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제안
격렬함의 시작은 명한이었다.
짧게 땅을 차, 몸을 앞으로 쭉 늘어뜨렸다.
번개와 같은 움직임.
눈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이미 명한은 막군천의 거리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달려가던 속도에 더해지는 허리의 회전.
오른손이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쩌어엉!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중간에 비집고 들어온 검 한 자루가 아니었다면.
면으로 주먹을 막고 그 충격을 전부 상쇄.
방향을 살짝 비트는 것으로 명한을 밀어냈다.
"명검이로군."
"큭큭. 마도에 어울리는 마검이다."
검신으로 막군천의 기운이 쏟아졌다.
응집된 기운은 강기 이상.
털어내듯 휘두른 일격에 붉은빛의 파도가 전면을 덮었다.
명한이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지만 연격의 속도가 굉장했다.
하나의 파도가 지나가기도 전에 두 개, 세 개의 파도가 몰려왔다.
끝없이 이어지는 파랑을 보는 기분.
피하기만 해서는 끝이 없다는 판단에 명한이 양 주먹을 부딪쳤다.
거대한 충격파가 접점에서 퍼져나가 파도를 쓸어버렸다.
"얄팍한 수."
"이런 싸움에 깊고 얇음은 의미 없어."
부서지는 파도의 파편 사이로 다시 뛰어들어갔다.
모든 편린을 피하지 못해 상처가 늘었지만, 그만큼 속도와 방향은 뚜렷했다.
검을 쥔 막군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일격에 맞서서 한 걸음 더 가속했다.
어깨에 닿는 검.
카앙―!!
충격에 들리는 건 금속의 마찰음.
살짝 뜨이는 막군천의 눈을 확인하며 가속한 주먹을 쑤셔 넣었다.
쿵―! 쿵! 쿵!!
동굴 벽을 몇 겹이나 뚫고 지나가 처박히는 막군천.
땅이 흔들리고 동굴이 불안전하게 삐걱거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부스스 무너지는 흙먼지는 이것으로 싸움의 끝을 알려도 모자람이 없었다.
다만.
"……육체를 경화한 건가?"
충분하지는 않았다.
막군천이 가슴팍의 붉은 자국을 손으로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서 사용한 기운의 운용이 붉은색의 연기로 영향을 드러냈다.
달아오른 금속의 김으로도 보이나, 실상은 다르다는 걸 마주한 명한은 알았다.
저 붉은색은 영혼의 잔재였다.
"영혼을 태워서 벽으로 삼고 있군."
"큭큭. 어차피 쓰고 버릴 놈들이야. 이렇게라도 이용 가치가 있다면 다행이겠지. 하지만 놀랐어. 네놈이 그런 수준에까지 도달했을 줄이야."
"……"
막군천의 시선이 닿은 건 명한의 어깨였다.
검이 스쳐 간 자리로, 희미한 흔적만 있을 뿐 깊은 상처는 없었다.
위력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
명한은 어깨를 반대 손으로 주무르며 답했다.
"힘의 본질을 알아가고 있을 뿐이다. 남의 것을 훔쳐서 제멋대로 쓰는 네놈은 결코 알 수 없겠지만."
"후후. 잘난 맛에 떠드는구나. 좋아. 그래야 네놈을 갈아 마시는 보람이 있지. 네 영혼은 또 어떤 목소리를 들려줄지 기대가 된다."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거냐?"
"인간이 뭐가 대단하다고. 어차피 나약함뿐인 존재다. 나는 하찮은 무당과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엇도 나를 막을 수는 없어."
"한때 무당등룡이라 추앙받던 인간의 말로가 이것이라니."
"큭큭. 하찮은 이름일 뿐이다. 이미 그 이름을 부르짖던 자들은 내 먹이가 되었으니까."
"……"
손끝을 혀로 핥는 막군천.
도드라진 영혼의 움직임이 명한의 눈에 감지 됐다.
지독한 분노와 괴로움으로 점철된 누군가의 절규였다.
‘그런 건가.’
비통함 속에서 진실이 보였다.
한때 무림을 종횡하던 ‘친구’들의 원통함이었다.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망설임도 없었겠지?"
"없지. 나와 그들은 다르니까."
"그래. 나도 널 같은 인간으로 보면 안 되겠다."
선을 벗어난 자에게 보여줄 아량 따위는 없다.
명한이 끝없이 펼쳐진 무아의 세계에 하나의 감정을 던졌다.
그건 인간으로서 가지는 순수한 분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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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치열했다.
무위를 깨닫기 시작한 명한은 분명 아득한 수준의 고수.
하지만 막군천의 혈식마도도 기이할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비운 자와 가득 채운 자의 싸움.
양극단에 놓인 이치는 서로를 물어뜯을 만큼의 충분한 힘이 있었다.
"처음부터 네놈은 마음에 안 들었다, 소백!"
양팔을 기형적으로 부풀리며 참격을 날리는 막군천.
벽면에 깊은 상처를 새기며 명한의 전면을 날렸다.
부서지는 바닥에 층이 가라앉고 벽이 무너져 토사처럼 쌓였다.
"내가 할 말이다, 막군천! 네놈이 주검산장을 노리고 있었을 때부터!"
"하! 주제도 모르는 놈! 그건 전부 내 것이었다! 내가 세운 계획이었다고! 네놈이 그걸 중간에서 망치지 않았어도 지금의 무림맹 맹주는 내가 됐을 거다!"
"너 같은 위선자는 결코 그런 자리에 오를 수 없어!"
명한이 뱀처럼 몸을 틀며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허리부터 어깨까지가 욱신거렸다.
무아의 경지에서 자연의 속성을 뽑아서 몸을 강화하는 요령.
막군천의 검격을 방어한 ‘금기(金氣)’의 수법은 자상에는 유리하나 타격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쌓이는 충격을 모두 해소하기는 힘들었다.
‘한 번에 하나의 속성을 쓰기도 버거워.’
무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아직은 벅찬 명한이었다.
"내 앞을 막지 마라, 소백! 나는 날 때부터 지배자의 운명을 지고 있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이…… 하찮은 놈들이 내 길의 반석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미친 새끼. 그래서 한때 친구로 묶이던 이들을 전부 죽인 거냐!?"
"친구!? 친구라고? 크하하하! 웃기지 마! 나 같은 존재는 언제나 홀로 서 있을 뿐이다! 하등한 것들과 친구라고 엮이는 것조차 역겹군!"
"넌 진지하게 정신과 상담을 좀 받아봐야겠다."
이 정도 자의식 과잉이면 입원 치료다.
명한이 짧게 숨을 토하며 전신의 기운을 폭발시켰다.
주변 경관이 밀리며 타점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내뻗는 주먹, 강렬하게 폭발하는 공간.
충격에 몸이 벌벌 떨리고 지면부터 벽까지가 한 번에 사라졌다.
"소용없다, 소백! 내 몸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혼이 깃들어 있으니까!"
"……"
찌르르 울리는 주먹을 힘껏 쥐어 진정시켰다.
조금 전의 일격으로 수십의 영혼이 소멸했다.
그 반발은 속을 흔들고 영혼을 병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영혼이라는 건 그만큼 강하고 단단한 존재.
애초에 묵혼공이나 극천일무기가 잔재만을 다루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상적인 지배력이 아니야.’
수십 수백의 영혼을 개인이 묶어두는 건 불가능하다.
그 어마어마한 집념과 원한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네놈도 갈기갈기 찢어서 내 먹이로 삼아주마."
어딘가에 있다.
막군천 몸 어딘가에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물건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아직 부르지 못하는 누군가의 선물.
수많은 혼을 한곳에 강제하고도 현상을 유지할 수 있는 권능의 존재였다.
"죽어라―!!"
벼락과 같은 막군천의 검이 수십 갈래로 나뉘어 쏟아졌다.
몇 개는 피하고 몇 개는 막으며 명한이 전진했다.
손끝과 어깨. 볼과 팔이 찢어져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기운의 집적율이 떨어지며 무아를 유지하는 것이 버거워진 탓이다.
달리면 숨이 차듯이, 모든 것을 비워내는 것도 정신력을 요구했다.
‘이 세상에 만능은 없어.’
입술을 깨물고 또다시 날아오는 검격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콰득.
부서지는 검강.
흩날리는 파편 속으로 득의한 막군천을 바라봤다.
저 웃음은 절대적인 자신감의 발로.
저런 인간 쓰레기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꼴이다.
그건 인정할 수 없다.
‘아무리 세상사 거지 같아도 남을 괴롭힌 적은 없다.’
헐뜯지도 비방하지도 욕하지도 않았다.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끌어내린 적도 없다.
고작 ‘정점의 계획’이 어긋났다는 이유로 한때의 친구들마저 먹어치운 괴물의 방식에 뒤처지고 싶지는 않다.
"큭큭. 이제 슬슬 힘이 부족한가? 그게 인간의 한계다. 인간이라는 굴레에 머물고 있으니까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거지. 너와 나의 차이는 그런 거다, 소백. 애먼 동정심이나 양심 따위를 따지고 있으니 고작 그 자리에서 멈출 뿐이지."
"……"
"네 자리를 알고 죽어라. 이 몸이 세상에 군림할 때, 네 영혼도 아낌없이 써주도록 하지."
다시금 영혼을 녹여서 검에 두르는 막군천.
그의 힘은 끝도 없이 셈 솟는 것 같았다.
‘이런 건 불가능해. 하지만 눈앞의 모습은 진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
지금 이 현실이 틀렸거나, 진실이 닿지 않는 곳에서 쓰고 있다는 말.
"밖이군."
명한이 오른손을 뻗어서 공간을 부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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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겹의 유리였다.
깨지고 깨지고 계속해서 깨어졌다.
파편이 비처럼 내리고 충격이 공간을 타고 물결처럼 번졌다.
세상이 흔들거리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닿지 못한 건가."
무너지기에 세상의 기둥은 견고했다.
모래알처럼 떨어지는 파편의 가운데, 원형의 공터를 그린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의 중얼거림은 마치 붓처럼 세상에 그려져 마음으로 새겨졌다.
명한의 시선은 노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인간의 집요함은 천기의 흐름조차 흔들 정도로 강하다네. 비록 이 한 번의 시도가 실패했다 하여도 몇 번이나 부딪치면 언젠가는 깨어지겠지."
"당신은……"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고 내가 자네를 못 볼 리 없지 않은가. 게다가 말일세 자네의 사부는 걱정이 너무 심해. 내 어찌 자네 같은 인재를 허투루 대하겠나."
막군천이 모시는 그 인물이었다.
천지간에 서복과 맞서 천기를 뒤흔들며 황제의 불사종법조차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인물.
의심조차 필요 없었다.
"천기자."
"허허. 이제야 불러주는구먼."
입 밖으로 뱉은 이름에 천기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가볍게 보기에는 그저 옆집 노인과 같지만, 그건 그저 거죽일 뿐이다.
그는 이미 천 년도 훌쩍 넘은 역사의 존재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술과 법의 주인이었다.
"이곳은 어디지? 막군천은 어디 갔지?"
"너무 그리 급하게 굴 것 없네. 자네가 밖에 손을 뻗음에 내가 마주 잡았을 뿐이니까. 속세의 시간 따위는 이곳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마음 편히 있게나."
"밖에 개입하는 나를 노렸다고?"
"기회라면 여러 번 있었으나 굳이 하지 않았네. 자네 곁에서 눈을 부라리는 은휘라는 인물은 꽤 번거롭거든. 싸움이 커지면 나조차 상처 입을 각오를 해야 할 정도로."
누가 감히 은휘를 두고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말투와는 다르게 오만함이 엿보였다.
"나는 그쪽과 할 말이 없어. 저 밖에서 못난 짓 하는 막군천을 막아야 하거든."
"하하. 연이 닿았으니 그 아이가 어디를 갈까. 어차피 그 아이의 쓰임은 그것으로 다했으니,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네."
"쓰임이 다했다고? 넌 막군천으로 하여금 이 땅에 쐐기를 박으려던 것 아닌가?"
"그건 서복 그 아이의 생각일 따름이네."
희미한 웃음 너머로 무언가 일렁였다.
그것은 감정의 편린이나 명한은 읽을 수 없었다.
그와 천기자와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다.
"그럼 네 목적은 대체 뭐지? 뭐 때문에 막군천을 여기로 보낸 거냐?"
"아무런 목적이 없다면 믿겠나?"
"뭐?"
"나는 그저 그 아이의 바람을 이뤄주었을 뿐이네. 힘을 원했으니 힘을 주었고, 그 이상을 탐하였으니 위치를 알려주었을 뿐이네. 지금껏 자네가 만났던 모든 이들이 그러했지. 나는 무언가를 목적하고 움직이지 않네."
"헛소리!"
"진실이라네."
담담하게 답하는 천기의 목소리는 색이 되어 명한의 머리에 새겨졌다.
떨쳐낼 수 없는 어떤 낙인과 같았다.
명한이 입술을 잘근 씹으며 뒤로 물러났다.
"후후. 좋은 재능이네. 필시 은휘 그 아이보다 높은 곳에 오르겠지. 하지만…… 당장은 이래저래 곤란하니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겠네."
"제안?"
"황제진경의 진본을 가지러 올 생각 아니었나? 내 조건을 수락한다면 황제진경을 넘겨주지. 어떤가?"
"……무슨 조건?"
갑작스러운 제안이나, 들어볼 가치는 있었다.
천기자는 그 반응에 웃음을 머금으며 답했다.
"못난 두 제자의 꿈을 이뤄주는 것이라네."
그것은 조금 뜬금없는 말.
"파운과 강유로 하여금 천마의 자리를 얻게 하게나."
아니, 많이 지나친 말이었다.