놈은 그저 모든 걸 떠넘기고 있었을 뿐이다! 네 지위도! 힘도! 책임도! 이제 널 봐 줄 사람 따위는 없어! 이곳에 홀로 서서 네놈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달게 받아라!"

"웃기지 마! 나는 왕으로 태어났다! 날 떠받치는 것이 너희 같은 우매한 자들의 역할이다! 백이건 천이건 얼마든지 죽으라고 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말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증명하라고!"

솟구치는 불의 파도 뒤에서 명한이 진각을 밟았다.

땅에서 하늘까지 그의 의지가 이어졌다.

천지인, 삼위일체는 세상을 향한 인간의 목소리.

그 부름에 모든 영의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죽음으로 인한 고통, 분노, 회한, 안타까움, 슬픔.

모든 감정과 감정으로 인한 뒤틀림도 함께하고 있었다.

이를 명한은 묵혼으로 받아들이며 쌓지 않고 내보냈다.

구구구구구……!

힘으로 실체화된 영혼이 막군천을 찍어누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영혼이지만, 이렇게 모이면 거인과 다름없다.

엄청난 증오와 분노와 뭉친 거인.

막군천은 자신이 짊어진 혼의 절규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끄…… 아아아아!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이제야 직시를 하는군. 그동안 네놈이 농락한 혼의 절규다. 억지로 부여잡아서 그 고통을 쥐어짜던 혼의 목소리라고!"

"닥쳐! 닥쳐!! 다 저리 가! 너희 따위가 대체 뭐라고 나에게 떠드는 거냐!!"

막군천은 허공으로 손을 휘저으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밖’을 통한 천기자의 지원이 없는 이상 그는 수없이 많은 혼을 감당할 수 없었다.

혈식마도라는 건 결국 시전자가 감당하는 한계까지의 힘.

그 이상을 받아들인 자는 언제나 마도에 빠져 무너질 뿐이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나는 고작 이런 곳에서 무너질 사람이 아니야! 무당을…… 천하를 얻어야 한다고! 그만!! 그만 와! 다가오지 마! 너희는 이미 죽은 사람이야! 오지 말라고! 으아아아!!"

그가 무엇을 보는지 명한은 알지 못했다.

이미 하나의 형태로 엉겨 붙은 혼은 개인이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혼은 언제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인 법.

막군천이 쌓은 죄업은 그 헝클어진 형태 속에서도 뚜렷하게 그를 괴롭혔다.

"아, 아버지!? 아버지! 왜? 왜!!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전부 당신이 망친 거잖아! 고작 그딴 놈들에게 죽기나 하고! 전부 당신 탓이야! 당신 탓이라고!!"

팔과 다리. 전신이 천천히 썩어들어갔다.

무너진 마음과 혼은 더 이상 육체와 하나일 수 없었다.

마치 나사가 어긋난 기둥처럼 차례차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비웃던 어딘가의 짐승처럼.

"……난 그저. 바랐어. 무당의…… 용."

썩은 점토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그의 마지막 말이 흩어졌다.

명한은 그 처참한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화산처럼 이글거리는 혼의 덩어리로 시선을 옮겼다.

"가라. 본래 가야 할 곳으로."

목적을 잃은 혼 역시 오래되면 부패할 뿐.

더는 이 땅에 남아서 괴로울 이유가 없었다.

명한의 손끝을 따라서 혼이 천천히 떠올라 저편으로 사라졌다.

"다음 생에는 고통 없이 평안하기를."

건넬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

은휘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조금 전, 막군천의 기운이 완전히 소멸했음을 감지한 것이다.

‘고놈 참.’ 끌끌거리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뭐에요? 좋은 소식 있어요?"

"그래. 소백이 상황을 정리한 모양이다."

"하하. 역시 제법이라니까. 이러면 저기 저 혈교의 교주라는 인간만 처리하면 되는 건가요?"

청청히 크게 반색하며 양생을 가리켰다.

은휘에게 바짝 쫄아서 굳어있는 인간이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것이 이런 경우인가?"

"어?"

하지만 그 양생의 기색이 뭔가 이상하다.

양팔이 뒤로 묶인 채 천천히 일어나서는 흐릿한 눈동자로 청청 등을 바라봤다.

뭔가 사람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쯧. 처음부터 안 믿었던 건가."

"당연하지 않나. 셈에 따라 움직이는 핏덩이 따위를 내가 믿을 이유가 없지."

"하긴. 이런 아이에게 당했다면 나도 실망했을 거야. 그래도 명색이 서복 아닌가."

"후후.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군, 은휘."

고개를 치켜드는 양생의 눈동자 안에 검은색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눈이 비추는 건 양생이 아닌, 서복.

"이 아이가 마음대로 행동하게 내버려 둔 것도 차도살인계를 위함이었나?"

"헝클어진 천기나 몇 가닥 정도는 볼 수 있지. 자네도 그걸 내다보고 움직이지 않았나?"

"내가 읽은 건 다른 모습이었다만."

"후후. 인간은 언제나 보고 싶은 걸 보는 법이지. 한 꺼풀을 벗어난 우리조차 마찬가지니 말이야."

양생의 탈을 쓴 서복이 느긋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느새 제압된 점혈은 풀려 있었다.

"그래. 그 잘난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뭐지? 숨기고 있었다면 끝까지 몰랐을 텐데."

"첫 번째는 호기심이네. 내 앞을 계속 방해하는 인간. 그 뒤에 있는 은휘라는 존재가 궁금했거든. 과연 그가 계속 날 방해할 수준인지 알고 싶어서."

"소원대로 됐군. 그럼 두 번째는 뭐지?"

은휘의 답에 서복은 느긋하게 웃었다.

어딘가 불안한, 그런 웃음이었다.

그리고.

"자네를 죽이기 위함이네."

그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쿠우우우……!!

양생의 몸이 붉은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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